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고래 싸움에 새우는 (1)
“이번에 기로 프로듀서, 재즈곡 낸다고 말 많더라.”
친구의 말에 메고 온 기타를 테이블에 기대놓은 남자가 끄덕였다.
“맞아, 그렇더라? 엄청 의외였어. 빌보드 찍고 갑자기 재즈라니.”
“너무 오바한 것 같지? 뭐 성공하고 변했다는 얘기 듣고 발끈해서 그런 결정한 것 같긴 한데. 그냥 무명이어도 되었을 걸, 굳이 비주류 장르까지 건들 필요는 없었을 거 같은데.”
“그치. 그리고 뜨고 변했다는 얘긴 이 바닥 클리셰잖냐. 그냥 좋게 받아들여도 될 일인데 굳이.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 재즈곡.”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가 콧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
“재즈라고 해놓고 대중음악 내놓겠지. 빌 앨런 때도 포크인지 팝인지 알 수 없는 걸 내놨던 것처럼.”
“맞아 그럴 거란 얘기도 꽤 나오더라.”
“그래도 아예 재즈 밴드를 통째로 영입해서 녹음 한다던데?”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평소 거의 재즈만 즐겨듣는 그녀였기에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내가 서재페 (-서울재즈페스티벌)를 몇 년 동안 놀러 다녔는데. 거기서 한 번을 못 본 애들이야.”
여자는 슬쩍 나가는 옆 테이블 사람들의 얼굴은 보지 못 한 채 더욱 조소했다.
“재즈가 누구 집 애 이름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고.”
*옆 테이블의 재즈 부심을 피해 밖으로 나온 두 여자.
캡모자를 쓴 은유란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큰 여자가 목소릴 높였다.
“시, 신경 쓰지 마! 비주류 장르 듣는 자부심에 사는 애들이야. 뭔가 난 남들과 다르다고 깨어있는 척하는 부류들!”
이에 반해 은유란은 덤덤하게 끄덕였다. 상관없다는 듯이.
“마저 마시고 나왔어도 됐었는데.”
“에이씨. 그런 소리 들으면서 어떻게 한가롭게 마셔! 재수 없어!”
방방 뛰는 친구를 보며 은유란이 피식 웃었다.
“네가 더 화난 거 같은데?”
“맞아. 거기 더 있다간 내가 가서 따질 뻔했잖아. 니들이 재즈를 알아!”
“헤, 고마워.”
친구가 은유란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내가 그 뭐라 그러냐···팬들이 지켜주는 거. 친위대! 그거 해줄게.”
“무슨 내가 아이돌이야?”
“못 할 건 뭐야? 재즈계의 아이돌 하면 되지?”
은유란이 배시시 웃었다.
친구도 따라 웃다가 카페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봐. 기로 프로듀서는 괜찮은 사람 같았어?”
은유란의 작은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응, 좋은 사람 같아.”
이에 눈을 가늘 게 뜨는 친구.
“그러고 보니 너 마이원 그 뚱땡이 대표도 처음엔 괜찮은 사람 같다며! 얘 사람 보는 눈 없어서 큰일 났네!”
“진짜야. 진짜 괜찮은 사람 같았어! 나이도 어린데 정말 대단한······.”
“우리보다 어려? 연하야?”
“어, 엉.”
“괜찮은 사람 맞네.”
“···?”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은유란을 보고 꺌꺌 대던 친구가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녹음도 잘 했고?”
“녹음···잘 마치긴 했지.”
“뭐야 그 찝찝한 말투는. 생각보다 잘 안 됐어?”
“아니 그건 아닌데···.”
한참을 고민하던 은유란이 대답을 포기했다.
“모르겠어. 내가 녹음을 한 건지, 논 건지.”
“엥?”
벙찐 친구의 시선을 받으며,
은유란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불과 어제의 기억인데 희미했다.
오래된 기억처럼이 아닌···
꿈처럼.
“그냥, 꿈 같았어.”
솔직히 처음엔 의심도 있었다.
아더 레이블. 기로 프로듀서.
누군가는 묻고 따지지도 않고 쫓아갈 이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은유란은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유는 또 재즈였다.
기로 피디님은 재즈가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재즈가 자신의 재즈가 같을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서울의 와인에게 미안했다. 이건 나만의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에게도 엄청난 기회니까.
그때쯤이었다. 기로 피디님이 곡을 들고 온 것은.
그날 곡을 듣고서···
브레이크가 풀렸다.
“뭐야 잘 됐다는 소리잖아!”
친구가 은유란을 찰싹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으아, 진짜 듣고 싶다. 너무 궁금해! 잘 돼서 서재페도 나가고! 아까 걔네 같은 애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꼭 성공해라 은유란!”
난리를 치는 친구를 보며 은유란은 작게 웃었다.
재즈로 성공?
‘불가능하겠지.’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그냥 이런 재즈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에겐 성공이어서였다.
“그냥 재즈였어.”
“당연히 재즈겠지! 넌 재즈 뮤지션인데!”
“아까 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반쪽짜리 말고.”
은유란은 정말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진짜 재즈.”
#커피와 샌드위치 같은 것들을 바리바리 사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안쪽에 만들어진 믹싱룸으로 향했다. 기분 탓인지 음산한 기운이 스멀거린다. 이렇게 뇌물까지 싸 들고 왔음에도 싸늘하다.
아니나 다를까, 주기훈을 비롯한 믹싱팀 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 보며 웃었다. 뭔가가 응축된 섬뜩한 웃음들······.
“피디님, 오셨어요?”
주기훈이 가장 음산한 웃음을 흩뿌리며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 방금 허리에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네. 다들 이것 좀 먹으면서 해요.”
팀원들이 좀비처럼 몰려들었다. 빵보단 커피로 먼저 가는 손들. 좀비가 아닌 흡혈귀인가···.
팀원들이 피···아니, 아메리카노를 무슨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더니 이제야 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곡 잘 들었어요. 재즈. 그것도 빠꾸 없는 정통 재즈던 데요?”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진짜 너무 좋더라고요. 평소에 재즈는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하하, 다행이···.”
“그래서 몇 분짜린지 확인했죠.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정확히 5분 52초더라고요. 그냥 6분.”
하하···.
“전 피디님이 남긴 메모 보고 더 놀랐어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받았던 편지를 다 합친 것보다 내용이 많던데요?”
음산한 기운이 아메리카노로도 정화되지 못했구나. 이 방은 나에 대한 원혼들로 가득 차 있어.
“그래도···재밌을 것 같아요.”
역시, 주기훈 밖에 없네.
“옛날 재즈 앨범 느낌처럼 일부러 노이즈를 좀 넣자는 아이디어도 좋았어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아예 멀티로 동시 녹음을 할까 하다가 말았어요.”
여러 마이크를 가져다 놓고, 한 번에 뜨는 과거 최정아 곡을 만들며 오케스트라 녹음 때 썼던 방식.
당연히 편곡에 말도 안 되는 노고가 들어간다. 그때도 TKM의 지원으로 해외 엔지니어들을 고용했으니 겨우 가능했었지. 어지간한 엔지니어는 엄두도 못 내는 작업이었다.
빵을 입에 쑤셔 넣던 팀원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든다.
주기훈이 웃었다.
“그러셨으면···.”
“전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했겠네요.”
한참을 웃어대던 주기훈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잠깐 트랙을 훑어보던 그가 다시 내 쪽을 보았다.
“근데 이거······남들 두 배 길이에, 심지어 재즈잖아요.”
“그렇죠?”
그러자 주기훈이 불쑥 물었다.
“이거, 음방은 나갈 수 있는 거예요?”
#두어 시간쯤 믹싱팀과 함께 작업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기분이 좋다. 내가 그렸던 그대로 곡의 후반 작업이 순항 중이라서.
턴투더 레이블의 믹싱팀을 겪으면서 감탄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이제는 믿고 맡길 만 했다. 주대철 기사가 이젠 자신이 가끔 와도 되겠다고 했을 때, 너무 이르지 않나 싶었는데.
‘오히려 내가 이르게 판단했네. 음원은 걱정 없겠어.’
하지만 앨범이 음원만으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지. 가벼워진 마음으로 복도를 걷기 무섭게 밀어놨던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특히 주기훈이 말했던, 음방에 대한 생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반 곡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길이의 노래. 거기에 사람들이 클래식만큼이나 지루한 장르라고 생각하는 재즈.
방송국 측에선 이것만 생각해도 채널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할 거다. 엔간해선 절대 이번 곡을 음방에 섭외해 주지 않겠지.
물론 대부분의 인디 밴드나, 모든 재즈 뮤지션들이 음방에 설 기회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난 이번 곡을 꼭 성공시키고 싶었다. 보란 듯이 결과를 보여주고 싶다.
대중들이 아닌,
성공이란 단어 자체를 잊은 듯한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에게.
그러려면 음악방송은 부가옵션이 아닌 필수 옵션. 이게 빠지면 사실상, 시작부터 외발로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나마 케이블 채널 VMN이 인디 밴드도 종종 출연시킬 만큼 음악 장르에 꽤 관대한 편이었고.
마침 VMN엔 최근 학준이 형과 새로운 프로그램을 같이하기로 한 양 피디가 있었다.
나는 양 피디를 통해 음악방송 제작진과 만날 생각이었다. 노래를 직접 들려주고 설득을 해야겠지.
‘며칠 내로 VMN을 한 번 들러야겠네···.’
계획을 정리하며 2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직원 사무실 쪽이 어수선하다.
뭐지?
“피디님.”
다가오는 여직원의 목소리마저 무거웠다.
또 무슨 루머가 떴나?
지선주가 정신 못 차리고 뭘 한 건가?
아님 마이원 대표가?
유력한 경우의 수를 제치고 전혀 의외의 것이 튀어나왔다.
“한울 씨요.”
학준이 형···?
“이번에 VMN 예능 고정 들어가기로 했었잖아요.”
“그런데요?”
“방금 한울 씨 매니저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VMN 측에서 한울 씨를 합류시키지 못할 것 같다고 통보를 해왔대요.”
나는 황당함에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계약서에 도장만 안 찍었을 뿐이지 계속 긍정적인 얘기가 오고 갔었다. 거의 확정이라는 양 피디의 너스레까지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불발이라니.
이건 지선주나 마이원 대표가 움직여서 될 사이즈가 아니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선 양 피디님하고 통화해 볼게요.”
#“어, 어···장 대표.”
VMN 예능국.
<누가 음치 소리를 내었는가?>의 성공에 힘입어 새로운 음악 예능을 준비하던 양 피디가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한울이 때문에 그래?”
-네. 갑자기 합류가 취소되었다길래요.
양 피디가 눈두덩이를 벅벅 긁었다. 연신 입맛을 다시며.
“그, 미안하게 됐어. 이게······내부 사정이라 말하기가 좀 어려워.”
이에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울이 형이 빠져야 하는 게 VMN 내부 사정이라고요?
“어, 그렇게 됐네···솔직히 나도 자세한 상황은 잘 몰라. 위에서 내려온 거라.”
-위에서요?
“크흠. 내가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라. 자세한 건 TKM 쪽에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거야.”
장기로는 갑자기 TKM이란 이름이 나오자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확인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툭 내려놓은 양 피디가 소파에서 흐물거렸다.
“에고, 이 짓도 진짜 못 할 짓이다. 한동안 잠잠하다 하더니···예능 하나 찍는데 보이지 않는 손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가 푸념하자 앞에 앉아있던 후배 피디가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뭔 일이래요?”
“기 싸움이지 뭐.”
“기 싸움이요?”
“방송국은 소속사 길들이려 하는 거고, 소속사는 휘둘리지 않으려는 거고.”
이해한 듯 아, 소리를 내는 후배 피디.
“그 길들이기 표적이 이번엔 TKM이군요.”
“어, 거기가 최근에 우리랑 이런저런 거로 자주 부딪혔거든.”
양 피디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말을 이어갔다.
“나야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좀 미안하긴 해도 아무 문제 없긴 한데. 장 대표는 한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레이블 활동이 이런 식으로 제재를 당할 거야.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긴 거지.”
후배 피디가 끄덕이다 돌연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장 대표가 이제 새우는 아니지 않아요? 스타 프로듀서에 유명 레이블 대푠데.”
“······.”
양 피디는 침묵했다.
이윽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뉘앙으로 말했다.
“뭐, 앞으로 아더 레이블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면 알겠지. 새운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