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VMN 어워드 (1)
“미치겠네.”
VMN 어워드를 총괄하는 감 피디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 그가 아더 레이블 장 대표의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그의 반응에 잠자코 담배를 축내던 B팀 감독이 슬그머니 물었다.
“왜? 뭐라는데?”
그도 박한철 국장의 라인을 꽉 잡고 있긴 마찬가지인지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놓지 않으려 그렇게 애를 썼는데, 줄이 뚝 끊어지면 다 무슨 소용인가.
“안 오겠대? 보이콧 해보겠대?”
다시 한번 재촉하자 감 피디가 꽁초만 남은 담배를 버리며 답했다.
“참석하겠대.”
“그럼 그렇지. 여기서까지 튕기면 우리랑 완전 척을 지겠다는 건데. 그건 그쪽도 확실히 부담······.”
“근데, 조건을 걸었어.”
B팀 감독의 눈썹이 역팔자로 꺾였다.
“조건? 지금 레이블 식구를 전부 다 부른 것도 얼마나 굽실거린 건데 뭔 놈의 조건! 무슨 상이라도 내놓으래?”
감 피디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주냐. 투표로 하는 건데. 그거 말고 다른 거.”
“다른 거 뭐?”
“시간.”
“시간?”
힌트가 부족했는지 B팀 감독은 갸웃거린다. 감 피디는 새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끄덕였고.
“지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뮤지션을 넣어달래.”
“장 대표 미친 거 아니야? 방송국을 상대로 갑질을 하려고 하네?”
어처구니없어하며 목소리 볼륨을 높이던 B팀 감독에게 감 피디가 힘없이 말했다.
“솔직히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 자격이 되는 연예인들까지 라인업에서 빼버리려고 했는데.”
“뭐냐 이 변절자 빌드업은?”
“변절자가 아니라 팩트지, 임마.”
씁쓸하게 말하는 감 피디에게 B팀 감독이 묻는다.
“그래서, 해달란 대로 다 해주겠다고?”
이에 감 피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초연하게 답했다.
“그러라잖아.”
“누가?”
“누구겠냐. 우리가 잡은 줄이지.”
“에라이······.”
B팀 감독이 혹시나 누가 있을까 주변을 훑으며 한탄했다.
“엘리베이터나 사다리까진 못 돼도 밧줄은 되는 줄 알았더니. 개뿔. 사장 말에 벌벌 떠는 노끈을 잡았네. 우리가.”
#며칠 후, VMN으로부터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든 타임테이블을 최대한 반영해주겠다는 답변. 모든 걸 들어주겠단 입장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무리한 요구였단 걸 알았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리고 어워드까지 일주일.
VMN의 홈페이지엔 노미네이션 페이지가 따로 만들어졌다. 수상자를 대중이 직접 뽑는, 투표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최정아와 박경호, 그리고 서기영이 이름이 올라갔다.
이제야 VMN 피디들이 자신들이 속한 방송국과 TKM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제대로 일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원하는 바를 얻어내고.
나는 다시 바빠졌다.
지금까진 VMN에게 원했던 것을 얻어냈다면,
이번엔 어워드에서 더 큰 걸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이거······.”
노래가 흘러나오자마자 윤태영이 입을 열었다. 역시 윤태영이네. 꽤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단번에 눈치를 챈 것 같다.
“한울 씨 곡이네요.”
빙고.
“또 다른 버전이고요?”
투 빙고.
연달아 끄덕이자 윤태영이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명백히 한울의 곡이었다. 하지만 언뜻 들으면 전혀 다른 곡이라 착각할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번 VMN 어워드 용으로 만드신 건가요?”
“네. 어떤 거 같아요?”
“잠시만요.”
윤태영이 노래에 집중한다.
한없이 신중해지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피아노와 스트링이 이끄는 1절을 지나, 리듬 악기가 들어오는 2절로 넘어가자 윤태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좋은데요?”
윤태영이 날 돌아보았다. 그리곤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물어온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뭘요?”
“이 편곡이요. 어떻게 하면 펑키했던 곡이 이렇게 발라드로 탈피할 수 있는지 상상이 안 가서요.”
윤태영의 물음에 나는 고민했다.
뭐라고 할지. 중심음들로 이루어진 멜로디가 그냥 막 들린다는···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순 없으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꽤 간단해요. 중심음들만 남겨서 필요 없는 음들을 쳐내는 방식이라.”
“···중심음이요?”
학준이 형에게 들리는 멜로디만 건반으로 눌렀다. 그러자 윤태영의 표정이 날카로워진다.
“노래에 모두 포함된 음들이네요? 그것도 기둥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역시나 이번에도 빠르게 알아채네.
“맞아요. 이렇게 해놓으면 좀 더 다양한 바레이션이 가능해져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나는 즉석에서 음과 음 사이에 다른 음들을 넣어 라인을 발전시켜 보였다.
원곡과 다르되, 완전히 멀어지진 않도록.
익숙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편곡을 위해선 그 아슬아슬한 거리감이 중요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발전시키다가 이 정도면 되었겠다 싶어 건반에서 손을 뗐다.
“사실 편곡이라기보단 거의 리메이크에 가깝죠.”
역시나, 빠르게 이해한 윤태영이 끄덕였다.
꽤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간단한 편곡이라 실망한 건가?
왜 저런 표정인지 몰라 갸웃거리는데, 윤태영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요. 근데 한가진 동의 못 하겠어요.”
“뭘요?”
“간단하다는 거요.”
윤태영은 여전히 몹시 허탈한 표정이었다.
“피디님이 지금 하신 거. 전혀 안 간단해요.”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편곡을 완성 시켜 학준이 형과 세션 팀에게 넘기고. 다른 뮤지션들의 무대도 다시 점검하고. 그 와중에 최정아의 단독 콘서트에 대한 생각들도 내 머릿속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몸보다 머리가 피곤한 시간들의 연속이었지.
인터뷰도 꾸준히 해야 했지.
심지어 VMN 어워드 당일인 오늘까지도 말이다.
기자들은 오늘 인터뷰한 따끈따끈한 기사를 어워드에 맞춰 올리고 싶어 했고. 그건 내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맞는 일이었기에.
그 고된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시간 맞춰 근처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잠시 기다리자 도로를 꽉 막을 듯 커다란 밴이 나타나 멈춰선다.
“흐아, 안녕.”
앓는 소리를 내며 밴에 올라탔다.
날 빤히 보는 최정아를 향해 손을 휘적거리며.
“······.”
“왜?”
“···잘 어울려서요.”
나를 훑는 최정아의 시선에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내 상태에 대해.
정장과 턱시도, 그 사이 어디쯤에 걸쳐있는 것 같은 옷.
불편함에 비례하여 옷맵시가 나는, 살면서 입을 일이 없었던 명품 슈트를 입고 있다.
얼굴은 또 어떤가.
아침부터 김지희에게 끌려가 메이크업하고, 머리까지 샥 올려 스프레이를 뿌려놨다.
“좀······어색하지 않아? 연예인도 아닌 놈이 이런 옷 입은 게?”
“아뇨? 엄청 잘 어울리는데요?”
실실 웃는 거 보니, 아닌 거 같은데···?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싹 정리했네?”
TKM 콘서트 때와는 밴의 상태가 달랐다. 지난번엔 그렇게 치워도 겨우 빈자리가 하나 나던 밴이 지금은 휑하다.
“네, 그날 집 가서 전부 치웠어요.”
“너무 어질러져 있어서 창피했어?”
푸스스 웃으며 물어보자 최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창피란 모르는 사람처럼 단호하게.
“아뇨. 전혀요.”
“근데 왜 치웠어?”
“그런 게 있어요.”
“···?”
자리 하나 정도는 더 나올 수도 있었는데···,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최정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물었다.
“긴장은 안 되고?”
“전혀..아니, 돼요. 되네요. 그거, 급성 긴장······.”
“역시 연기는 안 되겠다. 노래 열심히 하자.”
곽 감독이 만날 때마다 최정아 배우 시킬 생각 없냐는데. 이건 내 생각의 문제가 아니지 싶네.
“피···.”
입을 삐죽거리는 최정아를 보며 웃었다.
그때 운전대를 잡은 최정아의 매니저가 작게 감탄했다.
“사람 엄청 많네요···.”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저 멀리, 수많은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
이거 아무래도, 급성 긴장이란 게 진짜 있나 보다.
#-TKM 소속 연예인들 포토존에 섰습니다!
-아더 레이블 연예인들 뒤쪽에서 대기 중입니다! 신호 주시면 바로 밴들 출발시키겠습니다!
-포토존 비었습니다! 차례대로 출발시키세요!
무전을 받은 스태프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신호에 맞춰서 앞차부터 한 대씩 출발하겠습니다. 이 차가 가장 마지막에 출발하실 거고요. 레드카펫 앞에 도착하셔서 정장 입은 스태프가 문을 열면 기로 프로듀서님 먼저 내리시고, 최정아님이 자연스럽게 팔장 정도 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계단 오르시면 먼저 도착한 아더 레이블 분들이 포토존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고, 거기에 합류해서 기자들 요청에 따라 5분 정도 사진 찍고 들어가실 게요.”
래퍼 뺨치는 속도로 빠르게 설명을 마친 스태프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차 문이 닫혔다.
출발할 준비를 마친 앞차의 브레이크등이 들어온다. 이윽고 우리가 탄 밴도 움직였다.
레드카펫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급격히 붐빈다. 앞차에서 누군가 내릴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이제 곧 우리 차롄가 봐.”
내 말에 최정아가 날 돌아본다.
“아직도 긴장되세요?”
“조금?”
-이라고 답했는데.
아닌 것 같다.
조금은 개뿔.
오히려 아까보다 더 심장이 벌렁거린다.
창밖에 가까워지는 레드카펫을 보니 더더욱.
-이제 내리실게요!
신호가 떨어지며 정장을 입은 스태프가 달려와 문을 열어주었고, 내가 먼저 내려서 최정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사뿐히 내려오는 최정아.
펜스 너머에서 ‘누나, 예뻐요!’ ‘언니, 나 죽어!’ 같은 목소리들이 쉴 새 없이 들려온다.
그리고 드문드문.
“기로 프로듀서님 곡 잘 듣고 있어요!”
저런 착한 분도 있···.
“한 번 더! 외쳐주세요!”
···어림도 없지.
최정아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러자 이번엔 최정아의 손이 팔짱 안으로 들어온다.
좀···멋쩍네.
“출발해?”
“네···.”
그대로 보폭을 맞춰 걸었다.
셔터들이 터지며 순간순간 시야를 잡아먹었지만, 다행히 계단을 오르면 서부턴 정면으로 오는 빛은 없었다.
올라서자 아래보다 더 많은 기자들이 보인다. 동시에 포토존 앞에서 우리 쪽을 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도.
탁, 하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너무 뻣뻣하게 걸어오는 거 아냐?”
익숙한 얼굴들 곁으로 다가가자 학준이 형이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자세를 고쳤지만 그럴수록 더욱 뻣뻣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셔터는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심지어 나와 최정아가 센터. 내일은 아무래도 인터넷 들어갈 생각은 하면 안 되겠다.
“다양한 포즈 좀 부탁드릴게요!”
기자들 중 누군가의 외침에 다양한 포즈란 무언인가 고찰하는 찰나.
우리가 지나온 아래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뭐지?
손가락에 모터를 단 듯, 셔터만 주구장창 눌러대던 기자들도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남았나?”
“아닌데? 아더 레이블 다 왔는데?”
“스태프가 실수로 다음 차 출발시켰나 보······.”
수군거리던 목소리가 멎었다.
계단 위로 올라오는 얼굴을 확인하고는.
덩달아 내 시선도 멈췄다.
허어···.
레드카펫을 뚫을 것 같은 킬힐을 신고,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뽐내며 걸어오는 하서윤.
그녀가 당당히 중앙으로 걸어와 내 앞에 멈춰섰다.
“뭐예요? TKM은 우리 앞 순서였는데?”
내 물음에 그녀가 톡 쏘듯 답했다.
“뭐긴요. 지각이죠.”
그러더니 눈매가 사람을 홀릴 듯이 휘어졌다.
“이렇게 된 거. 잠시만 아더 레이블 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