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102화 (102/221)

102. 해야 할 일, 와야 할 결과 (1)

“느낌이 저번에 가셨을 때완 많이 다르시겠어요.”

김지희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사뭇 다르다.

레드리시 때문에 턴투더 레이블을 방문했을 땐, 사실 내 일이랄 게 없었지. 얼떨결에 브랜과 미국 시장에 관한 얘길 나누고, 힌트를 주고, 그러다 골든 보이스의 폴을 만나기까지 했지만···.

당시 대표도 아니었던 나에겐 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히 내 일을 하러 가는 거다. 그것도 프로듀서로서 해외 뮤지션에게 곡을 주는, 결코 흔치 않은 일.

“그러네요.”

그땐 레드리시에 대한 믿음으로 기대감이 가득 충전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조금 긴장한 것 같네.’

자신감을 갖자고 스스로 말했지만, 아무래도 미래에서 보고 온 것과 아닌 건 차이가 날 수밖에.

하긴, 미래엔···.

‘내 곡이 성공했던 적이 아예 없었지.’

작게 웃는데, 홍보담당자 주재윤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슬슬 흘려볼까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도록?”

시선이 모이자 말을 이어가는 주재윤.

“처음엔 ‘기로 프로듀서가, 해외 유명 레이블에 곡을 심사받게 된다.’부터 시작하죠.”

잠자코 듣던 한 직원이 의아해했다.

“왜요? 이미 심사가 의미 없어졌잖아요? 바로 가서 작업하시는 거 아닌가?”

“그래야, 심사를 통과했다는 보도자료를 낼 수 있으니까요.”

“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요구르트 몇 개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밑에서 기다릴 다큐멘터리 팀에게 주기 위해서.

그때였다. 여직원이 불쑥 물은 것은.

“그럼 피디님 이번 곡, 빌보드 차트에 들 가능성도 있는 거네요?”

“···.”

“···.”

“···.”

김지희도, 주재윤도, 그 밖의 직원들도.

순간 할 말을 집어삼킨 표정이었다.

하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오만가지 생각들을 밀어내고, 가장 큰 놈이 똬리를 틀어버렸다.

*짧은 회의로 가기 전 확인이 필요한 것들을 마치고, 인사를 나눈 후 사무실을 나섰다.

대뜸 카메라들이 보인다. 여러 각도에서 날 찍고 있는.

“······.”

“그렇게 굳으실 필요 없어요.”

김혜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아는데도 안 되네요.”

“에이, 방송 출연도 많이 하셨으면서.”

“대부분 앉아있었죠. 심사위원석이나, 패널 석에.”

수없이 걸어 다녔는데, 이 순간 내가 걷는 게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마치 갑자기 내 혀 위치가 헷갈리는 것처럼.

새삼 연기까지 하는 박경호가 대단하게 느껴지는걸.

우리는 곧 모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할 때쯤이 되자, 내 핸드폰에 여러 메시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채연주를 비롯한 아는 기자들부터 시작이었다. 주재윤이 정보를 흘리기 시작한 거겠지.

신기한 건.

“네, 여보세요? 네, 문 피디님. 어쩐 일이세요?”

김혜령의 핸드폰으로도 그 불이 옮겨붙었다는 것.

“갑자기요? 다큐멘터리 출연해주시겠다고요? 아···근데 이걸 어쩌죠. 지금은 저희 쪽에서 좀 힘들 것 같아요. 에이, 삐졌다뇨. 그런 게 아니라 저희가 지금 공항 가는 중이거든요. 네 맞아요. 기로 프로듀서님 따라 미국 갑니다. 미국.”

김혜령이 산뜻하게 말했다. 팀원들에게 들으란 듯이 또박또박. 팀원들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다.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시 울렸다.

“이, 이번엔 TBC 피디님이야.”

“설마···!”

“얼른, 얼른 받아봐요.”

목소릴 가다듬은 김혜령이 통화를 시작했다.

“어머, 피디님 무슨 일이세요? 정말요? TBC에서 편성 관련해서 미팅이요? 일단 저희 촬영 일정이 있어서 그것만 마치고 오면 연락드릴게요. 네, 네.”

결국, 비행기에 타 전화를 못 하게 되는 시점까지.

김혜령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장장 13시간의 비행 끝에 LA에 도착한 건, 오후 9시쯤.

익숙한 얼굴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지난번 LA에 왔을 때도 마중 나왔고, 그보다 이전엔 앤 더글라스 내한 때도 보았던 한국말을 꽤 할 줄 아는 직원.

그와 인사를 나누고 밴 위로 올라탔다.

턴투더 레이블이 있는 LA 도심으로 향하며 다큐멘터리 팀은 잠시도 눈을 쉬지 않았다.

영상에 쓰일 컷을 구상하며 저들끼리 촬영 계획을 세웠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 한 대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레드리시가 있었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아쉽네요.”

직원이 서투른 한국말로 말했다.

그들은 지금 미국 반대쪽에 있었다. 동부. 거기서 골든 보이스 주관의 슈퍼 콘서트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쟁쟁한 팀들과 함께.

거기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레드리시의 이름 크기가 좀 더 커졌더라. 아직 헤드라이너가 되기엔 멀었지만, 지금의 성장 속도라면 예정된 미래보다 몇 년은 더 빠르리라.

“아쉽긴 하지만, 동시에 뿌듯하기도 하네요.”

“하긴, 바쁜 게 좋은 거죠. 그리고 지난번 콘서트 때 저도 갔었는데 레드리시 나오니까 사람들 환호성이······.”

레드리시에 대한 근황을 들으며 기분 좋게 회색빛 도시 속으로 들어갔다.

턴투더 레이블이 있는 건물 앞에 내려 김혜령에게 말했다.

“전 여기 대표님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저희는 이 주변을 영상에 담고 있을게요.”

“네, 얘기 끝나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그들이 영상 사냥에 나서는 동안, 나는 곧바로 브랜을 만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브랜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맞이했다.

대중음악 시장, 그 자체라고 봐도 되는 미국에서 국외 프로듀서를 쓰는 선택을 한 그는 초연했다. 내가 빌 앨런의 마음을 돌렸으니 당연하다는 반응.

그렇게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가 일정을 확인했다.

9월 둘째 주.

그날 곡을 발매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서, 나는 지금 다큐멘터리 팀과 라운지에 앉아있다.

빌 앨런과 함께.

노란 머리카락, 둥그런 얼굴, 얼굴의 상당 부분을 덮는 뿔테 안경. 곡 작업을 위해 영상으로 수없이 보고 들었던 빌 앨런이었다.

“이러면 저 한국 티비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는 건가요?”

그가 카메라를 설치하는 김혜령과 팀원들을 보며 신기한 듯 물었다.

“그렇겠죠?”

“신기한 일이네요.”

푸스스 웃는 빌.

다큐멘터리 팀의 준비가 끝나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빌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포크를 하고 싶어 하셨다고요.”

빌이 웃으며 끄덕였다.

“맞아요. 근데, 이렇게 설득당해서 앉아있죠.”

설득이라···.

한국에서부터 궁금했던 게 밀려 올라온다.

멜로디와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크. 거기에 집중하여 만든 장르의 믹스매치가 그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

“포크에 대해 꽤 잘 이해하신 것 같았어요.”

빌 앨런이 말했다.

“좀 놀랐죠. 악기가 많아져도 이런 식이면 충분히 멜로디에 집중할 수 있구나, 편곡이 엄청나다 싶었어요. 근데···.”

그래서가 아니라 근데?

“그래도 포크는 아니었죠.”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의아해졌다.

그럼 왜 결정을 바꾼 거지?

“제가 생각을 바꾼 건 순전히 멜로디 때문이었어요.”

“멜로디요?”

“네, 멜로디가 좋아서. 아니 뭐랄까. 탐나서? 그래서 포크가 아닌데도 해야겠더라고요. 정말 이상한 일이죠. 포크가 아니면 그 어떤 노래도 부르기 싫었는데.”

나는 빌 앨런의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참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저 표정을 어디서 내가 봤을까···?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이 멜로디를 안 부르면.”

그래, 꼭······.

자신의 멜로디를 들은 뮤지션의 표정 같았다.

*빌이 떠나고서,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정말 닮아가고 있는 건가···?’

내가 만든 멜로디가, 들려오는 멜로디를?

확실한 건 아니다. 이번 한 번으로 그렇게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지. 물론 기회가 될 때 확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은······.

“피디님? 괜찮으세요?”

생각에 빠져있는 날 김혜령이 건져냈다.

옆에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그래, 인터뷰 중이었지.

“아, 네. 미안해요. 뭐라고 하셨죠?”

김혜령이 정신 차린 날 보며 안심한 듯 웃었다.

“일정이요. 작업이 얼마나 걸릴 것 같으신지.”

“아, 우선 빌 앨런의 기사가 완성되고, 연습이 충분히 되면 곧바로 녹음에 들어갈 거고요. 그게 끝나면 현지의 엔지니어들에게 후작업이 맡겨지겠죠.”

내 말에 김혜령이 자신이 알고 있는 말들로 덧붙였다.

”9월 둘째 주에 곡을 올리는 게 목표니까. 최소 그 전주에는 완성본이 나와야겠네요?”

“그렇죠.”

인터뷰가 진행되는 사이, 잠깐 몰아쳤던 소나기가 그쳤다. 하늘이 맑아지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졌으니, 또 영상 사냥에 나서야겠네요.”

“전 숙소에서 녹음 준비를 하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중년 남자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피디님,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 네. 말씀하세요.”

“그럼 이번 곡, 빌보드에 오를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빌보드···.

출발하기 전에도 사무실 직원들과 이에 관한 얘길 했었지. 그때부터였을 거다. 아지랑이처럼 남아서 계속 떠오른 게.

“힘들겠죠. 장르별 차트에만 들려 해도 빌보드 측에서 따지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하물며 그 위로는 언감생심이다.

라디오 송출 횟수와 앨범 판매 횟수 등을 채울 방법이 없기에. 신인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판이지.

‘그렇다고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그렇군요. 제가 잘 몰라서,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건 아니고요.”

멜로디가 들린 것도 아니다.

그저 앞으로 곧 이런 류의 노래들이 유행한다는 기억과 오로지 내 실력만으로 만든 노래다.

자신은 있었지만, 글쎄. 막상 무대가 미국으로 확 커지면서 솔직히 그 자신감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럴 땐······.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야지.’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결국 와야 할 결과가 올 거다.

그게 그저 나란 프로듀서의 초라한 미국 데뷔든.

혹은 화제성 있는 신고식이든.

아니면, 더 큰 무언가이든 말이다.

#“로드링 레코드부터 들리는 건가?”

“네, 대표님.”

“앤의 공연 티켓 판매량이나 앨범 판매량은 크게 걱정 없는데, 문제는 라디오 송출 횟수군.”

“각종 라디오 게시판에 앤의 노랠 틀어달라는 반응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

“네, 아마 이번 주가 지나면 HOT 100에도 이름을 올릴 것 같습니다.”

“이번엔 20위를 넘겼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브랜이 로비를 나서며 입술을 질겅거렸다.

“가능할 겁니다. 평론가들의 반응도 정말 좋으니까요. 특히 이번 앨범의 전체적인 리듬이 기존 앤 더글라스와 크게 다르다면서, 큰 발전이라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봤어. 전문가들 사이에서 베이시스트에 대한 얘기도 자주 나오는 것 같더군. 윤···윤테이···.”

“윤태영이요.”

“에잇.”

미간을 구긴 브랜의 시야에 회전문을 통과해 로비로 들어오는 백인 남자가 눈에 잡혔다.

“론?”

론 스미스도 브랜을 확인하곤 웃으며 다가왔다.

“앤 보러 왔어?”

“응. 앨범도 나왔으니, 축하 인사나 할 겸.”

브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도 가까우면서 굳이 왜 회사로 찾아오나?”

“에이, 내가 어디 소속된 프로듀서도 아닌데 왜 이리 야박해. 그리고 지금 나한테 집 가까운 건 의미가 없어.”

론이 과장되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브랜을 보았다.

“못 들었어? 내가 안나 샤피로 앨범 작업 중인 거?”

“아······.”

안나 샤피로는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프로듀서가 기피하는 뮤지션 차트를 만든다면 HOT 10안에는 반드시 든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겨우겨우 짬내서 온 거니까. 더 이상 구박 말아줘.”

“뭐······난 미팅이 있어서.”

“그래. 앤은 8층에 있지?”

“아, 지금 3층 녹음실로 갔을 거야.”

“뭘 또 녹음하는 거야? 쉬질 않는구만.”

“아니. 구경 갔어, 구경.”

브랜의 말에 론의 표정이 벙쪘다.

“앤이 자기 녹음도 아닌데 구경을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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