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올 댓 재즈 (1)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잡지 중 하나이자, 명예의 전당. 그리고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뛰어들어 등반하는 세계 최고층 탑.
빌보드.
메인이 아닌 곳에 이름만 살짝 올려도 수백 개의 기사가 만들어질 만큼 독보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차트다.
그중에서도 싱글차트 HOT 100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차트였다. 차트인 자체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그 순간만큼은 전세계 상위 100등 안에 드는 셈이다.
당연히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기사가 올라오고, 유사한 기사가 또 올라온다. 흥분한 네티즌들은 이 기사 저 기사 옮겨 다니며 하고픈 말을 늘어놓는다.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이가 있는 반면, 아니꼬워하는 부류도 자연스레 생겨난다.
그들에겐 좋은 먹이가 있었지.
미국인, 미국 회사의 도움을 받아 오른 것이라는 꼬리표.
누군가는 프로듀서로서 이미 대단한 일이라며, 그런 댓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제대로 신경 쓰고 있다.
예상했던 반응이고, 또 사실이기도 하니까.
그래서일까. 화는 전혀 나지 않고 오히려 의욕이 단단해진다. 다음 목표가 보다 분명해진 느낌이라.
저 반응들을,
실력으로 지우고 싶었다.
“아니, 모르면 댓글을 달질 말던가.”
“왜요? 또?”
“오후소년들이 40위 했었는데, 빌 앨런은 60위. 그러면서 엄청 대단한 것처럼 언플하네. 우리 오빠들이 더 대단함···이라는데요?”
깊은 빡침이 우려지다 못해 졸아버린 목소리였다.
“오후소년들이 빌보드 40위를 했었어요?!”
“장르별, 장르별.”
“아아. 난 또. 그거야 찾으면 꽤 많을 텐데?”
“그니까요. 물론 그것도 대단한 거지만, 지금 HOT 100이랑 장르별 차트랑 비교하면서 비꼬는 건 너무 무식한 거 아니냐고. 나중에 알고 얼마나 이불킥하려고.”
“저런 애들은 이불킥도 안 해요.”
“그죠? 그럴 줄 알았어. 아 그게 더 열 받네.”
직원들의 대화에 주재윤이 턱을 괴며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주유 씨 몇 년 차죠?”
“3년이요.”
“은우 씨는요?”
“2년입니다.”
“아직 한창 댓글 보고 분개할 때네요. 좀 더 일하다 보면 초연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내가 물었다.
“재윤 씨 몇 년 차예요?”
나이는 나랑 비슷한 거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빨라 봤자···.
“4년 차요.”
“1년···차이네요?”
주재윤이 발끈했다.
“피디님? 지금 스치는 눈빛이 뭔가 이상했는데, 저만 그렇게 느낀걸까요? 별 차이 없는데? 라는 표정이셨는데..”
오, 내 생각이 들려요? 이건 안 들리나?
“제가 영화 감독하겠다고 허송세월만 안 보냈어도···! 아, 그래도 4년 차겠구나.”
손가락으로 대학 생활과 군 생활을 더해본 주재윤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옆에서 시트콤 찍냐며 웃어젖히던 여직원이 내게 물었다.
“1년 차 대표님.”
“······.”
“그래서 대표님의 다음 작업은 무엇인가요?”
다음 작업···.
“글쎄요.”
“항상 계획이 다 있던 우리 대표님이었는데···. 역시 성공에 취하신 건가. 빌보드 올라보셨다 이거지.”
여직원이 땅을 칠 것처럼 오버스럽게 한탄했고 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어봐야겠네요.”
“···?”
걸터앉아있던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고, 직원 사무실을 나서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곧장 김혜령의 이름을 최근 통화목록에서 찾아내어 눌렀다.
#-근데, 유란 씨..소속사가 있다고 하셨었어요.
아?
김혜령의 말에 똑똑 떨어져 내리는 커피 방울을 내려다보았다.
이 생각을 못 했네.
앳되어 보이는 외모에 비주류인 재즈 뮤지션. 소속사가 있을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뺏어 올 수도 없으니 어쩐다.
‘아무래도 영입은 어렵겠는걸···.’
김혜령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고, 고민을 이어갔다.
어떡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다.
회사 대 회사로 합의를 보고, 콜라보하는 것.
하지만 그러자니 다음 문제에 봉착한다.
무명. 재즈 뮤지션. 듣기만 해도 마이너한 조합. 그런 그녀와의 작업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TKM이 아닌, 내 팀원들에게.
완성도 높은 곡.
좋은 뮤지션.
성공의 이정표.
나에겐 멜로디가 들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들에겐 아니니까.
그래, 해야 할 이유. 그게 필요한 거지.
온갖 생각들이 꾸물꾸물 올라온다.
그게 가득 차서 머리가 무거워질 때쯤.
고개를 내저어 털어냈다.
‘지금 결론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머릿속에 멜로디가 선명하다. 금방이라도 들릴 듯이. 이 멜로디를 발전시키고 싶다. 곡으로 완성시키고 싶다. 그러니 일단 움직여보자. 그러다 보면 ‘이걸 해야 하는 이유’가 더 생길지도 모르니까.
생각을 정리하고서 김혜령에게 물었다.
“어디 소속사라던가요?”
#마이원 엔터테인먼트.
마포구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아더 레이블보다 조금 더 큰 규모. 카운터에 앉아 핸드폰 게임이 한창이던 직원이 무심한 눈으로 날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으로. 그러다 멈칫하며 다시 나에게로.
벌떡.
“어, 어. 벌써 오셨네요?”
놀란 눈을 한 직원이 수화기를 낚아채듯 들었다.
“대표님, 기로 프로듀서···아, 아니. 아더 레이블 대표님 오셨습니다. 네. 넵.”
그녀는 수화기를 철커덩 내려놓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어오셔도 된다고···.”
그녀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넓다. TKM 대표실보단 확연히 작고. 서재원 팀장의 방보단 확실히 컸다.
그리고 일찍 온 탓일까? 안에는 생각과는 달리 여러 사람이 있었다.
마이원의 대표와 낯이 익은 젊은 여자. 누군가 했더니 세은이었다. 아이틴이란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자, 솔로 활동을 통해 포스트 하서윤이라고도 불리는 여자 아이돌.
옆에는 30대 초반쯤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마 세은의 매니저일 것 같네.
이거 구성을 보아하니, 일찍 와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닐지도···.
“장 대표 반가워요.”
마이원 대표가 웃으며 인사했다.
회사와 회사로 만나는 거니 저렇게 부르는 게 당연한데도, 어색하기만 하다. 물론 티 낼 필요는 없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어서 매니저로 추정되는 남자가. 다음으론 세은도 살랑거리는 미소로 인사해왔다.
자리에 앉자 마이원 대표가 껄껄대며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엔 나 장 대표가 누군가 했어요. 매스컴엔 기로 프로듀서로 잘 알려져 있으니까. 근데 장 대표가 기로 프로듀서란 얘기 듣고 얼른 약속 잡으라고 그랬지.”
“하하, 감사합니다.”
영혼 없는 웃음을 날리다 중간중간, 마주 앉은 세은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주 은근하게 웃었다.
은근하게 부담스러운걸.
한참을 큰 목소리로 떠들던 마이원 대표가 갑자기 내게 세은을 소개했다.
“장 대표도 누군지 알죠? 우리 회사 간판. 세은이. 포스트 하서윤으로 더 유명했지만, 사실 이제 그런 건 벗어날 때가 된 것 같고.”
고개를 들어 세은을 보았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 길게 뺀 아이라인. 눈웃음.
솔직히 말하면···.
포스트 하서윤이란 이름을 벗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입은 적도 없어서.’
쩝. 이런 말을 하게 될진 몰랐지만, 하서윤이랑은 비교하기엔 좀···.
세은이 그냥 여우면, 하서윤은 구미호쯤 되려나. 근데 막 나가는 구미호라 사람을 홀리긴커녕 그냥 멱살 잡고 흔들지.
“우린 장 대표 연락받고 바로 느낌이 왔거든. 우리 세은이랑 작업을 해보려 하는구나.”
느낌이 잘못 오셨는데?
“피디님. 저 완전 잘할 자신 있는데.”
뭔가 철철 흘리며 생긋 웃는 세은.
확실히 오해가 생겨버렸다.
분명 여기 직원한테 얘길 했는데···.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던 직원을 생각하니 어디서 커뮤니케이션이 뻑났는지 알만했다. 난감하네.
“죄송하지만 전 세은 씨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엉? 아니라고요? 그럼?”
마이원 대표가 한쪽 눈을 추어올리며 의아해했다. 그러다 아, 입을 벌리며.
“혜진이 때문이었나?”
순간, 세은의 얼굴이 팍 굳는다.
“박혜진 씨도 아니고요.”
그러자 세은이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아니, 그럼 누구 때문에 오셨는데요?”
“은유란 씨라고.”
“···?”
전혀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세은도 매니저도 벙찐 표정이 되었다.
마이원 대표가 입을 열었고.
“어? 아, 있죠. 있어. 유란이······.”
김이 팍 샌 것 같은 미적지근한 투였다.
“근데, 굳이······그 친구를?”
“네. 그분이랑 작업이 하고 싶었는데, 마침 소속사가 마이원이더라고요.”
“흠흠. 그래요? 유란이 때문에 오셨다?”
뭔가가 불편한 듯 자세를 고치는 마이원 대표. 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아······근데 어쩌죠? 지금 회사에 없는데. 고향 다녀온다고 해서 보내줬거든요.”
“아?”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해요. 장 대표. 아무래도 다음에 약속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네. 유란이 휴가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 줄게요.”
반응이 뭔가 찜찜하지만, 소속사 대표가 그렇다는데 뭐라하겠나.
어쩔 수 없지.
“네. 그래야겠네요.”
마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세은이 보였지만 딱히 내가 해줄 말은 없었다.
“아 참, 대표님. 혹시 은유란 씨가 언제 고향으로 내려가셨나요?”
“어? 아, 뭐···지난주였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입이 저릿하도록 비즈니스용 미소만 주구장창 날리다 마이원을 나섰다. 밖은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우중충했다.
“흐음.”
콧잔등을 긁적이며 건물을 돌아봤다.
확실히 이상하네···.
‘내가 본 게 이번 주인데?’
#기어이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사무실에 도착했다.
한껏 어두워진 계단을 올라 사무실로 들어가자 날씨에 걸맞은 분위기가 날 맞이했다.
“헐, 이거 완전 악의적인데?”
“어디 기자야. 데일리it슈? 재윤 씨 얼른 여기 전화해보죠.”
답답한 표정의 주재윤. 사나운 얼굴의 김지희. 그리고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성나 있는 직원들.
뭐지?
“피디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걸···.”
“댓글도 꽤 달렸어요.”
“뭐라는데요?”
“뭐, 그럴 줄 알았네 뭐네하면서 또······.”
“하! 팔랑귀들. 뭘 그럴 줄 알아. 어이가 없네.”
“아니, 그리고 저 혼자 기사 내놓고 뭔 논란이 되고 있어? 이거 누가 분명히 악의적으로 기자한테 제보한 것 같은데요?”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어 얼른 다가갔다.
“뭘 제보해요?”
직원들이 그제야 날 보았다.
“아 피디님. 저, 그러니까······.”
뻐끔거리는 직원들 사이로 나타난 주재윤이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내게 건넸다.
“이런 기사가 떴어요.”
<무명 히트제조기라 불리는 프로듀서의 진실>
[일명 무명 히트제조기라 불리며 곡 하나로 무명 가수를 스타덤에 올리는 프로듀서가 자신의 인기에 취해 갑질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후일담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프로듀서는 곡에 대해 조언을 구하려는 가수, 매니저들의 요청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며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스타와 그의 매니저만 따로 대기실로 불러······]
“···.”
“근데, 그렇게 크게 번질 일은 아닐 것 같아요. 일단 기사도 하나뿐이고, 완전 카더라라······.”
“그렇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여전히 기사 내용에 둔 채로.
다시 한번 읽었다.
아무래도 색다른 도전에서의 일을 교묘하게 비틀고 부풀린 것 같은데······.
“우리 회의 좀 해야겠네요. 다음 작업에 대해.”
“네. 일단 어떻게 대응할지······네? 다음 작업이요?”
아무래도 하나 더 생긴 거 같지.
은유란과 해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