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21화 (121/221)

121. 불청객에서 귀빈으로

내가 내건 계약 조건은 간단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아더 레이블을 키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말이다.

이에 유재완 대표는 그 반대의 상황을 궁금해했다.

‘만약 누군가 아더 레이블에 간섭한다면?’

여기서부터가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랬더니? 대표님이 뭐라시는 데?”

한창 치킨 발골에 집중하던 학준이 형이 내 얘길 듣자마자 턱을 멈췄다.

기름진 손가락이 닿지 않도록 콜라를 따라 벌컥벌컥 마시더니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나도 콜라 한 모금 들이키고서 말했다.

“뭐,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 하시더라고.”

그대로 입을 벌리는 학준이 형.

“와···내가 이 바닥 생리를 잘 모르는 거냐, 아니면 너만 예외인 거냐. 맘에 안 들면 나가겠다? 무슨 그런 계약 조건이 다 있어.”

맘에 안 들면 나가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아닌가? 그게 그건가?

“톱스타들 중에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 조건을 거는 경우도 많잖아. 제인도 음악성을 터치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는 거 같았는데.”

“결국, 그 정도 급이 돼야 가능한 조건이란 거 아냐. 넌 연예인도 아닌데 그게 된 거고.”

“···그게 그렇게 되나.”

학준이 형이 갑자기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손에 든 닭 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새삼스럽다. 네 작업실 앞 치킨집에서 만든 곡 듣고 이런 저런 얘기 나눴던 게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술자리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넌 진짜 어엿한 대표가 됐네.”

내가 웃었다.

눈을 감아도 소속 뮤지션들이 툭툭 튀어나올 만큼, 그래서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게 비일비재할 만큼 이 일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다 생전 보지 않던 댓글을 정독하며 실실 웃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리고 다짐하지. 다음엔 더 잘해보겠다고.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형은 서울에 이렇게 넓은 집을 샀고.”

“흐흐.”

많은 게 변했네.

나도, 형도.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지금도 은은하게 들려오는 멜로디.

과거로 돌아와 가장 처음 들었던 형의 멜로디는 여전하다.

‘왜일까?’

최정아가 두 번이나 바뀐 멜로디가 들려오는 동안, 학준이 형은 한 음도 바뀌지 않았지.

형의 성장이 멈춘 걸까?

최정아와는 재능의 크기가 달랐던 걸까?

애초에 여기까지가 한계인 걸까?

물론 현재의 학준이 형은 예능인에 더 가까워져 있다. 재능의 크기가 그쪽이 더 커 보일 정도로 잘하기도 했고. 혹시, 그래서인가?

‘모르지. 그냥 단순히 때가 안 된 걸지도······.’

하지만 나는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상관없으니까.’

이제는, 멜로디가 없다고 멈칫거릴 정도는 아니다. 다음 멜로디가 들리지 않는다면, 들릴 때까지 내가 빈 공백을 메워줄 수 있으니까.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다음 작업 해야지.”

“야, 콘서트 준비한다고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좀 쉬지?”

“맞아 고생했지. 그래서 쉬려는 거잖아.”

“곡 작업이 쉬는 거다? ······말을 말자.”

고개를 내젓던 학준이 형이 은근히 물어왔다.

“그래서 다음 타자는 누군데? 정아?”

“정아는 단독 콘서트 준비해야 해.”

“크으, 단콘이라니 멋지구만······그럼 경호 씨?”

“곽 감독 새 드라마 들어가고.”

“그럼? 기영이······는 아닐 거고.”

“다른 뮤지션들 프로듀싱하느라 바쁘지.”

눈을 깜빡이던 학준이 형이 치킨 무를 아득 씹은 채로 멈췄다.

“설마, 나야?”

끔뻑거리는 눈을 보며 내가 웃었다.

“왜 또 싫다 하게?”

형의 멜로디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작아지지도.

뚝뚝 끊기지도 않는다.

멜로디가. 대답이.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다.

#눈이 온다더니···

비였네.

“으, 축축해. 어 피디님 좋은 아침입니다···.”

별로 안 좋은데?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는 색색의 젖은 우산들이 깔려있었다. 무슨 미술작품 마냥.

“어머, 예쁘네!”

여직원이 자신의 투명 우산을 작품 중앙에 밀어 넣으며 만족스러워한다.

나보다도 일찍 출근한 김지희는 작품을 간신히 피해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주재윤은 자리에서 ‘저도요!’라고 했다가 눈총을 받았다. 사실 나도 부탁하려 했는데, 잘 참았지.

그렇게 직원들이 모두 도착했을 때쯤.

내가 잔뜩 쌓인 프린트물을 추스르며 말했다.

“자, 이제 회의하죠.”

“말씀하신 잠실타워 오페라 룸은 가능할 것 같아요. 라이브로 TKM 콘서트를 봤는지 아주 흔쾌히 좋다고 하더라고요.”

김지희가 기분 좋게 말했다.

과거 최정아의 오케스트라 곡을 녹음할 당시, 완공이 되지 않아 포기했던 곳.

오페라 룸이란 이름답게 대중음악은 안 껴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실제로 여러 뮤지션들이 줄줄이 까였다는 얘길 들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통과.

확실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란 점과 라이브를 통해 보여진 무대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다음 주쯤, 최 감독님이랑 다녀와 볼게요.”

그리고 수첩에 적힌 내용을 보고 말을 이었다.

“아, 곽 감독님께 연락이 왔는데 경호 씨 배역이 좀 바뀌었나 봐요.”

“어? 또요?”

주재윤이 갸웃거리며 덧붙인다.

“설마 해외에서 터진 거 때문에···.”

“네. 그래서 분량을 더 늘리는 쪽으로 한다더라고요.”

이에 직원들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나만큼이나 모두 이 일에 몰입해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좋네···.

“아주 날개를 달고 날아가네요, 경호 씨.”

“콘서트 덕에 경호 씨뿐만 아니라 레이블 뮤지션 전부가 호재예요. 출연 요청도 걸러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오고, 인터넷상에서 반응도 대부분 좋고요.”

“으아, 이대로 계속 순탄하게 흘렀으면 좋겠네요. 폭죽이나 터트리면서.”

“그러게요. 괜히 VMN처럼 이상한 놈들이 딴지 좀 안 걸었으면.”

마지막 말을 한 직원이 갑자기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벽 쪽을 가리켰다.

“저거 아예 지워버릴까요?”

칸칸이 나뉘어 있는 스케줄 보드에 표시된 VMN 어워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건 일단 그대로 둬 보죠.”

의아한 표정으로 보는 직원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뒤늦게 와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르니까.”

#“···이제 어쩔 거지?”

적갈색 책상 위에서 펜대를 굴리다 무심하게 툭 묻는 중년 남자. 희끗희끗한 정수리가 뒤로 넘어가며 주름 가득한 얼굴이 올라왔다.

시선 끝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VMN 예능국, 박한철 국장을 향해있었다.

“내가 자네 믿고 가만히 있었는데, 오늘 제대로 확인해보니 일을 참 크게 벌렸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어워드 말이야. TKM에서 고작 세 명 불렀다며. 우리가 싸웠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셈인가?”

“그건······.”

박한철 국장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뻔히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저런 소릴 해대는 걸까.

“사장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오해? 내가 볼 땐 자네가 뭔가 단단히 오핼 한 것 같구만?”

“네···?”

“내가 자네를 두고 본건 자넬 믿어서지, 마음대로 일을 망쳐도 좋아서가 아닐세.”

“아직 아무것도 망친 거 없습니다?”

박한철 국장이 억울한 소리를 내었지만 VMN 사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두터운 얼굴로 자신이 하고픈 말만 할 뿐.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TKM 콘서트 얘기가 올라오고 있어. 기사는 호평 일색이고. 대중은 아쉬워하면서도 VMN 어워드가 있으니 기다려보자는 눈치고. 거기다 해외 시청자들 반응은 또 어떻고? 그날 몇 명이 봤는지는 알고 있나?”

“그래 봐야 고작 100만이었습니다.”

“국장이란 사람이 ‘고작 100만’이라니. 그게 돈으로 환산하면 얼만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입술을 물며 말을 삼키는 박한철 국장.

빤히 바라보던 사장이 불쑥 물었다.

“자네, 혹시 뒷돈 받나?”

“사장님! 대체 무슨 말씀을···!”

펄쩍 뛰는 박한철 국장을 보는 사장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양 피디가 새로 들어가는 예능에 아더 레이블 한울 대신 다른 친구로 갈아 끼우게 만든 것도 자네잖아?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들어간 게 JME 신인이고.”

“그, 그건 그 친구가 싹수가 보이길래···!”

믿을 마음이 없는지 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사장님!”

일이 단단히 꼬여버렸다는 생각에 박한철 국장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게 깨달았다.

이건 보험이었으니까. 혹여라도 VMN 어워드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냈을 때. 그때 임원들의 질타를 피할 보험,

“알아서 잘 할 줄 알았는데, 일을 이렇게 키우나. 쯧. 일단 어워드부터 제대로 끝내.”

사장이 딱 잘라 말했다.

“갑질의 갑 소리도 안 나오게.”

#사장과의 면담을 마친 박한철 국장이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예능국으로 들어왔다.

그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이번 VMN 어워드를 맡은 피디에게서 시선을 멈춘 그가 손짓했다.

“너 얼른 들어와 봐.”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쭈뼛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피디.

문을 닫자마자 성질 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 뭐 같이 됐다.”

“···네?”

박한철 국장이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핏대를 세워가면서.

사장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피디는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사장님도 아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당연히 알지! 지가 왜 몰라. 알아놓고 저러는 거야. 다 알아놓고!”

길길이 날뛰는 박한철 국장을 보며 피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건 박한철 국장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문제였기에.

평소 국장 라인이라 불릴 정도로 옆에 붙어 굽실거리지 않았나.

VMN 어워드가 만약에라도 기대 이하의 성과가 나온다면? 그 모든 탓이 국장에게로 쏠릴 분위기다. 그러면 어워드를 총괄한 자신에게도 자연스레 그 불길이 번지겠지.

아찔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럼 어떡합니까?”

박한철 국장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일단 불러야지! TKM이든 아더 레이블이든.”

“부른다고 올까요? 우리가 그렇게······.”

뒷말을 삼킨 피디에게 박한철 국장이 말했다.

“일단은 어떻게든 오게 만들어야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서라도!”

#“네, 알겠습니다. 우선 대표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툭.

전화를 끊은 여직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뭐래요? 아, 아녜요. 안 좋아할 거야. 갑질이나 하는 방송국 놈들.”

김지희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다른 직원이 묻는다.

“경호 씨, 와달라죠?”

여직원이 말없이 끄덕였다.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한 직원이 통쾌하게 웃었다.

“역시! 중국에서 터지니까 아주 눈 돌아선. 그리고요? 또 누구 와달래요?”

여직원이 씩 웃었다.

“모두요.”

“네?”

“아더 레이블 뮤지션 모두, 제발, 꼭 다 와달라는데요?”

질문한 직원의 표정이 숨기기 힘들 정도로 밝아졌다. 그러다 확 정색하며.

“흠흠, 웃기시네. 뭐, 그래도···보내는 게 좋긴 하겠죠?”

모두가 피식거린다. 짧은 웃음이 시원시원하다. 속이 뻥뚫린 얼굴들이었다.

“보내면 좋기야 하죠. 물론 그쪽이 하도 원하니까 우리가 가주는 거겠지만.”

새초롬하게 말하던 김지희가 내 쪽을 보았다.

어떡할 거냐는 표정으로.

글쎄.

원하던 대로 VMN이 간절해졌다.

어지간한 요구는 모두 들어주겠지. 가령, 무대를 우리가 원하는 시간대에 넣어달라, 같은 것들 말이다.

끝까지 안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선 아예 방송사 하나랑 척을 지자는 거니까 좀 그렇고.

저쪽에서 굽히고 들어왔으니 우리도 너무 핏대 세울 필요도 없는 데다가 VMN 어워드에 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긴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잠시 직원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불청객들이 귀빈이 되어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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