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97화 (97/221)

097. 나 혼자만의 경쟁 (5)

해외 진출?

엄밀히는 미국을 얘기하는 거겠지. 빌보드가 있는, 대중음악의 선구지 말이다.

“프로듀서로서 해외 진출이라···.”

프로듀서의 해외 진출이란 해외 뮤지션에게 곡을 주는 걸 의미할 텐데.

이미 여러 프로듀서가 이런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조차 잘 모른다. 이유야 간단하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이가 없으니까.

국내에서 연신 성공을 거듭하고, 기획사에서 아무리 밀어준다 해도 가장 중요한 건 현지 레이블의 도움이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선 국내 프로듀서를 써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쓰더라도 버리는 카드인 뮤지션과 붙여주기 마련이고.

국내에서 몇 번을 성공했든,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아직 논할 얘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별말 없이 끄덕이는 걸 보니 그도 그냥 던져본 질문인 것 같았다.

레드리시가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고, 아더 레이블이 턴투더레이블과 계약까지 맺었으니, 저런 가능성을 잠시 점쳐본 것뿐이겠지.

“사실 그냥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곡을 받으려 줄 서는 프로듀서. 얼마나 멋집니까.”

“그렇게 들으니, 그 질문을 해주신 게 영광이었네요.”

입에 기름칠을 한 것 같다. 번지르르해. 대표가 되니 어쩐지 이런 것만 느는 것 같은걸?

문 기자가 껄껄 웃는다. 그의 두툼한 손이 종이 뭉치를 넘겼다.

“자, 그러면 다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이거 참 진부하긴 한데 또 위쪽에서 좋아하는 질문이라 하긴 해야 할 것 같네요.”

그가 그새 마른 입술을 핥으며 운을 띄운다.

“센세이션을 넘겼더니, 이제 싱어송라이터 주엘과 100억 아이돌, 엔돌피노가 차트에 발을 올립니다.”

그리고, 묻는다.

진부하지만, 모두가 궁금해할 질문.

어쩌면 나조차도······.

“빗소리가 1위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최정아, 빗소리. 이틀째 1위! 속 타는 센세이션···>

[어제 새벽, 최정아의 첫 정규 앨범 타이틀인 빗소리가 1위 자리에 올라섰고, 이틀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당 곡은 유명 프로듀서인 기로가 작, 편곡을 한 곡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서정적인 멜로디와 빗소리를 연상케 하는 E,P(electric piano)의 조화로 장마가 다가오는 지금,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 중이다.

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1위 자리를 차지할지는 미지수이다. 컴백하는 대형 스타들 때문인데, 당장 오늘 자정에 주엘이 컴백을 하면서, 빗소리가 얼마나 1위 자리를 지킬지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빗소리에 쏠려있다.

1위를 차지한 이후부턴 더욱 그렇다. 싸움 붙이기 좋아하는 기자들은 누가 그 자릴 뺏을 수 있을까 연신 기사를 띄우고 있고.

그 사이, 새여름이 5위까지 올랐지만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순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새여름이 TOP10 안에 들면서 평온이 출렁인다.

이만하면 됐지. 욕심부리지 말자.

-이렇게 생각해도 불쑥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온다.

‘좀 더······가능할까?’

붕 뜬 마음으로 데모를 확인하고, 나름의 대표 업무도 보고, 멜로디를 복기···할 수 있을 리 있나.

그래서 다 덮어두고 공항에 나와 있다. 고생한 천재 베이시스트를 모시러 말이다.

‘왔네.’

게이트가 열리며 입매를 슬쩍 올렸다.

카트에 캐리어를 잔뜩 실려있다. 윤태영이 무슨 영화배우처럼 걸어 나온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작고, 이목구비까지 뚜렷하니 확실히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네.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날 보며 갸웃거린다. 두리번거리기까지 한다. 자신을 보는 게 맞나 확인하는 모양새.

아차, 마스크.

슬쩍 내리자, 쌍꺼풀 짙은 큰 눈이 확 커진다.

그에게 다가갔다.

“모시러 왔어요.”

“피디님이요? 아, 이제 대표님이죠?”

“말을 놓을 게 아니면 그냥 피디님으로 해줘요. 아직 지은 씨한테도 존댓말 쓰죠?”

“하하.”

윤태영이 그저 웃는다.

하긴, 중학생 레슨생한테도 존댓말을 쓴다고 하니 할 말은 없다만···.

그나저나 무슨 짐이 저렇게 많아졌지···?

시선이 그가 끄는 카트로 향했다. 안 갈 수가 없다. 누가 보면 호텔 벨보이인줄 알겠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내 질문에 윤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갑자기 왜 웃어?

“여기, 이 작은 캐리어랑 기타 빼곤 전부 피디님 거에요.”

“네?”

대형 캐리어 더미가 전부?

벙찐 표정으로 보자, 그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전부 들은 난···.

에이, 설마.

부정했다. 현실을.

그러나 상대는 윤태영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장난을 칠 위인은 못 되는.

하하. 정말인가.

“역시 지은 씨······.”

가뜩이나 독특한 그녀인데, 미국물을 먹더니 스케일까지 커졌다.

고맙긴 한데, 이걸 다 그 좁은 원룸에 어떻게 두라고···.

아니, 그 전에 대체 뭐가 들은 거지?

캐리어들을 훑다가 윤태영에게 말했다.

“피곤하죠? 일단 얼른 가죠.”

“네. 대표님.”

빙그레 웃는 윤태영을 보며 몸을 떨었다.

“부디 피디님이라고 해줘요. 어제 인터뷰 내내 대표님 소리 들어서 피부에 닭살이 돋다 못해, 그냥 닭이에요. 닭.”

“하하, 알겠어요.”

서글거리게 웃는 윤태영을 보면서 나도 마주 웃었다.

곧장 그의 집으로 향했다.

작은 빌라. 원룸. 그리고···혼자 사는 남자.

키워드들이 나와 비슷하지. 그래서인지 똑같다.

거실이 곧 옷방이고, 의자가 곧 옷걸이지.

나는 작은 식탁에 앉았다. 윤태영은 민망해하며 짐을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리곤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그······손님이 오셨는데, 물조차도 없네요. 나가서 좀 사 올게요.”

“괜찮아요. 목 엄청 마르니까.”

“···?”

푸스스 웃으며 윤태영을 보았다. 익숙한 상황. 문득 스치는 기억이 밀려 올라온다.

플로라의 곡을 들려주러 그의 작업실을 들렀을 때 말이다. 그때 그가 음료수를 사러 나가고, 난 혼자 작업물을 들으며 깨달았었지.

멜로디에 의지하지 말자.

이정표처럼 자연스레 들려오는 건 괜찮지만, 그걸 기대하고 기대진 말자.

이정표 없는 기로에선, 스스로 길을 찾자.

이번에······.

‘어느 정도 지킨 셈인가?’

방은 어질러져 있는데, 생각은 착착 정리가 된다. 뱃속을 뜨겁게 간지럽히던 뭔가가 냉수라도 맞은 듯 푹하고 꺼진다.

음악을 원 없이 하고 있지.

멜로디 없이도 내 곡을 만들었고.

충분히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분명히 미래의 나, 작년의 나, 어제의 나보다 분명 나은 모습일 거다.

앞으로 바뀐 미래의 나는 더 나아질 거고.

그치.

‘그거면 된 거지.’

창문이라도 열어젖힌 양 상쾌해지고,

조용해진 날 보는 윤태영의 얼굴이 보이자 불쑥 궁금증이 솟았다.

“맞다, 앤 더글라스 앨범 작업은 어땠어요?”

‘SILVER’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올 앤 더글라스의 앨범. 그 수록곡들이 머릿속에 모두 있다.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베이시스트가 바뀌었으니. 그것도 무려 윤태영이 베이스를 잡았으니···.’

비워진 머릿속에 기대감이 차오른다.

그러자 윤태영은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그렸다. 그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묘하다.

“괜찮았던 것 같아요.”

자신감보단 고마움이 흐르는 얼굴이랄까.

그가 말했다.

“덕분에.”

나······?

#-오늘 주엘 컴백이네요! 너무 기대됨!!

-주엘이면 솔직히 제인이랑 경쟁해야 하는 급 아님? 최정아 불쌍하네.

-주엘 차트에 뜨면 최정아 하루는 버티려나? 쌤통이다. 센세이션 오빠들 파이팅!

-주엘의 시원시원한 고음이 듣고 싶었다구···!

-그래도 바로 1위는 힘들 것 같고, 2위로 차트 진입해서, 한 시간 만에 1위 찍는 거 예상합니다.

-여기 무슨 주엘 팬들만 모였나, 최정아가 그렇게 쉽게 내려갈 것 같진 않은데?

-이상 최정아 팬의 망상이었습니다.

-참 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한 번 두고 보죠.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각종 커뮤니티가 수시로 불타고 있다.

하루건너 하루마다 뮤지션들이 컴백을 해대니 팬들도 그만큼 성화다. 차트와 마찬가지로 전쟁터가 된 거지. 팬들의 전쟁터.

“주엘이 제인 급? 이건 아니지 않아요? 비슷한 거라곤 데뷔 연도밖에 없는데!”

그들의 거친 언행 덕에 직원들도 참전할 기세였다.

“그건 그렇지만, 주엘 팬들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1위를 지키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만약 넘겨주게 된다면, 얼마나 빨리 되찾냐가 관건이겠네요. 시간이 너무 지나면 아예 굳어져 버리니까.”

“주엘도 주엘인데, 그 다음도 문제예요. 다음 주엔 걔네 데뷔한다면서요. 100억 투자받은 아이돌. 거긴 신인인데도 이미 데뷔 전부터 개인방송으로 엄청난 여성 팬들을 긁어모았더라고요. 확실히 음원 차트에선 여성 팬들 화력이 세죠.”

“음···이번엔 정아 씨에게 꽤 험난하겠네요.”

걱정과 염려가 범벅된 직원들. 특히나 주재윤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고심하는 눈치였다. 홍보담당자니까.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는 게 그의 업무였다.

그때 직원 한 명이 날 돌아본다.

“피디님은 걱정 안 되세요?”

커피잔을 들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끔뻑이며.

“저야, 뭐···.”

“와, 역시. 피디님 자신감.”

아니, 그건 아닌데?

“주엘이고 100억 아이돌이고 전혀 무섭지 않다. 나 장기로다. 크으···.”

그것도 아니고.

덤덤하게 말했다.

“당연히 신경은 쓰이죠.”

아니, 신경 쓰였었다.

지금은 괜찮고.

확실히 공항으로 마중 나간 보람이 있었지.

슬쩍 몸을 일으켜 작업실로 향했다.

커피잔을 툭 내려놓고, 잠시 스트레칭을 하고선 의자에 앉았다. 마우스를 툭 건드니, 오전에 켜두고 간 컴퓨터가 절전모드에서 벗어나며 두 화면을 비춘다.

빗소리와 새여름 트랙.

뮤지션들의 팬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수없이 머릿속에서 교차하였던 두 곡이다.

나는 두 화면을 한동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둘 다 껐다.

비교는 끝났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경쟁도 끝났다.

#“피디님!”

괜찮은 가상악기가 나왔다길래 구매해 한참을 탐색했던 것 같다.

얼마나 지났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이렇게 됐네.’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문을 열고 나갔다. 김지희가 당장이라도 퇴근할 수 있는 차림으로 다가왔다. 살짝 상기된 얼굴이다.

“아니, 왜 이제 퇴근해요? 지금 새벽인데······.”

“네? 아, 일을 좀 더 하고 싶어서···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

“지금 2위에요!”

순간 제인 급이라 비교되는 (-물론 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엘의 소식이라 생각했다.

시간상 주엘이 컴백을 하고도 차트까지 나왔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주엘이요?”

“아뇨.”

아냐···?

순간 덜컹한다.

설마 주엘이 바로 1위를 찍은 건가?

그래서 빗소리가 2위로 밀려난 건······.

“주엘은 3위고요.”

뭐?

“새여름이요, 새여름이 지금 2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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