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침묵보단
“결국······.”
멍하니 모니터를 보던 홍보 담당, 주재윤이 고갤 들었다.
사무실이 하도 고요해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자연스레 시선들이 몰려든다.
주재윤이 꿀꺽 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1위네요. 2주째.”
그의 입꼬리가 도로록 말려 올라간다. 파티션이 나눈 공간마다 웃음소리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사무실의 모두가 웃고 있었다.
“제인 급이라던 주엘은 지금······어휴, 저런. 17위네요.”
“엔돌피노도 서성걸음에 밀려서 8위 됐어요. 나연이 진짜 대단하네···.”
“조만간 기영이 곡도 TOP10 안에 들어오겠는데요?”
직원들이 너도나도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불과 몇 주,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마조마해 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차트 너무 아름답네! TOP10의 4곡이 우리 곡이잖아요.”
직원의 말처럼 1위, 2위, 5위, 7위가 전부 최정아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게다가 앞에 세 곡이 전부 피디님 곡이고요.”
김지희가 마우스 휠을 밀어 올리며 덧붙였다.
“다행이에요.”
“뭐가요?”
“걱정했거든요. 만약에 엔돌피노한테 밀려나거나 하면 피디님 휴가 가셔서 심란하실 거 아녜요.”
“피디님 성격상 크게 전전긍긍하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셨을 순 있겠어요.”
“어쨌거나, 확실히 지금은 기분이 좋으시겠네요. 1위를 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대단한 거잖아요. 특히나 이런 특성수기엔.”
주재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쯤 해변에서 어여쁜 분들과 재밌게 놀고 계시겠죠?”
“부모님 뵈러 가셨는데, 무슨 소리예요. 그러다 기사 납니다? 그리고 여수면 아직도 가시는 중일걸요?”
김지희의 말에도 주재윤은 여전히 허한 얼굴이었다.
“아니, 재윤 씨도 휴가 다녀오셨잖아요?”
“하하, 그랬죠. 근데 저희 부모님도 바닷가에 사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사신 덕분에 전 거기서 닭 모이 주고, 잡초 뽑고······.”
중간에 들어온 여직원이 이전의 상황을 모른 채 말했다.
“오, 어울릴 것 같아요.”
이에 직원들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저 왔어요.”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촘촘하게 풍겨오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란 탁자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중년의 부부.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였다.
엄마는 날 보더니 방긋 웃었다. 아버지도 손을 휘적거렸고.
“기로 왔니?”
작은 어머니의 살가운 물음에 꾸벅 인사하며 다가갔다.
“여름 휴가 오신 거예요?”
7월 말. 딱 그럴 시기긴 하다.
워낙 사이좋은 동서지간이라 종종 이렇게 여름 휴가로 놀러 오시곤 했었지.
“응. 근데 왔더니 마침 네가 온다지 뭐니. 언제 오나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빈자리에 앉자 작은 어머니가 수박 하나를 건네며 묻는다.
“이리 앉아봐. 요즘은 좀 어떠니? 지금도 네가 만든 곡이 1등이라며?”
“1등인 뭐니. 1등이. 차트 정상이라고 하는 거야. 맞지?”
작은 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으쓱거린다.
같이 웃으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시끌벅적한 휴가가 되겠구나···.
“그나저나, 가장 너다운 날씨에 너무 재밌게 봤잖아. 특히 네 소속사 가수라는, 박경호. 그 친구 너무 예쁘게 생겼더라고.”
“결국, 그 얘기 꺼내려고 기로 기다렸구만? 쯧, 남자가 곱상하게 생긴 게 뭐가 좋다고.”
“좋기만 하던데? 곰 같이 생긴 누구보단.”
“기로야, 네 작은 엄마 말하는 것 좀 봐라. 네가 보기엔 어떠니. 내가 그 박경호란 친구한테 그렇게 밀려?”
고래다. 고래 부부.
“아이고, 둘이 뭐해. 아들 이리와.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새우가 될 뻔한 날 엄마가 구해주었지.
“그나저나 형님은 너무 좋겠어요. 에휴. 난 언제 딸내미한테 용돈이라도 받아보나.”
“얼씨구 언젠 기로 음악 시키면 안 된다고, 입에 풀칠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리더니?”
“이렇게 재능 있을 줄 알았나요? 인터넷에선 천재라고 불린다며?”
“하하···.”
엄마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지만, 정작 나는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엄마가 웃음 끝을 흐리며 말했다.
“은혜도 곧 주겠지.”
“어느 세월에요. 대학교 졸업하려면 멀었는데. 게다가 그, 그 뭐냐···.”
작은 아버지가 수박을 빼빼로마냥 오독오독 씹으며 툭 말한다.
“시각디자인.”
“그래, 갑자기 그거 하고 싶다고 편입하겠다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입에 풀칠은 할는지···.”
작은 어머니가 포크를 탁 내려놓으며 안쪽 방을 흘겼다.
“그거 때문에 싸워서 기분이나 좀 풀어주려고 데려왔는데. 저 방에서 안 나오는 거 봐요.”
나도 고갤 돌렸다.
“은혜가 왔어요?”
“엉, 방학이잖아. 야! 기로 오빠 왔잖아! 안 나와봐!?”
“됐어요. 제가 가서 인사할게요.”
여기서 벗어날 겸 말이다.
“으휴, 성질머리. 네가 가서 설득 좀 해줘. 예술은 재능 없으면 안 된다고. 네 말이면 믿을 테니까.”
“하하···.”
웃으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방으로 향하는데 엄마가 묻는다.
“닭갈비 할까 하는데?”
“오, 세 공기 예약할게요.”
입맛을 다시며 방을 두드렸다.
“으응.”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다가 힘없이 떨어진 듯한.
천천히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하던 사촌 동생 장은혜가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이네?”
지난 명절엔 내가 못 왔고, 그 전엔 장은혜가 못 왔었지.
끄덕이는 장은혜에게 물었다.
“아직도 강아지 무서워해?”
그러자 장은혜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금방이라도 점프할 듯한 자세를 취하며.
“가, 강아지 있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놀랐잖아!”
푸흐, 웃으며 말했다.
“너처럼 영상으로 보긴 좋아하는데, 실제로는 무서워서 몸이 굳는 애가 있더라고. 걘 고양이긴 한데···.”
말끝을 흐리며 옆에 앉았다.
“시각 디자인 하고 싶다며?”
장은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엄마가 보낸 첩자지?”
“상담사랄까.”
“첩자 맞네.”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작업물 좀 볼 수 있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장은혜가 핸드폰을 툭툭거리더니 내게 내밀었다.
손 위에 그녀의 작품들이 얹어졌다.
천천히 넘기며 침음성을 삼켰다.
음···.
전혀 모르겠는걸.
아, 한가진 알겠다. 내가 적어도 미술 쪽엔 소질이 없다는 거.
괜찮다, 아니다. 잘한다, 못한다. 그런 느낌 자체가 아예 없었다.
아, 김지희라면 알지 않을까?
“이거 보내줄 수 있어?”
“왜?”
“앨범 커버 같은 거 정하는 담당자한테, 한 번 물어보려고.”
“오, 진짜?”
장은혜가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자세를 고쳤다.
“나 첩자 아니라니까.”
“그러게! 아니네!”
그러더니 재빠르게 자신의 작업물을 내게 보낸다.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작은 어머니랑 너무 싸우지 말고. 다 너 걱정하셔서 그러시는 건데.”
“아, 계속 승질 부리잖아.”
승질······.
“차라리 그게 나아. 침묵보단.”
“···?”
부모님의 침묵.
그래서 음악을 관두기로 결심했었지.
내겐 어떤 잔소리보다 더 마음에 아픈 언어였다. 당시 부모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도 어렵다.
‘정말······.’
다행이지.
침묵하기 전에. 부모님의 입을 열게 해서. 거기서 나오는 게 웃음이라서,
밖에서, 부모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먹물처럼 검은 바다가 철썩거린다.
자갈이라 불러도 손색없이 실한 모래들이 발끝에 툭툭 걸리고, 한강의 두 배는 시원할 것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좋다.”
배도 부르겠다, 계속 걸었다.
아마 저 다리는 몇 년 뒤엔 없어지겠지.
대신 반짝반짝하고 큰 다리가 생긴다.
저기 위엔 카페가 하나 생기고···.
저기 루프탑에서 마시는 맥주가 진짜 맛있었는데···!
묘한 기분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걷고 있는 듯한.
때마침 전화가 울린다.
“어, 정아야.”
-여수는 잘 도착하셨어요?
“응. 잘 도착해서 푹 쉬고 있지.”
-다행이다.
“응? 아, 잘 도착한 게?”
-아뇨. 기분 좋으신 거요.
“어떻게 알았대? 기분 좋은 거.”
-이젠 그냥 알 수 있어요. 척하면 척.
최정아의 너스레를 들으며 웃었다.
“그래? 요새 잘 집네.”
무심결에 한 말에 최정아가 거 보란 듯이 말했다.
-그쵸? 피디님 요새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죠?
“아···별거는 아니었고.”
-왜 저렇게 복잡한 표정이시지? 1위인데? 사실 엄청 궁금했는데 꾹 참았어요.
“그랬어?”
-네. 뭐랄까.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왠지 실망감 같은 것도 느껴졌고요.
족집게다.
정확한걸?
그땐 새여름의 순위가 TOP10에 들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었으니까.
쩝. 괜히 미안한걸.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내가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퍽 신경 쓰였겠지.
“미안.”
-아녜요.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왜 감정인지 알 것 같았다.
최정아의 강점 말이다.
그녀는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잘 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고.
이건 내가 가진 멜로디를 듣는 등의 초능력은 아니지만, 그것만큼 대단한 능력이었다.
특히나 감성적인 노랠 주로 부르는 그녀에겐 더더욱.
-······.
잠깐, 뜸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달라진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많이 의지했어요, 피디님.
말이 끝난 것 같지 않아 조금 더 기다렸다.
-피디님 곡은 최고니까. 이번에 앨범을 만들어주신다길래 너무 설렜어요. 근데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아차 싶어요. 의지만 해선 안 되는 건데···.
이번엔 나도 할 말이 있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최정아의 말이 더 빨랐다.
-그래서 목표를 잡았어요.
“······어떤?”
-피디님이 만든 곡을 더 멋지게 만들 수 있도록. 그래서 피디님이 제게 의지할 수 있도록.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담기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요. 제가.
할 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위로가 필요 없어 보이네.
고맙다는 말과 함께 10여 분을 더 통화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바람 따라 너풀거린다.
최정아에 이어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다.
성공해서 만나러 오겠다는 유지은.
날 믿고 따라오겠다는 학준이 형.
항상 감사하겠다는 박경호.
“좋다, 진짜.”
그 순간, 문득 한 명 더 생각났다.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겠다던. 그게 언젠가는 돌아오겠다는 말로 들리던···.
‘이쪽은 논외.’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볍다. 걸음이 겅중겅중해진다.
더 끝내주는 건.
휴가가 이제 첫날이라는 거다.
#LA의 턴투더레이블 사옥.
브랜이 반쯤 열려있는 앤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기타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랜이 몇 달 전에도 들었던. 미완성 리프.
기타를 튕기던 앤이 브랜의 인기척에 연주를 멈춘 건 그때였다. 이에 브랜은 얼른 가져온 노트북을 펼쳤다.
“이것 좀 봐봐.”
짧은 영상이었다. 뮤튜브에 올라온.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영상을 모두 본 앤이 이채를 띄웠다.
“괜찮네.”
“정말?”
“이미 네 자문위원단 친구들한테도 확인했을 거 아냐.”
“그래도.”
앤이 클클대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 내가 너였다면 바로 접촉했을 정도로.”
브랜이 씩 웃는다.
“이미 했지.”
“역시. 행동력은 최고라니까. 듣는 귀가 없어서 그렇지.”
“글쎄. 아까 연주하던 거, 몇 달 전에도 치던 거잖아. 내가 구리다고 했던 거 맞지? 그걸 아직도 완성 못 시킨 걸 보면 생각보다 내 귀가 쓸만한 걸지도?”
“아니라니까. 대작의 향기를 맡았는데···.”
입맛을 다시는 앤을 보며 브랜이 낄낄댔다.
“아무튼, 이 친구 괜찮다는 거지?”
“물론. 근데, 데려와서 데뷔시킬 상황은 되고?”
이번엔 브랜이 입맛을 다셨다.
“힘들지. 지금은 샐러드 하나 사와 달라고 시킬 직원도 없거든. 다들 너무 바빠. 어젠 프린트 용지를 내가 사러 갔다니까?”
“그럼 데려와서 묵혀두게?”
“그건 너무 손해고···외부에서 프로듀서를 데려와야 하나···.”
생각에 잠겨있던 브랜이 은근히 물었다.
“론. 론은 요즘 뭐해?”
“트위터.”
“노는군. 그럼 론한테 연락을···.”
“그리고, 안나 샤피로 앨범 작업도 하고 있고.”
“···돌겠군.”
앤이 낄낄댔다. 그러다 짐짓 아이디어가 떠올랐단 표정을 지으며 입을 꾸물거렸다.
“아···음···.”
“왜? 누구 떠오르는 프로듀서 있어?”
“요즘 흥미로운 프로듀서가 있긴 한데. 흐음. 아냐. 네가 오케이 할 리 없지.”
“뭔데. 들어보기나 하자고. 네가 떠올릴 정도면 나도 고민해볼 만 하니까.”
“그래?”
“물론.”
앤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툭 던진다.
“기로.”
“···누구?”
“기로. 네가 마음에 들어한 레드리시의 프로듀서 말이야.”
브랜의 표정이 점점 해괴해졌다.
“왓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