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해야 할 일, 와야 할 결과 (2)
자세는 익숙한데, 풍경은 낯설다.
아더 레이블의 녹음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조도는 좀 더 어두운 것 같고, 룸 시스템은 공을 많이 들인 듯 정교해 보였다. 녹음실의 크기도 두 배쯤 큰 것 같고.
옆에는 최 기사 대신 현지 엔니지어가 앉아 있다. 그와는 30분 전에 미리 만나 그동안 준비해온 녹음 계획을 크로스 체크 했었지.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고······.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두툼하게 쌓인 악보.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득 채워온 메모들.
초반엔 나름 엔지니어에게 보여줘 보겠다고 영어로 적다가 포기하고 한글로 바꾼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결국,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말로 설명해야 했었지.’
유리 너머 방음 부스엔 빌 앨런이 가사지를 손에 들고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축 내려간 뿔테 안경과 둥그스름한 얼굴. 전형적인 공대 형의 표정으로 펜을 움직이니 무슨 수학 공식이라도 적고 있을 것 같다.
‘묘하네.’
몇 개월 전만 해도 코첼라에서 가슴 벅 차는 시간을 보냈던 미국에서.
이번엔 녹음실에 앉아 녹음을 준비하고 있다.
비슷한 느낌이 독에 물 붓듯 벅차오른다.
그땐 내 뮤지션이 평가받는 자리였고.
이번엔 곧 내 곡이 평가받게 되겠지.
차이점이 있다면 미래를 전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기대감이랄까.
편곡은 이미 끝났고. 녹음이 필요한 악기들도 모두 받아져 있다. 당장 한 치 앞이 불확실한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저 공대 형의 한계를 끌어올려 트랙에 담아내는 건데······.’
그 방법을 위해 호텔 방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가창자의 최대치를 녹음하는 것.
그게 녹음실에서의 프로듀서의 역할이니까.
나는 그동안 작곡뿐만 아니라 이런 부분에서도 멜로디의 도움을 받아왔었다.
디렉이 자유로웠지.
내가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해도 상대가 성장할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빌은 달랐다.
멜로디도 무슨 무슨 국적 제한이라도 걸려있는지, 아니면 휴가라도 갔는지 전혀 안 들렸다.
지난번 최정아 작업과 비교해도 또 다르다. 그녀는 이미 멜로디가 두 개나 들렸던, 꾸준히 성장 중인 뮤지션이니까.
비약적인 성장도 없고, 문화도 다르며, 언어까지 다른. 저 공대 형의 한계를 오롯이 내 힘으로 끌어내야 했다.
녹음 시작 직전까지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었지.
“시작할까요?”
-네, 그러죠.
그의 말을 들은 엔지니어가 준비를 마쳤다. 메트로놈이 들어가며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몽글지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 영어 발음 특성상 끊어짐 없이 물 흐르듯 흘렀다. 거기에 서구권 특유의 발성과 쇳소리까지. 새삼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상기하게 되는 노래였다.
‘시도하길 잘했지.’
저런 목소리를 두고 그저 브랜의 결정에 따랐다면···
후회했을 거다, 분명.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만히 듣다가 문득 스치는 장면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
손을 들어 녹음을 끊었다.
빌이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날 본다.
“그···언제지. 3년 전쯤 영상에서요. 데미안 라이스의 Cannonball 커버 영상이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에선 거기서 냈던 목소리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
빌은 눈을 끔뻑였다. 다음은 살짝 놀란 듯 커지고. 오묘해진 표정으로 날 본다. 그 스펙트럼을 지켜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너무······오래전 얘긴가?”
-아뇨. 기억해요.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웅얼거리듯 대답하는 빌.
“그때 느낌으로 가능할까요? 아무래도 이 곡은 팝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다 보니 자연스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맞아요. 목소리가 묻힐까 봐···.
“이해해요. 근데 그럴 필요 없거든요.”
내가 말했다.
“애초에 빌의 목소리를 염두 하고 만든 거라서.”
빌이 빤히 날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꼬릴 올렸다.
스윽. 그가 검지로 안경을 끌어 올리며 끄덕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해보죠.
나도 끄덕이며 다시 집중했다.
이윽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머릿속에 그린 그대로였다. 그리고 확실히 이쪽이 더 좋았다.
“더 괜찮죠?”
내가 돌아보며 묻자, 엔지니어는 벙찐 표정으로 끄덕일 뿐이었다.
#녹음실에서 작곡가의 역할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무랄 데 없는 촘촘한 곡을 만들었더라도, 빈틈이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녹음실이고.
모호했던 곡이 순식간에 수작 이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경우는 흔치 않지만.
앤 더글라스는 그런 점에서 장 프로듀서의 곡을 평가해 보았다.
굉장히 독특하고, 괜찮은 곡이다.
특히 포크 향이 물씬 나는 멜로디와 이를 방해하지 않고 들어오는 플럭한 기계음들의 조화가 뛰어났다.
‘잘 섞었지.’
그런 면에서 장 프로듀서는 좋은 탑 라이너였고, 편곡자였다.
그랬는데······.
‘인상적이군.’
앤이 팔짱을 끼고서 중얼거렸다.
작곡가 말고, 프로듀서로서는 어떤가.
‘어처구니가 없군.’
능력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지금 보여주는 디렉에 대해 말하는 거다.
누가 저런 디렉을 할 수 있을까?
3년 전 영상을 떠올리고 디렉을 한다니.
그것도 유명 뮤지션도 아닌, 무명의 신예를 앞에 두고.
대체 이번에 빌 앨런의 노래를 얼마나 들은 걸까?
얼마나 들으면 순간순간 필요한 영상을 떠올려 그에게 주문할 수 있을까?
모른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지금 알았으니.
확실한 건, 저 한 번의 디렉으로 곡의 정체성을 확실히 잡은 건 물론이고, 뮤지션의 신뢰까지 잡아버렸다는 것.
정말······터무니없는, 프로듀서 아닌가.
앤은 헛웃음을 집어삼키며 녹음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라운지로 향하자 검은 반소매에 검은 스키니진을 입은 론 스미스가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여!”
“트위터 중독자.”
“중독자라니, 인플루언서라고 해줄래?”
“그거나, 그거나. 그래서 회사엔 무슨 일이야?”
“앨범 나왔길래, 축하할 겸. 잠시 도망도 칠 겸.”
“왜 안나가 또 난리야?”
“내가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했거든.”
“······니가 할 소리냐?”
“뭐, 내가 노래 부르나?”
그 말을 들은 앤이 낄낄댔고, 론도 마주 웃다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근데 연락 한지가 언젠데 이제 나와?”
“더 있고 싶은 걸 너 때문에 나온 거야.”
“뭔데? 안에 누가 작업 중인 건데? 렉시드? 밴? 아니면···.”
턴투더 레이블의 유명 뮤지션 이름을 나열하는 론에게 앤이 고갤 저었다.
“신인이야. 네가 알 리 없는······.”
“그래?”
“아, 알 수도 있겠다. 아니, 알겠네.”
“내가 그 신인을?”
“아니?”
앤이 웃으며 말했다.
“프로듀서를.”
#녹음이 끝났다.
지친 얼굴의 빌과 그보다 더 지친 듯한 엔지니어가 보인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인사에 엔지니어가 이마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한국에선 다 그렇게 녹음합니까?”
“제 요구 사항이 너무 많았죠?”
“올해 최악의 프로듀서였습니다.”
하하. 최악까지.
어색하게 웃자 엔지니어가 툭 내뱉었다.
“물론 그런 만큼 결과물은 좋았지만.”
엔지니어와 마주 웃다가 부스에서 나온 빌과도 인사를 했다.
“수고했어요.”
내 인사가 건네지기 무섭게 빌이 은근하게 물어왔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제 영상을 전부 보신 건가요?”
“네.”
그것도 몇 번씩 반복해서.
“왜···죠?”
“왜긴요. 곡 잘 만들어서 턴투더 레이블하고 작업 해보고 싶어서죠.”
“아···?”
“라고 말하면 참 정상인처럼 보일 텐데. 그쵸?”
“······.”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그러지 않았지. 턴투더 레이블의 요구를 거절했었잖아?’라는 뉘앙스로.
“바다 건너 생면부지의 뮤지션과 작업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건데, 당연히 영상이 있다면 확인해야죠. 내가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람인지.”
가장 정직한 기록이었다.
그가 어떤 노랠 하는지.
어떤 식으로 노랠 부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그 영상을 모두 보았을 때쯤엔 이 작업을 반드시 해야겠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빌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대표님이 저보고 괴짜라고 그러던데, 프로듀서님이야말로 괴짜네요.”
“칭찬인가요?”
“한국에선 그런가요?”
“그럴 리가요.”
고갤 젓자 빌이 피식 웃었다.
나는 악보를 챙겼다. 이제 후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할 차례였다.
녹음실 문을 열고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려는데, 안쪽 라운지에서 앤이 우렁찬 목소리로 날 불렀다.
“장 프로듀서!”
돌아보니 웬 백인 남자와 함께였다.
다가서며 계속 생각했다.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이쪽은······.”
앤이 남자를 소개하려는데,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손을 건넸다. 뭐랄까. 포즈는 예의를 차렸는데, 눈빛은 무슨 오랜 친우를 만난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반갑습니다. 론입니다. 론 스미스.”
빌보드를 휩쓸었던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이자, 트위터를 통해 플로라, 하서윤, 최정아를 언급했던 그가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말했다.
“그동안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습니다!”
나한테···?
#“그, 그래서요? 론 스미스가 피디님께 뭐라고···아, 잠시만요. 카메라 좀 세팅하고요.”
LA 시내의 한 펍에서 김혜령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다리가 홱홱 휘는 관절 삼각대로 세워두고 재촉했다.
“이제 됐어요. 피디님 얘기하셔도 돼요.”
“아······그리고는 그냥 음악적인 얘길 했어요. 정아에게 줬던 곡의 편곡에 대한 얘기도 하고, 플로라와 하서윤 씨에게 줬던 곡의 사운드 메이킹에 대한 생각도 좀 나눴어요.”
질문 세례가 쏟아졌단 얘긴 하지 않았다.
영상에서 너무 거드름 피는 것처럼 비춰질까 봐. 아직도 안 믿기기도 하고.
“와···.”
이것만으로도 김혜령은 감탄했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이 만든 곡들을 주제로 론 스미스와 얘길 하게 되었다면.
“그걸 찍었어야 했는데···!”
김혜령이 분한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의 오디오가 빈틈을 타 다큐멘터리 팀 막내인 청년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다큐가 방영되면 사람들 아주 난리 나겠어요!”
“암, 난리 나야지. 이런 소재들로 화제를 못 끌면 우린 다큐 접어야 하는 거거든.”
중년 남자와 청년이 맥주잔을 부딪쳤다. 그 새 한 잔을 비운 김혜령이 얼른 다음 잔을 시켰고. 나 또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결과를 기대하며 콜라를 마셨다.
나만 콜라인 게 아쉽지만, 아직 후 작업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잔에 채워진 콜라와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입이 마를 새가 없이.
다음날, 곧바로 시작된 후 작업.
턴투더 레이블 내의 믹싱팀이 움직였다.
그들은 내 의견을 전달받고는 빠르게 완성된 결과물을 들려주었다. 거기에 다시 피드백하니 척척 바뀌어 돌아온다.
내가 바란 믹싱팀의 모습이었다. 주기훈을 비롯한 젊은 엔지니어들이 모인 아더 레이블의 믹싱팀의 미래.
‘머지않았지.’
주대철이 아주 들들 볶고 있으니까.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나는, 불안감을 모두 비우고 기대감을 채웠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킬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음원 발표까지 3일.
우리는 조금 일찍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