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1)
은유란 일행과 다음엔 회사에서 볼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허기진 배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채워가는 얼굴들로.
“저 기분 알 것 같네요. 피디님이 빌스에 왔을 때···딱 저랬거든요. 뭔가 내 인생에 막혔던 게 이제는 뚫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조수석에 앉은 윤태영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구석엔 이것도 결국 실망으로 끝나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도 있었어요.”
알 것 같다. 허구한 날 고구마만 먹던 사람들은 그래서 김칫국을 못 마신다. 그것도 마셔본 사람이 잘 마시는 거니까.
쩝. 입이 쓰네.
“하지만 피디님과 작업하다 보니 그런 불안감도 금세 사라졌어요. 곡들을 듣는 순간, 그냥 피디님을 믿게 되더라고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윤태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동차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기분이라 괜스레 속도를 줄였다. 민망한데, 기분은 좋네.
“그때 피디님하고 잼을 했던 게, 제 인생을 바꾼 거죠.”
약간 찔리는 건 덤이고.
윤태영의 인생은 애당초 바뀔 예정이었다. 그래서 솔직함을 한껏 담아 말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형은 성공했을 거예요.”
시선은 헤드라이트 끝을 향해있어도, 윤태영이 고개 젓는 게 느껴졌다.
“글쎄요. 피디님 아니었으면, 그냥 내가 대중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하면서 빌스만 주구장창 다녔을 거 같은데요?”
빌스를 주구장창 다니게 되는 건 맞지. 그러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눈에 들었을 거고. 그리고 결국 해외로···.
“뭐, 그러다 우연히 잘됐더라도······지금처럼 음악이 좋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얘기였다. 윤태영은 정말 음악에 중독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모습을 자주 보여줬으니까.
윤태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피디님 덕에 이렇게 된 거예요.”
“······.”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나오질 않았다.
‘항상 짐이었는데.’
성공이 예정된 사람.
그런 사람을 데려오는 건 가슴 뛰면서도 내게 적잖은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나 때문에 그들이 미래보다 못한 길에 들까 봐. 그보다 못한 상황에 놓일까 봐. 그게 전부 내가 내민 손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봐.
내가 고속도로 위에 오르기 위해, 날아오를 수 있는 이들을 바닥에 붙잡아 두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내가 날려고. 그리고 그들도 함께 날 수 있도록 하려고.
그렇게 레드리시를 보냈고, 윤태영도 앤 더글라스 작업에 연결되도록 했었지.
그래도 마음 한구석 짐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윤태영의 한 마디가 차곡차곡 쌓이던 짐을 어느 정도 줄여준 것 같았다.
“그 말 참 고맙네요.”
“제 감사에 비할까요.”
윤태영이 웃었다.
기분 좋은 정적이 이어지다, 윤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 보니 엄청 기대되더라고요. 피디님의 재즈가.”
그러게.
그의 말처럼, 나도 공연을 보며 기대감을 키웠다.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에 은유란의 목소리를 대입해보며.
처음 멜로디가 들렸을 땐, 뭔가가 고장이라도 났나 싶기도 했지. 갑자기 재즈라니.
그런데 오늘 은유란을 보니 확신이 가져지더라.
멜로디가 가리키는 방향이 분명 더 나은 방향일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그렇게 기대감이 큰 밴을 가득 채울 무렵, 윤태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내릴 준비를 마친 윤태영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 때문에 빙 돌아가시네요.”
“제가 도와달라고 끌고 나온 건데요. 뭘.”
차에서 내려선 윤태영이 물었다.
“피디님은 작업실로 가실 거죠?”
“네. 공연을 보니 떠오르는 게 좀 있어서.”
“역시.”
윤태영은 당연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끄덕였다. 손을 휘적거리는 그에게 똑같이 흔들며 핸들을 돌렸다.
쏟아내야 할 아이디어가 많아 아직 잠들기엔 이른.
늦은 새벽이다.
#재즈란 뭘까.
인종차별로 탄압받던 흑인이 그 설움을 이겨내기 위해 신앙심을 노래하며 나온······.
이런 거 말고.
보통은 즉흥연주를 떠올릴 거다.
아직 피아노에 익숙해지기 전, 내가 그랬듯이.
악보도 없이 키(key) 하나만으로 뽑아내는 연주가 무슨 입안에서 줄줄이 카드를 꺼내는 마술보다 더 신기했다. 그들은 매 순간 작곡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들이 천재라서?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규칙이었다.
2-5-1 코드 진행. 스케일 등의 규칙들로 마디 마디를 채워나간다.
즉흥에 규칙이라니!
어쨌든,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만으로 재즈라 부를 수 있을까?
즉흥연주가 가능해질 때쯤이 돼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즉흥연주는 스킬일 뿐.
재즈는 긴장과 해결의 음악이란 걸.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보았다.
트랙에 찍어 둔 은유란의 멜로디.
의외로 단순하다. 마치 펜타토닉 스케일처럼 다섯 음으로만 만든 무난하디 무난한 멜로디였다.
그럼에도 적재적소에 음을 넣어 이전에 듣지 못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나는 본격적으로 멜로디를 발전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다.
단순한 만큼, 내가 채워야 할 빈칸이 많았다.
지금까지 가슴 설레는 힌트를 받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어쩐지 풀고 싶은 숙제를 받은 느낌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그럼에도 센스가 돋보이는 단순한 문장.
이 문장을 제대로 발전시키면 어떤 곡이 완성될지. 그 기대가 손가락을 간질였다.
‘우선 좀 꼬아보자.’
긴장감을 주도록.
멜로디를 꼬는 방법은 간단하다.
텐션. 꾸밈음을 넣어주는 것.
그렇다고 마냥 꾸며주기만 하는 역할은 아니다.
텐션은 멜로디를 외줄 위에 올린다.
그리고 흔든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보는 이, 아니, 듣는 이로 하여금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시각적인 효과 없이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다고 곡 내내 그렇게 가다간 듣는 이가 지쳐 떨어져 나가겠지. 그래서 해소가 필요한 거고.
나는 멜로디 사이에 텐션을 채웠다.
줄이 흔들린다. 곡도 덩달아 출렁인다.
그러다 다시 은유란의 멜로디로, 해소.
긴장과 해소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파르르 떨리는 선율 위로 은유란의 목소리를 얹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줄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떠오르는 그대로를 건반에 옮겼다.
때론 양손 유니즌으로.
때론 왼손으로 컴핑 (-반주)까지 넣어가며.
어느새 나는,
즉흥 연주를 하고 있었고.
재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다!’
작곡을 하고 있다.
#“장 대표, 아 연락이 늦어서 미안해요. 요즘 회사가 좀 정신없이 돌아가야지 말이지. 아이틴에 박혜진에······.”
마이원 대표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핫, 역시 장 대표, 쿨하구만. 아무튼, 유란이 서울에 왔으니, 이제 언제든 와도 된다는 얘길 하려고 연락했어요.”
커피를 홀짝이며 넌지시 물었다.
“유란 씨도 동의한 내용인가요?”
“동의? 무슨 동의? 소속사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물어다 줬는데, 뭔 놈의 동의가 필요하겠나. 혹시라도 유란이가 재즈 아니면 안 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돼요?”
아···?
마이원 대표는 내가 은유란에게 재즈가 아닌 대중적인 곡을 줄 거라고 생각 하나 보다.
껄껄거리던 마이원 대표가 이야길 이어갔다.
“장 대표 보면 걔도 곧바로 재즈가 뭐냐고 시치미 뗄걸?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입맛을 다시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가 말꼬릴 올렸다.
“언제 회사 올래요? 내일 당장?”
“좋네요.”
“오케이. 장 대표, 그럼 우리 내일 봅시다?”
미끈거릴 정도로 인지한 목소리. 저는 나름대로 감춘다고 감춘 것 같지만 끈덕진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때 뵙죠.”
정말 보기만 하겠지만.
덤덤하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어째 철판 두꺼운 이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내 철판도 두꺼워지는 듯하다. 다큐멘터리 덕인지 연기력도 좀 는 것 같고 말이지.
“정말 가시게요?”
김지희의 물음.
내가 끄덕이자 그녀는 걱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어차피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고 법무팀에서도 그랬는데, 굳이 가야 할까요? 자초지종을 들으면 절대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을 텐데···.”
“그래서 더 가야죠. 가뜩이나 이상한 루머 많이 도는데, 괜히 소속 뮤지션을 뺐었다는 소리 나오면 안 되니까요.”
김지희가 정말 저게 낫겠냐는 듯 주재윤을 보았다. 주재윤은 천천히 끄덕였고.
“계약 전, 미리 얘길 하는 게 확실히 더 나은 방법은 맞아요. 대표님들끼리 얘기가 끝나면 문제가 생길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는 김지희를 달래고, 주재윤에게 부탁했다.
“보도자료 준비해줘요.”
“넵.”
그리고 곧장 직원 사무실을 나와, 자연스레 커피머신 앞에 섰다.
지이이잉.
졸졸졸 내려오는 에스프레소를 보며 진하게 웃었다.
‘소속?’
소속이란 이름을 쓰려면 그에 맞게 대우해줬어야지. 뭐, 이젠 소속도 아니지만.
사실 좀 고맙다.
계속 거짓말을 해줘서.
끝까지 은유란을 무시해줘서.
그렇게, 내가 다른 생각 없이 이정표만 보고 직진할 수 있도록 해줘서.
“···과일이라도 사서 가야 하나?”
#다음날.
느긋하게 점심까지 먹고, 배를 든든히 채운 상태로 마이원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커피 향까지 맡을 시간은 안 돼서 마이원에서 마시기로 하고. 줄지는 의문이긴 하다만.
“어어, 왔군.”
마이원 대표가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 자리로 움직였다.
“아 오늘 아주 날씨도 좋고, 몸도 가볍고, 느낌이 좋아. 계약도 술술 진행되고, 음원 성적도 잘 풀릴 것 같아. 장 대표도 그렇지 않아요?”
그런가. 아까 보니 날씨가 좋긴 했지. 내가 마이원 대표한테 멜로디를 들은 것도 아니라 느낌이 좋은 건 모르겠지만.
딱히 할 말을 못 찾고 그냥 웃자, 마이원 대표가 껄껄대다 말고 말했다.
“유란이가 지금······오는 중인데, 좀 늦네. 최 실장!”
큰 소리로 부르자 잠시 후, 지난번 이곳에서 봤던 남자가 들어왔다. 세은의 매니저라고 예상했던.
“예, 대표님.”
“그, 유란이한테 전화 좀 해봐. 지금 프로듀서님 기다리신다고, 빨리 오라고.”
“아, 넵.”
최 실장이라는 남자가 문을 닫으며 사라지고, 마이원 대표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크흠, 그건 그렇고, 어떻게 곡은 좀 나왔어요?”
금세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마이원 대표가 은근히 말했다.
“이번 음원 잘 되면, 세은이 솔로나, 아이틴 곡은 어때요? 우리 혜진이랑 거기 박경호 씨랑도 잘 붙여서 OST 만들면 그것도 잘 팔릴 것 같고.”
또 보글보글 끓는다. 누군가는 기대조차 않던 김칫국이.
그렇게 한참을 국 우리기에 여념이 없던 마이원 대표가 계약서가 끼워져 있을 거로 추정되는 파일을 툭 올렸다.
“자, 유란이 오기 전에 회사 대 회사로 계약서부터 확인을······.”
“안 올 겁니다. 유란 씨.”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곱게 포장한 폭탄을 마이원 대표에게 건넸다.
“뭐? 그게, 무슨···.”
“저희 아더 레이블과 계약 진행 중입니다.”
얼굴에 의문이 둥둥 떠오른 마이원 대표를 보며, 심지에 불을 붙였다.
“‘전’ 소속사에는 그래도 미리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