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꼬이면 풀면 되고 (1)
VMN 어워드가 끝나고, 학준이 형의 무대에 대한 관련 키워드가 실시간 검색어에 하나, 둘 올라갈 때쯤.
오랜 시간이 지나 저 지하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던 Daybreak 음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서서히 대중의 기류를 타고 올라오더니 급기야 차트인에 재진입해버렸다.
역주행이었다.
일주일쯤 지난 지금은 TOP10에 입성해 버렸다. 발매된 지 1년이나 지난 음원이, 그것도 상위권을 한 번 올랐던 적 있는 음원이 다시 차트 등반을 한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음에 벌어진 사건에 비하면 납득할 수준의 일이었다.
차트인을 한 건 학준이 형만이 아니었다.
레이블 뮤지션들의 대표적인 곡들이 하나, 둘 순위가 올라가더니, 모두 차트 안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형, 눈이 왜 그러세요?”
사무실 한켠에 만든 헬스장···이라긴 뭐한 공간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나온 서기영이 학준이 형에게 물었다.
실핏줄이 죄다 터진 눈으로 학준이 형이 씨익 웃는다. 대답은 내가 빨랐고,
“밤새 봤겠지.”
그러자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던 서기영의 눈빛이 이상한 쪽으로 흐른다.
“뭘······.”
“댓글, 댓글! 댓글 봤다고! 얌마, 말은 끝까지 해야지!”
학준이 형이 펄쩍 뛰는 모습에 웃으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 향 좋고-.
학준이 형이 옆에 와 앉는 서기영을 보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얘기 계속해봐.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라서 노랠 부른다고?”
“어.”
“거기서 우승하면 다음 편에도 계속 등장하는 거고? 막 번쩍번쩍한 의자에 앉아 도전자들을 거만하게 내려보며?”
비슷하네.
고개를 끄덕이니 학준이 형이 갸웃거린다. 옆에서 서기영도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듯 눈을 끔뻑거리긴 마찬가지.
이해가 간다. 가면을 쓰고, 도전자를 받는 챔피언과 그 자리를 오르기 위해 가면을 쓰고 경쟁을 벌이는 도전자들.
이렇게 들으니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콜로세움이 떠올라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잖아?
근데 이게 음악 예능이래.
이상하지.
실제 방송이 독특한 가면 쓰고 노래를 부르는 제법 아기자기한 컨셉을 갖게 될 거란 사실은 나만이 미래에서 보고 온 사실이었다.
“독특하긴 한데, 솔직히 상상도 잘 안 가고, 그게 될까 싶긴 하네···?”
자신의 걱정을 슬쩍 드러내던 학준이 형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네가 제안하는 거니까 해야지.”
“나 때문에 하는 거면, 억지로 안 해도 돼.”
“너 때문에 하는 것만은 또 아닌 게. 네가 지금까지 이렇게 추천한 예능 중에서 안 된 게 없었잖냐. 아, 이러면 너 때메 하는 게 맞나?”
자신의 말에 걸려 넘어진 듯한 표정을 짓는 학준이 형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냥 해. 이것도 잘 될 거 같으니까.”
“누가 보면 예언자라도 되는 줄 알겠네.”
시간 여행자고.
“그냥 느낌이 그래.”
학준이 형이 끄덕였다.
“오케이, 해볼게.”
제작진에게도, 출연자에게도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거다. 이제 촬영만 들어가면 되겠네.
옆에서 지금이 여름인 것처럼 땀을 식히던 서기영이 작게 감탄하며 나를 본다.
“피디님은 방송을 보는 눈도 탁월하시구나.”
“그럼. 내가 처음에 데뷔보다 먼저 예능을 출연했는데, 그게 누음소였어. 누가 음치 소리를 내었는가.”
“그거 초반에 사람들 엄청 봤잖아요?”
“그니까. 그다음엔 막 뛰어, 도 했었고, 나의 개인방송도 나갔었고.”
“아, 그건 저 봤어요. 채팅도 쳤었는데.”
“너였냐. 악플러.”
학준이 형이 범인을 검거하듯, 서기영의 팔을 잡았지만 서기영은 손쉽게 뿌리쳐냈다. 팔 굵기 차이가 거의 두 배가 나는데 뭘.
학준이 형이 치욕에 몸부림치며 ‘운동한다, 나’라고 중얼거리는 동안, 서기영은 어쩐지 선망 어린 눈으로 날 보고 있다.
양심이 좀 쿡쿡 쑤신다.
방송을 내가 뭘 알겠어. 나도 그냥 과자 까먹으면서 드러누워 본 건 매한가지인데 말이지. 그저 시간 여행자로서 미리 겪었을 뿐이고.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학준이 형에게 넌지시 말했다.
“윤 피디님은 방송 초반엔 경쟁자들을 좀 약하게 구성해서 형을 띄워줄 생각도 있었더라고. 한 5주쯤.”
“핫, 날 뭘로 보고. 내가 요즘 갑자기 득음을 한 건지, 고음이 아주 시원하게 나온다고.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그래서 괜찮다고 했어.”
형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걸 굳이 거절했어?”
“방금 그런 거 없어도 된다며.”
“되, 되지. 되긴 한데, 그래도 굳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대체 얜 뭐 하는 놈인가 하는 눈빛을 쏘아대는 형에게 웃으며 설명했다.
“너무 밀어주는 거 티 나면 비호감 되기 한순간이야.”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예능을 밥 먹듯이 해온 학준이 형이기에 금세 ‘그건 맞지’라면서 끄덕였다.
나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곡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서.
오후에 최정아 단콘 장소로 협의 중인 잠실타워에 들러야 했기에 시간이 타이트하다.
“아참.”
찰랑거리는 커피잔을 들고 돌아서려다 멈췄다.
당부의 말씀이 남아있었네.
“부담 주려는 건 아닌데, 3주 정도는 꼭 버텨줘야 해. 지희씨가 그때쯤을 컴백 날짜를 조율하는 것 같더라고.”
내 말을 들은 형의 얼굴에 부담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
학준이 형은 곡부터 정하겠다며 부랴부랴 연습실로 직행했다.
한 살 위 형이지만, 이럴 땐 막 동생 같고 그러네.
서기영은 내 방법이 꽤나 인상 깊었는지 이런 것도 배워야 한다며 메모장이라도 꺼낼 기세다. 오나연이 졸졸 따라다니며 실제로 그러는 편인데, 그걸 닮아가나······.
함께 2층으로 내려와 각자의 작업실로 찢어졌다.
마시던 커피를 책상 위에 무심하게 올려놓고,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생각으로 빨려들어 간다.
멜로디······.
학준이 형의 멜로디가 변했지.
그것도 이전과는 꽤 다른 느낌으로.
이전의 멜로디가 학준이 형의 음역대를 무난하게 반영했다면 이번엔 키를 한계점까지 높인 느낌이다.
심지어 하이는 3옥타브 G.
‘이제 이 음역대도 소화가 가능하단 거겠지.’
정말 무슨 게임 퀘스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노래를 부를수록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건 경험치 같은 느낌이고.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
갑자기 왜 변했을까?
상황은 최정아가 처음 변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땐 녹음 부스에서 노래를 부른 후였고, 이번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른 직후였다는 차이 정도?
그리고 음악이 재조율되듯 상행 하행을 반복하며 두 번째 멜로디가 만들어졌다.
뭘까. 우연히 경험치 1을 남겨둔 상황에 멜로디를 불러서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조건이 달성되어서?
2년 동안 멜로디에 대해 알게 된 건 크게 없었다. 여전히 미궁 속에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이래서 한동안 멜로디의 원인에 대해 신경을 끄다 시피했었는데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서 여러 가정을 유추해봐도 결국, 뭐가 맞는지 알 방법이 없더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털어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멜로디 라인 자체에 집중했다.
어디까지 했더라······그래, 3옥타브 G.
남자들의 평균 하이가 2옥 G 정도이고, 고음으로 유명한 이들이 3옥 E까진 곡에 반영하는 걸 감안했을 때, 상당히 높은 음이다.
새삼 학준이 형의 음역대가 엄청났다는 걸 느낀다. 특유의 먹먹함을 고치지 못해 대학교 시절부터 가창에 제대로 활용해본 적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제약도 풀렸겠다, 제대로 하이를 찍는 곡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역시, 장르는······.
‘발라드가 좋겠지.’
키도, 중심음들의 라인도, 템포도 모두 발라드에 찰떡이었다.
마침, VMN을 위해 편곡했던 Daybreak의 장르도 발라드였겠다, 무슨 이렇게 될 거니까 예행연습을 시켜준 것 같다.
‘신기하네.’
가장 하이는 E로 잡고.
그걸 넘어가지 않는 선에서 멜로디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편곡이나, 믹싱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그때 적어두었다.
이를테면 현악기에 대한 아이디어.
흔히 긴장감을 높일 때 자주 사용하는 스피카토(Spiccato) 주법을 클라이맥스 직전에 배치해야겠다거나. 음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이을 수 있는 현악기의 특성을 이용해 2옥 F부터 3옥 F까지 매끄럽게 상행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따로 표기해 두었다.
멜로디가 완성되어 갈수록.
아이디어도 쌓여간다.
자연히 효율도 높아지겠지.
‘꽤···발전했네, 나.’
문득 윤태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결코 간단하지 않다고 했지.
나에겐 이미 적응이 되어버린 이 방식을 두고서.
확실히 발전하고 있었다.
약간의 자유도를 제한하는 대신, 다른 탈출구를 찾게 만드는 멜로디.
마치, 이런 방법도 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쉬운 길을 돌아가, 시행착오를 쌓으며 경험을 쌓는 거지.
그렇게 시야가 넓어지고 있달까.
하하···.
이쯤 되면 내가 멜로디를 발전시키는 건지.
내가 발전 당하는 건지 모르겠네.
#
얼마나 지났을까.
정말 오랜만에, 오랫동안 몰입했다.
시선은 모니터에 두고, 손은 키보드와 건반을 끊임없이 왕복했다.
동시에 입은 내가 만든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마치 스캣 비스름하게.
이걸 자유자재로, 그것도 멋들어지게 하는 은유란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질 즈음, 건반으로 멜로디를 모두 찍어 완성했다. 스캣은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서···.
작업실을 나와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마침 전화를 끊는 김지희가 보였다.
“지희 씨.”
“아, 피디님. 그렇지 않아도 여쭤볼 게 있었는데.”
“먼저 얘기하세요.”
“오늘 잠실에 공연장 보러 가시죠?”
“네. 4시쯤에요. 왜요?”
“거기서 단콘 티저 영상도 촬영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지 궁금해서요. 영상 감독님도 이왕이면 같은 곳에서 촬영해 기대감을 높이는 쪽으로 컨셉을 잡고 싶다고 하시네요?”
나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보통 계약 때 기본 옵션으로 들어가기는 하는데······.”
솔직히 여긴 잘 모르겠네.
대중가수의 콘서트가 오케이 난 것만 해도 미래의 기억까지 끌어와도 이례적이라.
워낙 깐깐하거든.
“한 번 물어볼게요. 안 되면 추가해서라도 찍는 게 좋죠.”
“넵, 알겠습니다. 피디님은요?”
“아, 학준이 형 곡. 가사 작업도 슬슬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벌써 멜로디가 나오셨어요?”
오! 하는 표정인 김지희에게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아, 네. 뭐.”
갑자기 김지희가 뭔가 떠올랐는지 표정이 변했다. 오! 에서 아! 로.
“근데······이번에도 홍 작가님께 맡기실 거죠?”
홍 작가는 이현의 봄이 올까요, 부터 TKM의 소개로 인연을 이어오던 작사가였다.
당시, 수십 명의 작사가에게 여러 차례 가사를 받다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가사의 주인공이었지.
수려한 문장보다도 곡이 가진 음률을 살려내는, 동시에 뮤지션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관점도 고스란히 녹여내는 작사가.
가사를 스스로 쓰는 최정아와 레드리시. 그리고 이미 가사가 완성되어 있었던 학준이 형을 제외하곤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왔다.
곡이 모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그녀의 가사도 큰 비중을 차지했으리라.
그래서 애초에 작사에 대해선 고민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네, 그런데요?”
“민주 대리님 얘기론, 작가님 요즘 작사 일 안 하신다고 전해 들었거든요.”
“네···?”
당혹감 섞인 내 물음에 김지희가 덧붙였다.
“요샌 글 쓰신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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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죠. 네. 아, 그러시구나. 알겠습니다. 일단, 대표님껜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넵, 알겠습니다~.”
김지희가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자마자 날 돌아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안 되겠어요. 당분간 작사 일은 안 하실 생각이래요. 대표님께도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낭패네. 갑자기 다른 작사가를 구해야 한다고?
시간이야 넉넉하다. 많고 많은 게 작사가고.
문제는 마음에 드는 작사가를 구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건데······.
“어떻게, 민주 대리님께 연락해서 리스트 좀 받을까요?”
시간을 확인했다.
2시 반. 잠실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네, 일단 받아줘요.”
그리고 사무실을 나가며 덧붙였다.
“그리고, 작가님께 다시 전화해서 약속도 잡아줘요. 미팅 끝나고 오는 길에 작업실 들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