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맞물리는 일들 (2)
<색다른 도전> 녹화가 끝났다.
출연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녹화장이 부산스러워졌다.
스태프들 틈바구니를 지나쳐 대기실로 가려는데, 몇 발자국 뗄 때마다 내 앞으로 사람들이 나타난다. 같이 방송을 녹화한 패널들도 있었고, 그들의 매니저들도 있었다.
그들은 현재 최정아의 상황을 치켜세우며 자연스럽게 원하는 바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곡을 달라거나. 곡을 달라거나. 곡을 달라는 것······.
TKM 소속 프로듀서여도 이해관계만 잘 맞는다면 다른 소속사에 곡 주는 게 가능하다. 하물며 독립 레이블이기까지 하니 그들의 제안도 꽤나 저돌적이었다.
이들에겐 아더 레이블에 연락해서 어쩌구 할 시간도,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애초에 이 바닥이 절차보단 면대면이 확실하니까.
그중 몇몇은 하소연하듯 말하는 매니저들도 있었다.
“피디님. 정말 남는 곡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쓰셨던 곡 중에서 적당히 아무거나 주셔도 되니까···.”
“피디님 곡 받아오라고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미치겠습니다. 들들들 볶이고 있어요. 곡 하나 주시면 이 은혜를······.”
뭘 은혜까지.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 같네요.”
“저흰 진짜 습작이라도 괜찮습니다!”
습작이라면 많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습곡을 팔 생각도 없을뿐더러, 내 곡을 무슨 동네 노점상처럼 건네기도 싫었다.
“피디님, 사람 한 번 살리는 셈 치시고···.”
아무래도 사람 살리는 영웅이 되긴 글렀지.
“죄송합니다.”
“그, 그럼 잠깐 잠깐 틈을 내셔서 탑 라인만이라도···!”
“제가 바로 다음 작업이 잡혀서요. 죄송합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것 같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에 들어가며 한숨을 돌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헤쳐온 매니저들보단 좀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피디님, 안녕하십니까. 지선주의 매니저 임기태라고 합니다. 그냥 임 실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네.”
떨떠름하게 받자, 임 실장이 웃음을 흘려댄다.
“걸음이 많이 빠르시네요.”
“그런 얘긴 자주 듣는 편이긴 하죠.”
오면서 여러 허들을 넘어서 그런가, 자연스레 삐딱하게 말이 나갔다.
“하하, 이해합니다. 워낙 바쁘신 분이시니까요. 혹시···시간 괜찮으시면 얘길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자 임 실장이 얼른 말해왔다.
“시간 오래 안 뺐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있나.
“···네. 알겠습니다.”
대기실에서 때아닌 미팅을 하게 생겼다.
지선주라면 남자 솔로 가수로선 탑급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다. 원한다면 충분히 프로듀서를 골라서 앨범을 만들 수 있을 정도.
그래서인가. 임 실장의 표정은 꽤나 여유로웠다.
“곡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그가 씩 웃으며 용건을 펼쳤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오면서 해왔던 얘길 또 해야 했고.
“제가 곧바로 다음 작업이 잡혀서 아직은 여유가 없을 것 같네요.”
“선주 정도면 피디님 성에 찰 겁니다. 충분히요. 아까 그들하곤 급이 다르니까요.”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리로 오면서 받았던 러브콜들이 전부 내 기준에 못 미쳐서 까인 거로. 그리고 지선주 정도면 내가 원하는 기준에 맞을 거라고.
“선주가 피디님의 곡을 엄청 좋아합니다. 자기 입으로도 팬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요. 게다가······.”
내 입에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아뇨. 정말 시간이 안 돼서 그러는 겁니다. 당장 곡을 넘기기로 한 곳이 있어서요.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자 임 실장의 표정이 살짝 삐끗거렸다.
그렇게 싱글거리더니, 완고히 거절하니 불편해진 모양이네.
“피디님이 조정해주시는 건 좀 어렵겠죠?”
“······.”
“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느물거리며 설명하는데, 가만 들어보니 그런 뜻이 맞구만, 뭘.
무려 지선주이다. 이 기회 잘 살리고, 피디님이 스케줄 조정 좀 해봐라.
뭐 이런 거.
나는 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어려울 것 같네요. 아더 레이블의 자체적인 일이 아니라 다른 회사와 약속한 일이라서요.”
이쯤 되니, 임 실장도 이게 안 먹힌다는 걸 깨달은 듯 목소리에 힘을 뺐다.
“아, 그러세요? 거 참. 어느 회사가 피디님한테 선수를 쳤는지···부럽네요, 하하.”
살짝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어떤 회사인지 두고 보겠다, 식의 말투였다. 알면 놀랄 텐데 말이지.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시간이 아까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는 다시 싱글거리는 얼굴로 날 배웅했다.
이 양반아 거기 내 대기실이었어.
그대로 나와 복도를 걸었다. 마침, 맞은 편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선주였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네. 안녕하세요.”
당연히 내가 뭔갈 더 얘기할 줄 알았는지 지선주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피디님이 어떤 노랠 주실지 너무 기대되네요. 하하하.”
“······.”
“······?”
이건 무슨 코디미냐.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기대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자세한 얘긴 매니저분께 들으시면 될 것 같고······.”
매니저나 연예인이나 김칫국 마시는 게 5G급이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당황하는 지선주를 뒤로하고, 그대로 복도를 걸어 나왔다.
멜로디도 안 들려.
뭔가 멱살을 잡아끄는 느낌도 안 와.
받들라는 듯한 태도도 불편해.
이건 시간이 여유롭다 못해 넘쳐난다 해도,
할 이유가 전혀 없지.
#같은 시각, 브랜은 날카로운 눈으로 앞에 앉은 남자를 보고 있었다.
노란 머리, 큼지막한 뿔테 안경, 도톰하게 오른 볼살. 브랜이 앤에게 확인했던 뮤튜브 속 남자였다.
브랜의 눈길에 찔끔한 남자는 바짝 긴장한 채로 시선을 떨궜다.
“부푼 꿈을 가지고 온 건 안타깝지만, 분명하게 말할게요. 인지도가 쌓이기 전까진 무조건 팝이어야 해요.”
“······.”
남자가 고민하듯 카펫 위로 눈알을 굴렸다. 아주 정신없이.
“그 이후에 당신이 포크를 하는 건 안 말립니다. 유명해지면 뭘 해도 좋아요. 앤처럼.”
여전히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브랜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기도 했다. 자연스레 짜증이 묻어났다.
“내가 직접 당신에게 연락한 건, 어떤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고.”
직원들이 바빠서도 있지만.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알고 있지 않아요?”
“알아요.”
“그런데?”
“언제 성공할지도 모르는 길을 위해 하고 싶은 음악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서요.”
너드(Nerd)다.
그것도 매우 멍청하고, 괴짜인.
이런 자들은 생각이 평범하지 않다.
앤 더글라스를 키워낸 턴투더 레이블이다.
규모가 엄청나진 않지만, 소속 뮤지션들의 면면만 보면 언제든 빌보드를 들썩이게 할 수 있는 레이블.
그런데 이 너드는 계산이 안 되는 거다. 여기서 몇 번만 앨범을 내면, 자신이 하고픈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걸. 아니, 계산이 되도 하기 싫은 거다. 하기 싫은 건 죽어도 못 견디는 부류니까.
‘시간 낭비만 했군.’
그걸로 미팅을 종료했다.
그의 실력이 아깝지만, 거기에 매달릴 정도로 브랜은 한가하지 않았다. 뜻이 안 맞는다면, 굳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지.
이러한 얘길 전해 들은 앤 더글라스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브랜의 냉랭한 표정에 대고.
“역시, 영상 볼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난 꼭 네 옛날 모습 같았거든.”
“무슨 소리야, 내가 훨씬 나았지.”
브랜이 고갤 저었다. 앤은 여전히 낄낄거리며 물었다.
“그럼 완전히 포기한 거야?”
“어. 그런 괴짜는 우리 레이블에 너 하나면 충분해.”
“푸흐, 그럼 기로 프로듀서한테도 연락해야 하는 거, 아냐? 곡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
브랜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살짝 벌렸다.
“얘길 해야겠군. 곡 만들 필요 없다고.”
#브랜의 연락을 받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일이 엎어졌다라···.
뮤튜브를 켜 브랜이 말한 남자를 찾았다.
이름은 빌 앨런.
자신의 이름 그대로 영상을 만들어 올리고 있었다. 당연히 조회 수는 자작하게 깔려있었고.
블루투스가 연결된 것을 확인하고, 영상 중 하나를 틀었다.
장르는 포크. 통기타 소리와 함께 미성이 흘러나온다. 외국인들 특유의 쇳소리가 더해져 더욱 유니크하게 들려왔다.
사실 이 영상을 보는 건 두 번째였다.
브랜의 제안을 받고서 한 번.
그리고 브랜이 곡을 만들 필요 없다고 연락을 해온 지금 다시 한번.
그땐 어떤 뮤지션인가 훑어보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확인하고 있었다.
이렇게 흘려보내도 되는 뮤지션인지.
‘아쉬운걸···.’
여러모로 빌 앨런이란 남자를 놓치는 게 아쉬웠다.
처음 영상을 봤을 때부터, 탐이 났었으니까. 재밌겠다는 생각을 욕심으로 바꿨으니까.
그런데, 대중성 때문에 포크는 안 된다라···.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결정이었다.
특히나 새로운 곡들이 홍수처럼 불어나고 있을 빌보드라면 더더욱.
‘대중성 없는 음악은 어렵지.’
반면 이게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 그런 브랜의 제안을 거절한 빌 앨런에게 흥미가 생긴다.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뮤지션이 얼마나 될까? 무명이라면 브랜의 말이 법전처럼 들렸을 만도 한데 말이지.
아무 곡이나 달라는 얘길 듣다가 와서 그런가.
더 끌린다.
곡 하나를 만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그 곡을 누구에게 주느냐가 더 큰 결정이었다.
주인에 따라 곡의 운명이 변할 테니까.
심지어 가창자에 맞춰 곡을 만드는 내 경우엔 더 그렇지. 그런 점에서 빌 앨런과 작업을 하고 싶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다음 영상도, 그 다음 영상도 연달아 보았다.
그렇게 몇 개나 봤을까?
그의 음악이 어떤 걸 지향하는지, 그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주인이 있는 기성곡들을 커버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빌 앨런의 의도는 꽤 선명했다.
고집이 있달까.
‘어쩐다······.’
한참 고민을 하다, 뮤튜브 영상을 껐다. 그리고 곧장 작업실로 향하며 브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브랜. 빌 앨런에 대해 제안을 좀 하고 싶어서요.”
-네···?
대뜸 하는 소리에 브랜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다.
“계속 그의 노랠 들어봤는데, 이렇게 보내기엔 아까운 뮤지션 같아서요.”
-물론 그렇긴 하죠. 앤도 비슷한 소릴 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포크를 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브랜은 빌 앨런에게 포크를 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손해 볼 가능성이 있는 장사가 싫은 거지. 그에게 뮤지션이 빌 앨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자, 그럼 이쪽은 포크는 절대 안 된다.
그런데 가창자는 포크여야 된다.
그러니······.
“이렇게 한번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