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빌보드
원형 계단을 올라가자, 창가 쪽에 앉아있던 김혜령이 손을 펄럭거렸다.
“여기요, 여기!”
파스텔톤의 트렌치코트. 한껏 화사한 옷에 어울리는 화사한 표정이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헉. 저 살쪘나요?”
그게 그렇게 되나···.
내 당황한 모습에 꺌꺌 대던 김혜령이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리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단 표정으로 끄덕였다.
“자, 이제 칭찬해 주세요.”
피식.
“잘 봤습니다. 재밌었어요.”
“그게 끝인가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무슨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제야 김혜령이 헤벌쭉 웃었다.
“배우분께서 잘해주셨죠.”
“배우···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경호 씨한테 연기 레슨 좀 받아서 찍을게요.”
“이미 충분히 잘해주셨는데요 뭘. 아 참, 이제 그냥 배우도 아니고 영화배우가 되실지도···?”
“네?”
무슨 소리냐는 듯 말꼬릴 올리자 김혜령이 설명했다.
“제작사 쪽에서 영화관 개봉을 준비하는 중이에요. 좀 더 완성도 있게 다듬고 런닝타임도 2시간 남짓으로 줄여서요.”
“오, 축하···가 아니라···.”
“풉, 너무 부담가지지 마시고요.”
그게 맘대로 되나.
“언제 개봉이죠? 그 기간엔 영화관 가면 안 되겠네요.”
“가실 시간은 있구요? 피디님 인터뷰하려면 예약제로 운영한다던데.”
씁쓸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김혜령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미팅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여기였지.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이었던, 김혜령과 처음으로 미팅한 곳 말이다.
“편성조차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나지막하게. 하지만 우울함 한점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감사해요, 피디님.”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 남에게 저 말을 꽤 많이 들은 것 같다. 분에 넘치게.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항상 좋네. 내가 즐거운 일이 남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 같아서.
“아녜요. 잘 만들어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저희 직원들도 감사하단 얘기 꼭 전해달라 했어요. 특히 저희 홍보담당자가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하고서 어색하게 웃는데, 타이밍 좋게 진동벨이 울렸다. 곧장 일어나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1층으로 내려왔다.
“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인슈페너까진 맞는데, 트레이 위에 슈가 파우더가 잔뜩 뿌려진 빵이 떡하니 올려져 있다.
오븐에 붙어있던 남자가 돌아보며 웃었다.
“서비스입니다.”
“이 큰걸요?”
“다큐 보고 찾아오시는 손님이 은근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윙크까지 하신다.
공짜로 얻어먹는 건 좀 그래서, 가격을 지불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포스기를 꺼버리겠다는 남자의 엄포에 결국 공짜 빵이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2층으로 돌아왔지.
“그 빵은 뭐에요?”
“······이게 뭐랄까.”
“···?”
“홍보비?”
전후 상황을 얘기하자 빵 터진 김혜령이 안 그래도 달달한 게 당겼다며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다 먹은 것 같은데···라는 말에는 진심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았지.
“개봉 준비에 다음 작품 준비까지. 이제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요.”
이미 일어난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던 우리는 시점을 미래로 옮겼다.
“다음 작품이요?”
“네. 이번에 사실 못 한 이야기들이 많잖아요.”
하긴, 그녀가 처음 건넸던 콘티와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 그만큼 그녀가 해야 할 이야기들도 많이 남았으리라.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행복하다.’
듣는 이도 기분 좋은 푸념이었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물었다.
“다음 미팅도 여기에서 하신다고요?”
“네. 마침 미팅하기로 하신 분이 이 근처 사신다고 해서.”
순간 궁금증이 일었다.
“다음 다큐멘터리는 어떤 내용인데요?”
“화려하게 성공하는 음악가의 이야기를 다뤘으니. 이번엔 좀 평범한 음악가의 이야기를 담아보려고요.”
화려하게 성공한 음악가.
듣기 쑥스러운 말이다. 동시에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말이고.
나는 아직도 내가 평범한 음악가. 아니지, 실패한 음악가 쪽이 더 어울리게 느껴지는걸···.
신이 난 김혜령이 설명을 이어갔다. 맨 처음,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쪽 길로 내려가면 재즈바가 하나 있거든요. 올 댓 재즈라고. 거기서 재즈 보컬로 활동하는 분이에요. 저도 이번에 지인 소개로 알게 된 분인데, 어머···.”
“···?”
“벌써 오셨네?”
그녀의 시선이 내가 아닌 뒤쪽을 향했다.
돌아보니 앳되어 보이는 아담한 여자가 서 있었다. 파자마 차림으로. 앞머릴 파바박 흩트리며.
“저분이세요. 아직 40분이나 남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파자마 차림의 여자가 민망한 듯 쭈뼛거리며 입을 연다.
“그, 그. 전 저쪽 구석에 앉아있을게요. 말씀마저 나누세요.”
가녀린 목소리. 그 순간 풍성해지는 귓가.
멜로디다···!
김혜령이 난처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내가 괜찮다며 웃었다.
“저도 바로 약속 있잖아요.”
“아 맞다! 사촌 동생이랑 데이트 있으시다고 했었죠?”
“데이트는 아니지만 어쨌든.”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돌리자 구석 소파에 앉아 눈치를 보는 여자가 보였다.
재즈 뮤지션이라고 했었지. 그것도 멜로디가 들리는···.
여자에게 작게 목인사를 하자 그녀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김혜령에게 말했다.
“또 연락드릴게요.”
빠른 시일 내에.
#“10위에요, 10위!”
빵 터진 얼굴로 들어온 직원에게 모두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하핫! 빌 앨런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 10위래요!”
“······.”
삽시간에 눈들이 흉흉해진다.
“이 정도면 사내 폭력이 합법이지 않을까요?”
“저는 충분히 괜찮다고 봅니다.”
“여긴 기획사니까 비명소리도 발성연습인 줄 알겠네요. 범죄에 최적이네.”
직원이 막 불판에 올린 오징어처럼 움츠러들며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조용히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대던 김지희가 얼른 튠즈 실시간 차트를 확인했다.
37위.
무려 일주 일만에 이룬 쾌거다.
튠즈 역사상 가장 빠른 등반이라며 해외에서도 많은 기사가 올라왔고, 그건 아직 듣지 않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몰려들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게 순위는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직원 사무실은 더 이상 보글보글 끓지 않았다. 이젠 거대한 화로에 집어넣은 듯 살벌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진한 기대감이 졸여지고 졸여진다.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난리네요.”
“브랜 SNS에 브 대표라면서 하트가 엄청 달렸네요.”
“론 트위터는 더 해요. 피디님을 추천한 앤 한테도 마찬가지고요. 풉, 앤 서방 뭐야.”
“뮤튜브에 피디님 곡 리액션 영상이 계속 올라와요! 댓글 장난 아닌데요?”
“색안경 끼고 봐서 미안하다는 댓글을 보는데 나 왜 눈물 날 것 같냐···.”
“실제로 클럽에서 리믹스된 버전을 DJ들이 틀고 있대요. 반응도 엄청 좋고요. 평론가들은 곡을 칵테일에 비유하고 피디님을 바텐더라고 하던데요? 완벽한 믹스매치였다고.”
이에 잠자코 듣고 있던 김지희가 피식 웃었다.
“칵테일? 피디님은 비빔밥이라고 하시던데.”
그때였다.
사무실로 들어오며 사내 폭력을 조장한 직원이 ‘헙’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지, 진짜 10위네.”
“뭐! 또 이번엔 어떤 순위인데?”
옆에서 으르렁대는 동료 직원을 향해 대답했다.
“빌보드 장르별 차트 10위···.”
“무, 뭐?”
순식간에 사무실 안은 키보드 소리로 분주해졌다.
“···정말이네?”
빌보드 장르별 차트 10위에 빌 앨런의 곡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붉은 화살표를 반짝이며.
“잠깐만요. 장르별 차트가 10위면, 설마···!”
김지희가 서둘러 다른 탭을 클릭했다.
“60위······.”
싱글차트 HOT 100.
빌보드 차트 중 가장 메인 차트인 그곳에도 빌 앨런의 이름이 따끈따끈하게 'new'라고 점멸하며 올라와 있었다.
무려 60위로 진입해서.
“피, 피디님, 언제 오시지?”
“오늘 밖에서 약속이 줄줄이라고 하셨는데.”
“오전에 김 감독님 잠깐 만나고, 사촌 동생이랑 점심 드신다고!”
“그럼 전화로···!”
김지희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제가 걸고 있어요!”
#김지희에게 빌보드 차트 소식을 듣고서 한참을 차에 있었다. 기어봉에 손을 얹은 채.
빌보드라니. 그것도 HOT 100.
얼떨떨하다.
이게 정말 얼마나 큰일인지 감이 안 잡혀.
누군가는 평생을 가야 한 번 들어가기 힘든 자리. 뮤지션에게나 프로듀서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래. 그만큼 엄청난 일을······.
이룬 거다. 심지어 멜로디도 없이.
‘물론 턴투더 레이블과 미국인 뮤지션이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럼에도 어떤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솔직히 정말 가능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내 뮤지션. 그리고 내 곡으로도···!’
기대감을 과다복용한 심장이 진정되기까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수많은 전화를 받았다. 때론 미치겠다며 진심을 말하고, 때론 실없는 농담을 해댔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다음 약속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내가 오빠 회사로 가도 되는데.”
“과제 많다며. 여기서 청담 멀어.”
“그래도···.”
미안한 표정을 짓던 장은혜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그나마 사람이 없는 구석진 자리였는데도 몇몇 테이블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선글라스라도 써야 하는 거 아냐?”
“실내에서?”
“왜 그래, 미국 진출까지 하신 분이. 선글라스는 패션이지.”
“그래도 실내는 좀···.”
연예인도 아닌데, 너무 연예인인 척하는 것 같단 말이지.
이윽고 식전 빵이 나왔다. 노르스름하게 갈릭이 발라진.
“오빠도 먹어.”
“너 먹어. 빵은 카페에서 먹고 왔어.”
“그럼······음, 존맛!”
주먹을 파르르 떨던 장은혜가 짐짓 입가를 정리하며 말했다.
“맞다, 오빠 축하해! 나도 만나기 직전에 기사 봤어. 빌보드 차트 10위라며!”
“그게···.”
“아냐?”
“맞긴 한데.”
우리나라 기자들이 그런 거로 낚시를 자주 한다. 빌보드가 가진 차트만 백 개가 넘는데, 그중 하나만 순위권에 들면 무슨 HOT 100이나 TOP 200 차트 인양 떠들어대지.
“10위는 장르별 차트고, 가장 높은 차트에선 60위.”
차근차근 설명하자 장은혜가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아. 그게 또 그런 게 있어? 그래도 대단한 거 아냐?”
“그치. 대단한 거지.”
여전히 떠올릴 때마다 두근거린다. 빌보드 HOT 100.
“역시······오빠네.”
장은혜가 빵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엄마는 항상 오빨 걱정했거든? 예체능으로 먹고살기가 얼마나 어렵냐면서. 근데 난 항상 부러웠다? 대단하게 보이고.”
“그래?”
“응. 그때 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선생님이 좋다는 곳으로···.”
장은혜의 고개가 점점 처진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고민했다.
이미 김지희를 비롯한 직원들, 그리고 혹시나 해서 TKM의 디자이너들에게도 물어봤다.
그럼에도, 쉽지 않다. 내 말 한마디가 장은혜에게 큰 영향을 미칠 테니까. 꿈을 좇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불행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장은혜가 우물쭈물하더니 만나는 순간부터 묻고 싶었을 질문을 슬그머니 흘린다.
“···물어본 건 뭐래? 다들 별로라지?”
그치만. 그럼에도···.
“아니.”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사는 건, 그것대로 불행할 테니까. 지금은 용기를 주고 싶었다.
“괜찮대.”
“···어? 정말?”
“아니 거짓말.”
장은혜의 동공이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튄다.
“괜찮은 게 아니라 엄청 좋대.”
“저, 저엉말?!”
“TKM의 디자이너들까지도 다들 그러더라고. 재능있다고. 내 사촌 동생이란 얘기도 안 했어. 오히려 말리고 싶다고 물어봤더니 그러더라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제대로 얼어붙은 장은혜.
나는 씩 웃어주며 말했다.
“조만간 보닝레코즈라는 기획사에서 공모전을 연대. 시각 디자인 콘테스트라는데, 1등에 인턴 채용 조항도 있다니까 한 번 지원해봐.”
마침 파스타 두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장은혜도 마음이 진정 되었는지 입꼬리 한껏 올리며 포크를 집었다. 파스타를 돌돌 말아 한입에 넣는다. 그리고 양 볼이 늘어진 채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
“그러게. 파스타 맛집이네, 여기.”
그렇게 정신없이 면을 흡입하다가 장은혜가 툭 말했다.
“열심히 해볼게.”
“그려.”
작은 엄마한테 혼나겠는걸.
정 안되면 내 앨범 자켓 전속 디자이너로라도 고용하지, 뭐.
접시를 싹싹 긁어먹었다. 깨끗해진 접시를 보며 빵 먹은 거 맞냐고 웃던 장은혜가 불쑥 물었다.
“그럼 이제 뭐 해? 크게 성공도 했겠다. 막 모히토가서 몰디브 한잔하고, 거기서 막 빵댕이 흔들고 놀고···.”
“흔들긴 뭘 흔들어. 나 직장인이나 마찬가지야.”
“에에, 뭔 대표가 그러냐. 그럼, 이제 다시 일하는 거야? 곧바로?”
일? 그래, 일······.
심장은 빌보드가 펌프질하고,
머릿속은 멜로디가 팽팽 돌고 있다.
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어. 해야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