127. 꼬이면 풀면 되고 (3)
욕심으로 샤워를 한 기분이다.
머리가 개운해진다.
좋은 무대 위에 좋은 공연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모든 게 씻겨 내려갔다.
아, 한 가지 빼고.
뒤로 넘겼던 문제가 다시 앞으로 와 슬그머니 펼쳐진다.
학준이 형 신곡의 가사 문제.
‘이건 진짜 난감한데.’
점심때부터 계속 홍 작가여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으면, 찾아가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생각보다 이유는 쉽게 찾아졌었다.
그동안 작업했던 곡들을 연달아 틀어 쭉 들어보니 그녀여야 하는 이유가 선명해졌지.
하지만 정작 작업실로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는 깜깜하다.
금전적인 부분을 논해야 하나?
아니면, 가사를 안 쓰는 이유를 찾아 그것부터 해결해야 할까?
작사에 문외한인 내가 그녀와 무슨 얘기가 되려나······.
고민이 알을 까는 순간, 최정아가 단원들을 향해 밝게 인사하곤 내 쪽으로 다가왔다.
“피디님, 사무실 바로 안 들어가도 되면 근처에서 저녁 같이 드실래요?”
“나 바로 약속이 있어서.”
“아···.”
방금 전, 연습실을 가득 채웠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같이 밥을 먹은 적도 단체 회식 때 말곤 없었네.
미안함에 쓰게 웃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시선을 고정했다.
“···?”
그러고 보니, 여기 있잖아?
작사하는 애.
심지어 내 기억으론 홍 작가가······.
“같이 갈래?”
“······네?”
눈은 놀랐다.
그리고 입은 살포시 웃는다.
아마도 긍정일 듯하다.
#
남색 떡볶이 코트를 걸치고, 도톰한 목도리도 돌돌 말아 고양이를 닮은 눈만 쏙 나와 있다.
최정아가 조수석에 올라타며 안전벨트를 찼다. 그리곤 내부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 차 오랜만에 타봐요.”
“연습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뒤에 편하게 타지그래.”
“여기도 편한데요?”
보란 듯이 시트에 통통거리는 최정아를 보며 웃었다. 최정아도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필러 안으로 들어오는 하늘은 노릇노릇하고.
분위기만 봐선 드라이브······딱 그런 느낌인데 말이지.
실상은 가사 받으러 가는 길이지.
그것도 가사 말고 글 쓴다는 사람에게.
가서 안 되면 떼라도 써야 할 판이다.
“그래도 싫다고 하시면요?”
내게 대강의 상황을 들은 최정아가 물어왔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삼고초려라도 고려해봐야지.”
“와······.”
‘부럽다’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웃었다.
“뛰어난 작사가보단 내 맘 같은 작사갈 구하는 게 더 어렵거든. 그런 면에 홍 작가님은 믿고 맡길 수 있겠더라고.”
“저는요? 저는 뭘 믿고 맡길 수 있어요?”
호기심, 기대 같은 것들이 가득 찬 눈망울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이어서 얇게 웃었다.
“노래?”
“또요?”
“작사?”
“그리고요?”
“그리고 또······.”
슬쩍 옆을 보았다.
“조수석?”
이게 저리 흡족할 농담인가?
시답지 않은 아재의 기지에 최정아가 밝게 웃는다.
뭐, 농담이었지만 또 사실이기도 했다.
최정아는 학준이 형 다음으로 내가 의지하는 사람인 동시에, 내 손으로 일궈낸 뮤지션이니까.
그렇게 20여 분을 이동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산에 위치한 작은 오피스텔.
건너편 편의점에서 주스 한 박스 사서 올라가는데, 최정아가 불쑥 물어왔다.
“제가 왔다고 불편해하시진 않을까요?”
음. 그런가?
“아닐 것 같은데······.”
고갤 저으며 초인종을 눌렀다.
갑자기 걱정이 눌어붙은 최정아의 얼굴(-정확히는 목도리가 가리지 못한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찬밥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네?”
최정아의 눈빛이 물음표를 띄우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렸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도시적이고 날카로운 이미지의 홍윤경 작가가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을 날리며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 내 뒤쪽으로 시선을 넘기며 갸웃거렸다.
“누구······.”
“아.”
최정아가 무슨 미라 붕대 벗기듯이 목도리 풀어냈다. 검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허리춤까지 내려온다. 화장기 없는 새하얀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홍 작가의 눈이 확 커진다.
“어머머, 이게 웬일이야!”
시니컬은 얼어 죽고,
팬심만 활짝 폈다.
#
“정아 씨는 가사를 있는 그대로 불러요.”
들뜸이 전해져 오는 홍 작가의 목소리다.
나를 힐끗 보지만 몸의 방향은 완벽히 최정아를 향해있다.
데려오길 천만다행이다.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졌다.
이 정도면 기름을 물로도 만들겠다 싶을 정도로.
어쨌거나, 홍 작가가 칭찬을 이어간다.
“그럼 누구는 다르게 부르냐 싶겠지만, 이게 정말 어려운 거거든요. 가사를 화자로 두고 얘기하는 감정들을 모두 짚어내는 거예요. 필요 이상으로 격해지지도 않고, 딱 그만큼!”
현관문을 넘어서는 그 순간부터 열렬한 팬심을 드러낸 지 벌써 10여 분째.
얼떨결에 나도 최정아의 칭찬을 듣고 있다.
‘뭐, 기분은 좋네.’
언제 들어도 이런 류의 칭찬은 환영이지.
어쩐지 내가 최정아를 따라온 것 같은 모양새가 된 것 같지만······.
“근데 더 충격적였던 거. 가사를 정아 씨가 썼다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인공지능이 아무리 빠르게 발전해도 내가 죽기 전까진 이 직업이 사라질 일 없겠다, 안심했더니 웬걸. 뮤지션이 작사를 그렇게 잘해버리면 어쩌잔 거야? 그쵸, 대표님? 대표님도 위기감 느끼지 않아요? 요새 작곡하는 뮤지션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아, 뭐···전 딱히···.”
“아, 뮤지션들보다 본인이 월등히 뛰어나니 상관없으시다. 뭐 이런 건가?”
“그런 건 아니고요.”
이번엔 황송한 웃음만 흘리던 최정아가 주제를 이끌었다.
“전 강단비 선배님의 ‘혼잣말’ 가사 정말 좋아하거든요.”
내게서 시선을 뗀 홍 작가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웃었다.
“그거? 아휴 말도 마. 그거 의뢰받고 한 열흘을 고민하다가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홧김에 영국으로 갔거든. 램버스브리지에 서서 빅밴을 조망하는데, 거기서 뭔가 딱 떠오르는 게 있었지.”
기억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는 혼잣말이 상대방에게도 들리길 바라는······그런 내용이었지 아마?
나야말로 둘의 대화를 조망했다.
홍 작가의 얘기에 최정아는 신기한 듯 빠져들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사들이 어떤 식으로 탄생 되었는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니, 안 그래도 남들보다 초롱초롱한 눈이 더 반짝거린다.
홍 작가도 더욱 신이나 이런저런 썰을 풀어놓았다. 좋아하는 뮤지션이 존경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작업물을 칭찬하는데 신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게 얼마나 둘의 대화를 들었을까?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근데 작사는 왜 안 하시는 겁니까?”
홍 작가가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거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을 훑는다.
“보다시피.”
A4용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슬쩍 봐도 텍스트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그걸 바라보는 홍 작가의 시선이 어딘가 뻑뻑해 보였다.
“아시는 분이 출판사에서 일하시는데, 책 한 권 써볼 생각 없냐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작사에 염증이 좀 났던지라 덥석 그러겠다 했어요.”
“염증이요?”
“정말 열심히 달려왔는데, 오히려 이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버거워질 정도로. 지쳤다 싶었죠. 짧은 가사에 얘기하고픈 걸 담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노래엔 음절이란 게 있으니까. 그걸 깨트리면 곡이 망가지잖아요. 그것도 늘 스트레스였고.”
홍 작가가 다시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글은 내가 얼마든지 늘려 쓸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한 번 해보자 싶었죠.”
홍 작가가 웃는다.
뭔가 더 말하려는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리고는 침묵한다.
이윽고, 홍 작가가 최정아를 돌아봤다.
“정아 씬 어때요? 작사하는 거?”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껌뻑이던 최정아가 나를 본다. 홍 작가가 ‘거기 대본이라도 쓰여 있어요?’라고 우스갯소릴 하자 얼른 입을 뗐다.
“저도 어려운 것 같아요. 아직 초보니까 더 그렇겠죠? 짧게 써야 하고, 맞춰 써야 하고. 그러면서도 뭘 말하는지 또렷해야 하고.”
홍 작가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맞아, 맞아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다.
“근데, 그래서 재밌어요.”
살짝 멈칫한다.
거기에 대고 최정아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전 성격이 소심해서 길게 말하는 걸 잘못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생기고,”
“그래요? 지금은 전혀 그런 거 못 느끼겠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거기서 자존감을 찾으니까. 그랬더니 많이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피디님한테.”
갑자기 나를 향한 감사에 멋쩍어져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씁쓸한 허브티가 달게 느껴진다.
다시 흐뭇하게 이야기를 듣던 홍 작가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나한텐 이골이 난 일인데, 정아 씨한텐 즐거움이라······.”
그리고는 물끄러미 자신의 원고 더미를 지켜본다.
이번엔 최정아가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은 어쩌다 처음 작사를 하게 되셨어요?”
“나? 가만 있어 보자. 언제였더라······.”
둘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흔한 주제를 가지고.
작곡가들도 만나면 다섯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저런 얘기를 해댄다.
어쩌다 작곡하게 되었느냐에서 시작해, 그 곡은 어떻게 만들었냐, 그때 쓰인 가상악긴 어디 소스냐 등의 흐름으로 넘어가곤 하지. 일의 연장선이란 것도 잊은 체.
그러다 보면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갑자기 아랫배가 간질거리며 작곡이 하고 싶어지고, 악기를 연주하고 싶고 그런다.
그걸 알기에 이런 대화가 반가웠다.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지. 때마침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최연석 감독.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
“네, 감독님.”
토마토나 상추, 같은 것들로 채워진 화단 사이에서 전화를 받았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장 대표 말대로 자리를 만들까 하는데.
최연석 감독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생각이 바뀌셨네요?”
-욕심나는 장소니까. 아까 정아와 단원들의 협주를 보고 있으니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명색이 예술감독이란 사람이 좋은 무대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소리 내어 낮게 웃자 최연석 감독이 물어왔다.
-어떤 곡을 준비할 생각이지?
“기억애로 해보려 합니다.”
-기억애······좋지. 편곡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번 주 내로 해서 보내겠습니다.”
-이번 주?
살짝 놀라는 목소리를 낸 최연석 감독이 덧붙였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자네 다른 앨범 작업도 있다면서?
“충분합니다.”
-쉬엄쉬엄해. 열정적인 것도 좋지만, 그러다 빨리 지쳐버려. 자네가 그럴 거란 건 아니지만, 자기 일에 그렇게 염증이 생겨서 떠나는 친구도 더러 봐왔어.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에 이게 내 첫 과도기라면.
저 안의 홍 작가처럼 변할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두 번째이기에 알 수 있다.
일에 관해서는 풀 악셀을 밟아대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치지 않을 거란 걸.
오히려 미래의 난, 이걸 못해서 완전히 지쳐버렸었으니까.
음악이 하고 싶어서 신물이 올라왔었으니까.
전화를 마무리 짓고서 다시 들어왔을 땐,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자리가 편해진 듯한 최정아가 날 보며 장난스레 말한다.
“작가님이 작사해주신대요.”
“어머, 내가 언제?”
“곡 들어보고 싶으시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건 그냥 어떤 곡인지 궁금하단 거지···.”
갈팡질팡하는 눈빛을 보며 얼른 끼어들었다.
“들려드릴까요?”
“네? 아니, 그럴 것까진······외부인한테 그렇게 막 들려주면 안 되잖아요? 내가 작업하는 것도 아닌데······.”
말꼬리가 흐트러진다.
최정아가 무슨 말을 해놨는진 몰라도 몹시, 매우, 무지 궁금한 눈치다.
내가 슬쩍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니까 여러 얘길 들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작가님이 쓰실 곡 아니니까 편하게 얘기해주시면 돼요.”
내 말에 홍 작가가 마지 못 해하는 듯 끄덕였고, 나는 최연석 감독과의 통화로 아직 따끈따끈한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렸다.
이윽고, 곡이 흘러나온다.
스피커조차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에서 나오는 붕 뜬 소리였지만 홍 작가의 표정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곧 고개를 끄덕일 것처럼.
“절절한 발라드네요?”
그러더니 묻는다. 유혹에 걸려 넘어진 표정으로.
“네. 근데 대상은 이성이 아녜요.”
“흥미로운데요? 그럼요?”
“꿈이요.”
“꿈···?”
“한울 형이 음악을 보는 시점을 떠올렸던 것 같네요. 곡을 쓰면서.”
“······다시 한번 들어봐도 돼요?”
홍 작가의 말에 내가 끄덕였다.
다시금 재생되는 노래.
그렇게 4분을 보낸 후, 그녀가 결국 물어왔다.
“한울 씨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과거도 좋고. 현재도 좋아요.”
지금까지 모든 작사의 시작이 저 물음에서부터였다는 걸 떠올리며 나는 웃었다.
말이 빠르다. 아까완 달리 눈에 생기가 돋는다. 딱,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잠깐의 도피를 마친.
머릿속에선 이미 작사를 시작한 듯 하다.
펜을 들었어. 잉크도 찍었고.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학준이 형이라면······.
“할 수 있는 얘기가 넘치죠.”
미래도 알려 줄 수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