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꼬이면 풀면 되고 (2)
-빨리 와봐야겠어. 일이 좀 꼬인 것 같군.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최연석 예술감독의 전화였다.
거의 다 도착했단 말을 하고 전화를 마쳤다.
20여 분 전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마천루가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가까워져 있다.
나는 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되새김질하던 가사에 대한 생각들을 잠시 미뤄뒀다.
아무래도 이쪽은 이쪽의 문제가 따로 있는 듯했다.
하하. 이젠 놀랍지도 않네.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하나씩은 꼭 덜거덕거리는 일이 생겨왔지.
처음엔 이 바닥의 문제라 생각했는데, 곰곰이 되짚어보니 일반적인 회사라고 해서 달랐나 싶더라.
송장 주문했더니 엉뚱한 거래처 이름이 찍혀있는가 하면, 기껏 홍콩까지 출장 가서 우리 회사 부스가 누락된 경우도 있었지.
아, 갑자기 부장이 바뀌어서 그동안 해왔던 체계를 한순간에 뜯어고쳐야 했던 적도 있었다. 자긴 이렇게 일 안 한다며 이것저것 바꿔대는데 죽을 맛이었지.
그땔 쭉 생각해보니 내 앞에 닥친 상황들이 조금이나마 유순하게 느껴진다. 내가 길들이거나 쫓아낼 수 있는 문제쯤으로 보이기 시작한 거다.
그런 생각으로 정신을 무장하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를 하고서, 올라온 약속장소.
거대한 마천루와 이어진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이었다.
텅 빈 로비 너머 테라스에 우뚝 솟은 마천루가 보인다. 그리고 그걸 구경하는 최연석 감독도.
“일찍 오셨네요.”
목이 꺾여라 위를 올려다보던 최연석 감독이 나를 반겼다.
“어려운 곡 좀 시켰더니 단원 중에 몇몇 녀석들이 활싱크를 해대서 성질내고 나와버렸네. 그나저나, 여기 진짜 높군.”
뱉은 말과는 전혀 다른 해맑은 미소로 고층 빌딩을 훑는다.
“무슨 문제가 있다면서요?”
“맞아. 우리 선임 피디가 뒤늦게 연락을 받고 나한테 먼저 연락을 줬더라고.”
“어떤 문젠가요?”
최연석 감독이 코트 자락을 툭툭 털며 말했다.
“여기 책임자가 새로 왔다더군.”
“그럼 혹시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요?”
“아마도? 아니지. 확실할 거네. 그 여자라면···.”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해서인지, 아님 진짜 데자뷰인지. 칼 같던 부장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나저나, 그 여자라면?
최연석 감독은 꼭 책임자를 아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의아해하며 물으려는 찰나, 한 여직원이 테라스 쪽으로 걸어왔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이내 날 보곤 친절하게 웃는다.
“아, 맞으시네요.”
여직원은 자신을 대관을 담당하는 정다운 팀장이라 소개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함 가득한 사과가 주된 내용이었다.
“연락이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더 빨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이미 출발하셨다고 하니, 차라리 만나서 자세히 설명해 드리는 게 낫겠다 싶어 오시라고 했습니다.”
“네,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네요.”
내 말에 그녀는 우리를 작은 사무실로 안내했다. 나란히 앉자, 정 팀장이 음료수를 꺼내와 마주 앉았다.
“우선 이것부터 말씀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저희 책임자님이 새로 오셨거든요. 근데 새로운 책임자님께서 이 공연에 대해 조금 회의적이세요.”
최연석 감독의 말대로였다.
회의적이란 말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론 여기서 콘서트를 열 수 없다는 얘기겠지.
아직 계약이 진행된 것도 아니기에 이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 책임자분께서 왜 회의적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오페라 홀에 적합하지 못한 공연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적합···.”
말끝을 흐리는데, 최연석 감독이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정확히는 오페라 홀에서 그런 수준 낮은 공연을 할 수 없단 얘기겠지요?”
그 말에 정 팀장은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도 변명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말을 못 찾는 것 같았다.
난처해 하는 정 팀장의 얼굴을 보며 나는 쏟아져나오려는 말들을 참았다. 어차피 이 사람에겐 결정권이 없잖아.
책임자를 만나보겠다고 할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일까?
그때, 최연석 감독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차피 그 여자가 책임자가 된 이상, 여기서 하는 건 힘들어졌어. 이만 가지, 장 대표.”
“감독님, 잠시만요.”
말로 최연석 감독을 붙잡으며 정 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페라 홀, 잠시 들어가서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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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정 팀장은 흔쾌히 그래도 된다며 문을 열어주었다.
거대한 공간. 우리는 천천히 객석으로 들어갔다.
비스듬한 길을 내려가며 최연석 감독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책임자?”
“네.”
짐작대로 그는 이곳의 책임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심지어 사석에서도 아는 사이였다.
“레오니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더군. 나보다 두 학번 높은 서울대 동문이었고. 유학은 독일로 갔다던 거 같은데, 흠. 다시 돌아와선 서울대 교수를 한단 소식을 들었었지. 근데 여기 책임자를 맡게 된 건 나도 오늘 아침에 알았네.”
서울대 교수이자, 오페라 홀의 책임자라···.
왠지 부장의 깐깐함은 깐깐한 축에도 못 들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 그분이 이 공연에 대해 회의적인 건······.”
“나랑 생각이 달라.”
최연석 감독이 말했다.
“클래식은 이름 그대로 클래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지금도 그런 것 같고. 그것 때문에 나랑 자주 부딪혔었어. 클래식의 대중화는 그녀에게 뭐랄까······이미 완성된 그림 위에 쉬운 해석을 위해 색을 덧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더군.”
“······.”
복잡한 글을 억지로 쉽게 번역하는 게, 항상 올바르진 않다. 뭐 이런 건가.
오페라 홀에서 연주할 수 있는 건 오케스트라뿐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성악가들뿐이다
-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구나.
어쩐지···.
콘서트 라이브 하나로 쉽게 풀린다 했지.
“틀린 말이라고 하기엔 그쪽도 설득력이 있네요.”
“그렇지. 그래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야.”
확실히 어려운 문제다.
톡 건들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러시아 인형처럼. 양쪽 말이 모두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하긴, 클래식은 애초에 어려운 세계였지.
‘그래서 매력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
난 대중음악이란 프레임 안에 서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조금 이기적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클래식의 대중화든 고착화든.
난 최정아를 위한 무대를 준비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렇게 무대 앞에 도착했다.
“말도 안 되네요.”
이걸 뭐라 해야 하지.
아치?
복잡한 형태의 곡선들이 무대 뒤편을 아우르고 있다. 최정아의 녹음 현장이었던 콘서트홀과 비교하면 두 배쯤 되는 것 같다. 천장 높이까지도.
자연스레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천 오백 석의 의자가 내려다보인다.
그동안의 대중음악 공연을 생각하면 한없이 작은 규모. 하지만 이 공간이 주는 느낌은 오히려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시선을 살짝 올렸다.
1층의 3분의 1 정도 되는 규모의 객석들 위로 무대와 유사한 곡선들이 천장까지 타고 올라간다.
잠시 최정아가 되어서 무대를 보았다.
내 뒤에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 앞엔 관객들이.
생각만 해도 압도적이다.
‘좋아했을 것 같네.’
그리고.
‘멋질 것 같네.’
여기서 공연을 했다면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최연석 감독이 옆으로 다가왔다.
“대단해요. 저 아치들이 룸 시스템의 일부인 건가요?”
“빈야드(Vineyard).”
“네?”
“이런 형태의 홀을 그렇게 불러.”
“아······.”
작게 빈야드라고 중얼거렸다.
“음악을 선명하게 만들지. 그러면서도 밸런스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천문학적인 금액의 모니터 스피커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웃음이 나온다.
“나도 이런 곳이 생긴단 얘길 듣고 놀랐었어. 문득 자네가 예전에 나에게 스치듯 여기 얘길 했었다는 거에 더욱 놀랐고.”
“하하. 저도 소문으로 들었던 거라···.”
푸스스 웃으며 무대부터 객석까지 다시 한번 훑었다.
최정아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상상을 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감독님. 국내에 여기보다 더 클래식에 적합한 홀이 있을까요? 하다못해 여길 따라갈 만한······.”
“없지.”
그 단호한 대답이 찐득하게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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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
그 단어가 발등에까지 똑똑 떨어진다고 느껴질 때쯤.
내가 도착한 곳은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곧바로 홍 작가의 작업실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7시 이후에 오라는 연락을 받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피디님?”
어쩌다 보니 깜짝 등장이 되었네. 최정아가 토끼 눈을 뜨며 다가왔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건 덤이었다.
“연습 중이라길래, 구경 왔어.”
어느새 헤실거리는 최정아.
나는 멋쩍게 웃으며 괜히 한 마디 덧붙였다.
“감시하러 온 건 아니고.”“해요. 감시해도 돼요.”
“나 그런 대표 아냐.”
“돼 보실 생각은···?”
“없고.”
“쳇.”
옆에서는 단원들이 최연석 감독에게 어땠냐며 질문들 던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대답은 나에게 말했던 것과 같았다. 결론적으로 다른 공연장을 알아봐야 한다는···.
최정아도 어느새 고갤 돌려 그쪽 얘길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돌아본다. 잔뜩 속상한 표정으로.
괜찮냐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
“피디님이 고르신 공연장이었잖아요.”
속상한 표정이 아니라, 걱정하는 표정이었나.
“괜찮아.”
“완전 실망한 표정인데.”
“내가?”
“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무대에 대해선 내가 누구보다 큰 기대를 했을지도.
“난 괜찮지.”
내 대답에 빤히 쳐다보는 최정아.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속이 훤히 내비치는 것 같아서. 그 잘하던 ‘척’이 얘 앞에선 잘 안 된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요새 특히 더.
그때, 최연석 감독이 연습한 걸 확인한다며 단원들을 불러모았다. 최정아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작은 간이의자에 앉아 구경하기로 했고.
이윽고, 최연석 감독의 신호에 따라 최정아의 곡들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선율과 선율이 뒤엉키고 풀어진다.
재즈의 텐션과도 같다.
치열하게 부딪히고,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그 위를 최정아의 목소리가 드리운다. 마치 구름처럼.
존재감이라고 하지.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악기보다 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짧은 한 곡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뛰쳐나온다. 나는 조목조목 짚기보단 생각들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
곡이 끝날 때까지.
마침내 최정아의 목소리와 악기들이 일제히 멈췄다. 딱 떨어지는 마무리였다. 이 뒤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미치겠네.’
내가 괜찮다고 했었나?
이런 공연을 최선이 아닌, 차선인 무대 위에 세우는 게?
널뛰던 생각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안 괜찮다. 그냥 안 괜찮은 게 아니라, 격렬하게 안 괜찮다.
누가 뭐래도 나에겐 최고의 공연이고, 그렇기에 최고의 무대에 올리고 싶다.
곡선의 향연이었던 웅장한 공연장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최정아도.
그저 대중음악이라서 안 된다?
말도 안 되지.
마침내 발등까지 내려온 욕심이 발바닥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