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2)
“은유란이···아더 레이블하고?”
마이원 대표의 목소리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고조되던 기분 위로 크게 한 수저 뜬 건더기가 생각처럼 맛있지 않았다. 오히려 끝 맛이 알싸한 게,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
그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어떻게 된 걸까? 지금 내 앞에 눌러앉은 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고장 난 시계가 작동하듯 정황들이 머릿속에서 째깍째깍 스쳐 갔고, 그제야 분노가 치밀었다.
마이원 대표가 장기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니까 지금, 도둑놈이 도둑질했다고 알려주러 찾아온 거네?”
갈피를 잡고 날카로워진 말투에 예상했다는 듯 장기로는 천천히 끄덕였다.
“마이원 입장에선 기분 나쁘실 만 한 거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찾아온 거고요.”
“허!”
깊은 탄식을 터트린 마이원 대표가 이를 악물며 으르렁댔다.
“장 대표 이제 보니···양아치 같은 구석이 있네? 이렇게 내 뮤지션을 빼가?”
순간 장기로가 미묘하게 변했다.
자세가 바뀐 것도, 표정이 변한 것도, 그렇다고 눈빛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마이원 대표는 속으로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백날이 가도 이해하지 못할 변화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진 모르지만
어쩐지······.
화가 나 보였다.
#은유란은 최대한 말을 아꼈지만, 서울의 와인은 그러지 않았다. 설움을 토해내듯, 모두 쏟아냈지.
뻔한 레파토리였다.
왜 흔하디흔한, 잘못된 연애처럼 다 잡은 물고기엔 밥을 안 주는.
영입 땐 입에 발린 말로 약속했던 것들이, 영입 후엔 본인 능력이 부족한 거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아이틴이 대박 나며, 회사 자체가 모두 그쪽으로 집중했고, 그나마 물어다 주던 자잘한 공연들까지도 뚝 끊겼고.
본인들이 발품을 팔아 대표에게 검사를 맡아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공연을 겨우 이어왔단다.
듣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럼에도.
한 번 부드럽게 흘러가 보려 했다.
그러다 정말 술술 흘러가면, 잘 마무리해서 포장까지 딱 좋게 끝내려 했었다.
회사 차원에서.
근데, 뭐라고?
내 뮤지션?
“이 바닥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나 본데, 이런 식으로 수작질하는 거 소문나면 아무리 TKM이란 뒷 배가 있다 해도 곤란해질 거야.”
낮게 들어오는 경고에.
“우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빼갔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네요.”
“······뭐?”
“유란 씨가 여기 소속이 아니었는데, 빼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벙찐 얼굴에다 대고 천천히, 또박또박. 혹시라도 못 듣는 말이 있을까 분명하게 짚었다.
“오히려 전후 관계를 따져보면 제가 대표님께 속았습니다. 재계약이 결정되지 않은 뮤지션으로 저희 레이블과 계약서를 쓰시려고 했으니까요. 오히려 이쪽이······법적으로 걸고넘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법을 논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활 타오르던 눈빛이 팍 사그라졌다. 무슨 1인극을 보는 것 같다. 감정의 변화가 극적이야.
“그건 너가 은유란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무슨 소리세요. 제가 어떻게 접근합니까?”
“왜 못해!”
무슨 개소리냐는 듯.
마이원 대표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서 받은 그대로 돌려줬다.
“고향에 내려가 있었잖아요. 유란 씨.”
할 말을 잃고 입만 벌리고 있는 마이원 대표가 보인다.
살짝 입꼬릴 올리며 말했다.
“괜히 법적으로 문제도 안 되는 거 붙잡지 마시고, 애초에 하시던 거 집중하세요. 요즘 아이돌 인권 문제가 한창 이슈던데, 괜히 이상한 쪽으로 불 옮겨붙지 마시고.”
꿀 먹은 벙어리도 저런 얼굴은 아닐 거다. 꿀이 아니라 독약을 머금고 있는 표정이다.
“그럼 이만.”
그런 그에게 목인사를 하고서 곧장 마이원 사옥을 나섰다.
이걸로 될까?
아마 그럴 거다.
잃을 게 많아진 욕심 많은 사람이니까.
이미 놓친 것보단, 가진 걸 지키려 들겠지.
곧장 주재윤에게 전화해 보도자료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흥분했나···.
대표답지 못 했을 거다. 그랬겠지. 하다못해 서재원 팀장만 되더라도 이 상황을 좀 더 신사답게 마무리 지을 방법을 알았을 거다.
근데 그래도.
대표답지 못 하더라도.
나는 다시 그 순간이 오면 또 화를 낼 것 같다.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이 아더 레이블과 계약을 마쳤을 때쯤. 이미 보도자료는 이리저리 퍼져나간 후였다.
-빌 앨런 곡 나왔을 때만 해도, 이제 정말 할 장르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빌보드를 진입한 프로듀서가 다음 작업을 무명 가수, 그것도 재즈를 한다고?
-삼촌이 업계 종사자인데, 기로 프로듀서는 정말 곡의 흥행 이런 거 안 따지고 하고 싶은 거 한다고 함. 그래서 아더 레이블 대표하는 거라던데.
-음악이 하고 싶어서 대표를 하는 클라쓰ㅋㅋㅋ
-글쎄. 난 이미지 관리하는 거 같은데. 지난번에 성공하고 변했다는 논란 있지 않았음? 그거 막으려는 듯.
-논란이라는 사람만 논란인 그거???
-그거 덮겠다고 무명 재즈 뮤지션이랑 작업한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음?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느낌인데?
-근데 다 떠나서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네요. 기로 프로듀서가 만든 재즈는 어떤 느낌일지.
“반응 나쁘지 않아요.”
“그러게요. 이 정도면 클린한 거죠.”
“근데 여기 삼촌이 업계 종사자라는 댓글. 이거 진짜 같지 않아요? 너무 장잘알인데?”
“설마 우리 중에 있는 거 아녜요?”
직원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김지희가 준 결재 서류들을 훑다가 내가 장난기 어린 시선을 보냈다.
“재윤 씨만 안 웃는 거 봤어요.”
“아, 그러고 보니 재윤 씨 조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여기저기서 의심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주재윤이 능글맞게 조카에게 전화하는 시늉을 해댔다.
한참 웃다가 다시 결재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꺌꺌 대던 김지희도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반응도 괜찮고, 마이원과도 잘 마무리돼서요.”
그치. 잘 마무리······되긴 했지.
예상대로 마이원은 잠잠했다. 오히려 아이틴 홍보에는 박차를 가하는 중이고.
결재 서류를 받아 품에 안은 김지희가 불쑥 물었다.
“근데, 피디님에 대한 루머는 대체 누가 퍼트렸던 걸까요?”
“글쎄요···.”
“대기실에 누가 왔었는지 그런 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날 출연했던 출연진이나 매니저, 아니면 색다른 도전 스태프 정도일 것 같은데······.”
김지희가 던진 의문을 덥석 받은 주재윤이 추리를 이어간다.
“······그러니까, 범인은!”
“이 안에 있어요?”
“꼭 저러는 사람이 범인 아녜요?”
“또? 이것도 재윤 씨야?”
피식.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낙엽이 잔뜩 쌓여있다. 조만간 저게 눈으로 변할 생각을 하니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피부로 와닿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시선을 뗐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주재윤에게 말했다.
“재윤 씨. 우리 보도자료 하나만 더 내죠.”
#“이야, 우리나라 사람들 태세전환 빠른 건 알아줘야 해.”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임기태가 핸드폰을 툭툭 밀어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지선주가 갸웃거렸다.
“왜요?”
“기로 프로듀서에 대한 얘기 한창 돌았었잖아. 그게 쏙 들어갔네. 무명 재즈 뮤지션과 작업한다고 기사 뜨자마자.”
“아.”
지선주가 뜯던 티백이 툭 하고 떨어졌다.
“다행이네요. 그거 루머였잖아요.”
“그치. 루머였지. 대기실 간 건 우리고. 우린 까였고. 그래도 뭔가 쌤통이다 했는데, 뭔 논란도 없이 슥 사라져 버렸네.”
입맛을 다시는 임기태에게 지선주가 바닥에 떨어졌던 티백을 털어내며 말했다.
“근데, 논란이 없었다고 해서 나왔던 얘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아마 기로 피디님이 틈을 보이면 또다시 나올 거예요. 그러다 큰 실수를 하시면, 같이 얽혀서 많이 힘들어지실 수도 있고요.”
“거, 좀 그랬으면 좋겠네.”
지선주는 대답 없이 물을 끓였다.
“······형도 한 잔 드려요?”
“뭔데?”
“카모마일이요.”
“그런 걸 무슨 맛으로 먹냐.”
“심신의 안정에 좋대요.”
“한 잔 줘봐. 나 필요해 그거.”
옅게 웃음을 흘린 지선주가 티백 하나를 더 뜯었다. 동시에 임기태가 살짝 커진 목소리로 말꼬릴 올렸다.
“어, 기사 하나 더 떴네?”
자연스레 임기태에게로 시선을 움직이는 지선주.
“아더 레이블 측에서 루머에 대해 언급 했는데?”
“······뭐라고요?”
“좀 디테일해. 대기실에 매니저가 찾아왔던 것은 맞지만 부른 건 아니었고, 시기상 빌 앨런과의 작업이 있어서 거절했다는 내용이랑. 비슷한 일들이 연예계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누군가 사실에 교묘하게 거짓을 섞는 건데, 이를 통해 아픈 사람이 마약을 한 거로 둔갑하기도 하기도······어라, 이건 영환이 얘기네?”
임기태가 허리를 세우며 기사에 집중하더니 확신의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영환이 얘기 맞네! 하, 얘도 참. 내 담당은 아니라 알 바가 아니긴 했지만 진짜 불쌍하긴 했지. 하필 중국 진출을 앞에 두고 그런 스캔들에 휘말려서.”
“···.”
“뭐, 그래도 덕분에 네가 중국에서도 잘 풀렸잖냐. 불쌍하긴 해도 우리한텐 호재였지. 이걸 아더 레이블이 언급해주네. 뭐, 억울했던 일 꺼내주는 거니 우리한테도 나쁜 건 아닌데···.”
갸웃거리던 임기태가 지선주 쪽을 돌아봤다.
“뭐해?”
지선주가 망부석처럼 굳어서 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녜요. 거의 다 우려낸 것 같아요. 여기요.”
“오 땡큐. 잘 마실게. 스타한테 이런 대접 받는 매니저는 나밖에 없을 거다.”
“하하···형, 저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임기태가 컵을 받아들며 지선주를 훑었다.
“어? 그래. 갑자기 피곤해 보인다 너. 얼른 좀 자. 시간 맞춰 깨울 테니까.”
“네.”
방으로 돌아온 지선주는 컵을 내려놨다.
노르스름한 티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티백을 건져내지 않았다. 오늘은 더 진하게 마셔야 할 것 같았기에.
“우연이겠지? 그치, 우연이지. 내가 그런 걸 알고 기사를 냈을 리 없잖아?”
진하게 우려진 카모마일을 단숨에 들이킨 지선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난 잘못 없어. 이 바닥은 원래 그런 거니까.”
#루머에 대한 해명 기사를 내보냈으나,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애초에 크게 논란된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구나, 정도일 뿐. 여전히 내가 누구와 작업하는지가 더 주목받고 있다.
‘경고인 걸 알아들었으려나?’
동료 뮤지션에 대한 루머를 퍼트려 자신의 앞길을 뚫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곤욕을 치르게 했던.
그러다 결국 기자의 배신으로 모든 게 까발려졌던, 스타 뮤지션.
‘적당히 알아듣고 정신 차렸으면 좋겠네.’
서글서글하게 웃던 지선주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악보와 가사지를 챙겨 3층으로 올라왔다.
가장 큰 녹음실 문을 열어젖히자 은유란과 서울의 와인의 상기된 얼굴들이 보인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기깔나게 녹음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