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맞물리는 일들 (1)
“며칠 더 있다 가지 그러니. 대표 좋다는 게 뭐야.”
나올 얘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야속하게 흘러간 시간. 누군가 조작하고 있단 의심까지 들 정도다. 못 할 거 없지. 여기 과거로 돌아온 사람도 있는데.
뭐라냐, 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렀다. 단지, 내가 즐거웠을 뿐이다. 아까울 만큼.
서글픈 엄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조만간 또 올게요.”
“티비 보니까 작곡가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런다는데, 건강 꼭 챙겨야 해. 그게 최고다?”
“그럴게요.”
엄마를 토닥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큰 리액션은 없었다. 대신 짧게 묻는다.
“즐겁냐?”
“네.”
“그럼 된 거지.”
환하게 웃는 아버지.
과거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셨던, 하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토목을 하셨던 아버지에게.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즐거우시냐고.
작은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했다.
“다음 달에 엄마랑 여행 다녀오세요.”
“여행? 웬 여행?”
“전에 베트남 가고 싶다고 하셨었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물음에 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비행기···타고 말이냐?”
참 그렇다.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셨는데, 조종은커녕 한 번 타본 적조차 없으시다는 게.
정작 내가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할 땐 바로 그 주말에 시내에서 중고 피아노를 사 오셨었지.
평소였다면 무슨 여행이냐며. 돈 아끼라 말했을 것 같은 엄마도 아버지의 반응을 보며 가만히 웃는다.
아버지는 ‘그럴까?’를 되풀이하며 중언부언했다. 이에 작은 아버지가 거들었다.
“형, 당연히 가야지. 베트남 진짜 좋다니까?”
작은 어머니는 엄마 쪽으로 붙었다.
“형님 진짜 좋으시겠어···. 야, 배워라. 배워.”
“아, 뭘!”
“저런 것 좀 배우라고. 5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너무 다르잖아.”
“아 쫌!”
내가 얼른 말했다.
“제 5년 전을 생각하셔야죠.”
그때의 난······가관이었지.
“···그런가?”
작은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거 알지?”
“네. 보내드릴게요.”
아버지에게 여행 펌프질을 하던 작은 아버지의 눈이 홱 하고 나에게 쏘아진다.
“정말 보낸다고? 그놈 사인 된 브로마이드를?”
“그럼, 기로가 나랑 약속한 건데!”
“······.”
나는 슬쩍 두 사람의 눈빛을 피했다. 장은혜에게로. 녀석이 날 보며 말했다.
“그거, 내가 보내준 거······잘 확인해줘. 나 가능성 있는지.”
“그래. 넌 일단 작은 어머니랑 싸우지 말고 잘 놀다가 올라와. 시간 될 때 회사 앞으로도 놀러 오고.”
“오, 진짜? 진짜 간다?”
“그래.”
오케이, 여기도 끝.
무슨 돌림노래처럼 다시 부모님을 보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가, 가. 해지겠다. 어두워지면 운전 위험해.”
그래도 한 번 더.
인사를 나누고서 차에 올라탔다.
나를 향해 흔드는 다섯 개의 손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엑셀을 밟았다.
이제 일상으로의 복귀한다.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다.
밀려오는 파도···아니, 일 더미가.
#기타 줄이 풀리듯, 느슨해졌던 정신이 빠짝 당겨진다.
팽팽하게 현실에 맞춰 조율되고 있었다.
일상이다. 바쁘고 정신없는.
그럼에도 직원들의 눈에는 묘한 흥분 같은 게 느껴졌다. 최정아의 1등이 4주 차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쾌거가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저분도.
“아니지, 이 친구야. 누가 그렇게 컴프(Compressor)를 거나. 지금 뭐 뭐가 버스(bus) 걸려있나 봐봐. 그치. 이제 이해됐어?”
주대철 기사가 백발을 슥슥 넘기며 언성을 높였다. 화를 내는 건 아니고, 의욕에 열이 오른 모습이었다.
그에게 혼···아니, 교육을 받는 건 엔지니어치곤 어린 기사들. 물론 그중엔 주기훈도 있었다. 저들이 앞으로 아더 레이블의 후작업을 책임질 팀이지.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주대철 기사와 마주 앉았다.
“휴, 대다, 대. 아들놈 앞날 잘 닦아보겠다고 은퇴까지 해놓고 뭔 고생인지.”
“덕분에 아직도 음원들이 차트에 올라있네요.”
내 립서비스에 주대철 기사가 눈을 흘겼다.
“아들놈 걸고 협박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아주 영악한 구석이 있어.”
“하하. 진심이에요.”
“오냐, 나도 진심으로 말하마. 첫째도 곡이 좋았고, 둘째도 곡이 좋았다.”
“······그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습니다.”
주대철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 아들놈이 이런 상사 밑에서 일을 한다니···.”
말끝을 흐리는데, 입꼬린 진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쯤 저 팀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왜? 급해? 엔지니어링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야.”
“기사님 힘드실까 봐 묻는 겁니다.”
“나야 뭐···.”
“솔직히 재밌으시죠?”
“나? 뭐라는 거야. 아니다.”
주대철이 콧방귀를 뀌며 내 시선을 피했다.
재밌구만 뭘.
나는 주대철 기사와의 간단한 면담(?)을 마치고 2층으로 내려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도 바쁘다.
시간이 자잘하게 분 단위로 쪼개지고 있는 느낌? 나를 본 여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패드를 들어 올렸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헛헛하게 웃으며 다가서자 여직원이 입을 열었다.
“곽 감독님이 경호 씨랑 미팅 한 번 잡자고 연락 왔었어요.”
“아, 그렇군요.”
지난번, 눈여겨보고 있다던 그 작품에 관해 얘길 하려나 본데. 이건 박경호와도 따로 얘길 먼저 해봐야겠다.
끄덕이자 다음으로 넘어간다.
“방송 출연 제의가 두 군데서 왔었어요. 사실 스무 군데서 왔는데, 음악 관련된 것만 추린 거예요.”
비율 무엇.
나머지 열여덟 군데는 날 대체 왜 섭외하는 걸까?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을···.
나가면 ‘한 번 더’만 주구장창 시키겠지.
고개를 젓자, 여직원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선 <색다른 도전>이란 예능인데···.”
“그, 다른 업계 분들이 노래하는···?”
“네, 맞아요. 거기 패널로 출연해달라는 연락이랑요···.”
화면이 툭 넘어간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도 연락이 왔었어요. 피디님 인터뷰를 하고 싶다더라고요.”
“다큐멘터리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여직원이 패드를 뒤적거린다. 추가적인 정보가 있나 보다.
“음악을 주제로 제작 중인 3부작 다큐멘터리예요.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서 다룬다고 하네요?”
“피디님! <색다른 도전>은 해주셔야 하는 거 아시죠?”
사무실 안쪽에서 주재윤이 재빠르게 나타났다. 내가 거절할세라 얼른 뛰어나온 모양새였다.
내 방송 출연이 최정아의 차트 성적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테니까.
“알죠.”
“히하, 감사합니다!”
주재윤이 미련 없이 백스텝을 밟으며 들어갔다.
그 모습에 여직원과 마주 웃었다.
“우선 <색다른 도전>은 이번 주에 찍어서 곧바로 다음 주에 방송될 거기 때문에 정아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근데, 다큐멘터리는 사실 몇 달 뒤에 방송될 거라 정아 때문에 승낙하실 필요는 없구요.”
“음······.”
우선 <색다른 도전>은 하자. 꼭 1위는 아니더라도 최정아는 다음 주까지 분명히 차트에 있을 거니까. 홍보담당자 말 들어야지.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미팅부터 하는 거죠?”
“네.”
“그럼, 미팅하고 판단할게요.”
여직원이 끄덕였다.
“그럼 연락 돌릴게요.”
#다음날, 의외의 장소에서 미팅을 하게 되었다.
이태원에 위치한 테라스 카페.
편한 대로 하랬더니 여기로 정했다.
사무실이 청담동이라 쉽게 오긴 왔는데···.
‘특이한 분이군.’
위치 선정만 특이한 게 아니다. 인물도 범상치가 않다.
어여쁜 처자······흠, 휴가 다녀왔다고 부모님 말투가 입에 뱄네.
아무튼, 딱 달라붙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앞에 앉아있다.
솔직히, 당연하게 머리에 까치집을 얹고 까끌거리는 수염을 재배 중인 남자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편견이 이렇게 무섭다. 주 감독, 곽 감독 같은 사람만 만났었으니···.
“제가 허구한 날 작업실에 박혀있거든요.”
내 얘긴 줄···.
“그래서 이렇게 미팅 때 한을 풀어요. 빡세게 차려입고 이런 핫한 카페에서.”
덕분에 무슨 소개팅이라도 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나쁘진 않네. 이태원도 오랜만에 와보고.
“자, 그럼 대표님께 제 다큐에 대해서 브리핑을 해볼게요. 준비되셨나요?”
“······전, 네. 뭐.”
적응이 안 되네. 편견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분이 특이한 걸지도.
“음악, 그중에서도 대중음악에 초점을 맞추려 하고 있어요. 먼저 대중음악의 과거를 쭉 훑고요. 그다음 현재로 넘어와서 여러 관점에서 다룰 건데, 먼저 대중의 입장. 이건 이런 거죠. 대중들은 어떤 노래에 열광하느냐. 두 번째로 대표님 같은 작곡가님들의 입장. 어떤 곡을 만들어 낼 거냐. 그리고 또 대표님 같은 경영자의 입장에선······.”
우수수 쏟아지는 얘기들. 목소리가 딕션이 좋아 팍팍 꽂힌다. 아, 근데 경영자의 입장은 날 포함하기엔 좀···.
“이렇게 여러 관점을 다루고, 이젠 타임라인대로 미래. 미래의 대중음악에 대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를 보여줄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이게 사실 제일 중요한 건데.”
그녀가 숨을 고르더니 곧바로 말했다.
“해외 진출.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면서 싱긋 웃는다.
“이것도 대표님 전문분야 시죠. 무명의 인디밴드를 미국 돌풍의 주역으로 만드셨으니까요.”
나는 ‘아···’하고 작게 끄덕였다.
“일단 기본적인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실까요?
“그···김 기자님?”
“네?”
“아직 제가 성함을 제대로 못 들어서···.”
“앗! 제가 너무 흥분해서 통성명도 안 하고···!”
그녀가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하얀 아트지에 먹 박으로 박힌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아틀리에 필름, 김혜령 감독]
서로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나서. 미팅이 계속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전달받았는데, 그냥 듣기에도 꽤 재밌었다.
만약 이대로 진행할 경우, 내가 해줘야 하는 건 작업 영상과 인터뷰 정도.
해볼 만하지 않나? 라고 생각할 때였다.
“어, 대표님. 전화···.”
그녀의 말에 시선이 내려갔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의외의 이름을 띄우며.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네, 그러세요.”
곧장 테라스로 나왔다. 경리단길이 내려다보이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기로 프로듀서. 오랜만이에요.
낮고 느릿한 목소리. 브랜이었다.
“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죠?”
간단한 안부가 오갔다. 중간중간 레드리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뉴욕 쪽에 있다고 하네.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쯤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번에 턴투더레이블에서 신예 한 명을 키우려 하는데. 관심이 있나 해서요.
“관심이요?”
영어라 그런가. 그 의미를 완벽하게 알아듣긴 어려웠다.
이를 눈치챈 브랜이 쉬운 단어로, 느릿하게, 그리고 직관적으로 말해주었다.
-곡을 받고 있어요.
“네.”
-기로가 원한다면, 보내도 돼요.
“···그러니까. 신예 뮤지션의 곡을 받아보겠다는 얘기네요?”
-정확해요.
몇 걸음 나아가 난간에 다가섰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론 보낸다고 반드시 앨범에 싣는 건 아니에요. 한국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곡이 모이면 심사를···.
“그건 우리도 똑같아요.”
-그럼, 다행이네요.
“근데 갑자기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죠?”
-앤이 추천했어요. 흥미가 생겨 곡을 전부 들어봤다더군요.
앤 더글라스가···?
몸을 돌렸다.
안쪽에 있는 김혜령을 확인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카페 내부를 찍고 있었다.
다시 난간 쪽에 붙는다.
배가 간지러우면서도 아프다. 가슴은 답답하고.
증상(?)만 놓고 나열하면 안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이거 하고싶다, 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끓어오르며 몸속을 휘젓고 있었다.
즉, 배가 아플 만큼 들떴다는 거지.
나는 웃었다.
“재밌을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