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나 혼자만의 경쟁 (4)
연주자에게 필요한 게 뭘까?
당연히 연주 실력이다.
그럼 녹음을 하는 연주자. 더 정확히는 음원 작업에 참여한 실연자에게 실력이란 건 뭘까?
활용도. 곡마다 가진 세계와 자유도가 다르기에 그 안에서 얼마나 곡에 적합한 연주를 하고, 사운드를 뽑아내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즉, 작곡가(프로듀서)가 정한 자유도 안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하는 것.
그게 실연자의 실력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세계 정상급들이라,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놀랍군.’
대규모 재즈 밴드, 스나키(snarky)의 드럼 주자인 찰스 맥케이가 녹음 부스에 앉아있는 꽁지머리 남자를 보며 감탄했다.
그의 손에서 여섯 개의 현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곡을 만든 앤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로.
이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놀라운 녹음 현장이었지만, 베이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드러머에겐 더욱 큰 충격이었다.
‘지난주.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찰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옆에 있는 곡의 주인을 불렀다.
“앤.”
자신과 비슷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앤에게 물었다.
“저런 연주자를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휘유,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는 앤.
“내 매니저가 데려왔어.”
“브랜이?”
“어, 근데···.”
그는 흥분한 얼굴로 주황빛 수염을 씰룩거렸다.
“그 친구도 저런 괴물인 줄은 몰랐겠지.”
“미치겠네. 어디 소속된 연주자야?”
앤의 눈이 빙그르르 돌았다. 기억을 더듬듯이.
“아더, 아더 레이블.”
“처음 듣는데···.”
“당연하지. 한국에 있는 레이블이거든.”
찰스가 입을 벌렸다.
“어쩐지 친해져 보려고 했는데, 영어를 못하더군.”
아쉬워하는 찰스의 표정 너머로 녹음을 마친 꽁지 머리, 윤태영이 부스를 나왔다. 이에 앤이 팔짱을 풀며 물었다.
“완벽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몇 주 사이에 실력이 훨씬 좋아졌는걸?”
통역사가 내용을 전달하자, 옅게 웃는 윤태영.
그가 뭐라고 말했지만, 앤과 찰스는 통역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통역사가 입을 열었다.
“보스가 끝도 없이 성장하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네요?”
“보스···?”
갸웃거리던 찰스가 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친구 보스가 누군데?”
앤은 그런 찰스를 보며 머릿속에 한 명을 떠올랐다. 윤태영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이었고. 아더 레이블의 프로듀서라고 했었지.
“있어. 브랜이 맘에 들어 한 프로듀서.”
“그 깐깐한 브랜이···?”
“어. 음악보단 사업적으로 뛰어난 프로듀서인 줄 알았는데······.”
앤이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생각했다.
레드리시가 인상 깊었고, 윤태영이 놀라웠는데.
이젠, 그가 궁금해진다고.
*윤태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녹음실을 나섰다.
최선을 다했다. 모두가 놀라는 듯 보였고.
그럼에도 뒤돌아서니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다시 할 수도 없고···.’
고개를 저으며 복도를 걸었다.
그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꽤 자신감에 차 있었다. 무려 앤 더글라스의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고, 미국의 내로라하는 프로 연주자들이 그를 인정했다.
1년 새 참 많은 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대중적이지 않고, 자기만의 음악을 하는 고집 쎈 베이시스트.
그게 자신이었으니까.
고마웠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장기로에게. 도무지 동생 같지 않은 피디님.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었다. 그저 연주가 좋아서, 잼이나 할까 하고 갔던 펍에서 명함을 내밀며.
그리고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서.
장기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어서.
그게 만족스러웠고, 뿌듯했다.
그런데 한 달 전. 하서윤의 앨범을 들으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거기다 이번 최정아의 앨범까지.
‘이러고 안주할 시간이 없어····.’
장기로는 자신이 없이도 완벽하게 해냈다.
모든 곡의 베이스를. 리듬을. 그루브를.
순간 충분하다고 생각되던 것들이 부족해지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베이스를 잡았지.
몇 날 며칠 동안···.
“왔어요?”
상념에 빠진 채로 들어간 휴게실.
유지은이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옆엔 웬 봉지들이 산더미다.
‘뭐지 이 불안한 느낌은···?’
“이게 다···뭐에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피디님한테 주려고 산 선물들이에요. 여기, 차트 1등 축하 선물도 있어요.”
그녀가 말한 '여기저기서'는 미국 동부과 서부를 가로지르는 광활한 범위였다. 그만큼 봉지 안에는 별의별개 다 들어있었다.
“이걸 내가 전부 가져가긴 힘들지 않을까요?”
“안 되는데···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의미?”
윤태영의 질문에 유지은이 신나서 답했다.
“이 선인장 인형은 제가 사막 지역 갔다가 피디님 생각이 나서······.”
잠자코 듣던 윤태영은 생각했다.
‘결국, 전부 그냥 산 거잖아.’
무대 위에선 점점 더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변해가는데, 어째 평소엔 그런 면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냥 귀여운 거, 멋진 거, 예쁜 거 좋아하는 여대생 느낌이랄까.
“알겠어요. 잘 포장해서 가볼게요. 피디님 깜짝 놀라겠네.”
유지은이 은인을 본 듯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아 참. 내일 공항으로 데려다드릴까요?”
“아뇨, 사양할게요.”
윤태영이 재빠르게 고갤 저었다.
이미 그녀의 운전 솜씨는 경험해본 적 있었다. 차가 어디서 났냐고? 새빨간 스포츠카를 브랜에게 빌렸었지. 아니, 뺏었다 해야하나···.
“왜 다들 안 타려 하지? 병국이도 성운이도 싫다고 하고.”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더 무서운걸.
윤태영은 얼른 그녀가 가져온 선물들을 챙겼다.
“애들 곧 올 거예요. 점심 같이 먹어요!”
“흣짜. 일단 이거 숙소에 가져가서 정리하고 다시 올게요.”
휘적휘적 휴게실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며 옅게 웃었다.
‘돌아간다.’
2달도 안 되는 시간인데, 2년은 된 것 같다고 윤태영은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빌보드가 있고, 수많은 유명 뮤지션들과 연주자들이 바글거리는, 여기가 바로 그 미국인데.
한국행이 오히려 더 기대되다니.
#“노래 너무 좋아요!”
궁금증이 치민다.
정확히 어느 곡이······.
아니다. 이러지 말아야지.
모호한 기분을 느껴가며 출근하고 있었다.
빗소리가 1위를 한 것에 더불어 새여름이 6위에 올랐으니까.
TOP10에 두 곡이 모두 들어갔다.
느낌이 많이 다르다. 빗소리는 어쩐지 1등 해야 할 자식이 마침내 1등을 차지한 느낌이고, 새여름은 큰 기대 안 했던 자식이 전교 6등을 한 느낌이랄까?
‘자식도 없으면서······뭐라냐.’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프라프치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빗소리를 끝까지 듣고서, 느긋하게 사무실로 오른다.
“피디님, 1위 축하드려요!”
예상했듯, 여직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의 축하 인사를 시작으로 직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하룻밤 만에 1위라니!”
“센세이션 팬들이 아주 부글부글 하더라고요.”
“수성전 실패!”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아침에 온 전화가 생각나 여직원에게 말했다.
“아, 참. 태영이 형이 들어온대요. 내일 아침 비행기로.”
“정말요? 미국 작업은 완전히 끝나셨나 보네요?”
“네. 그런가 봐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궁금해 미치겠다. 앨범은 다음 달 넘어야 나온다던데······.
미래의 세계적인 천재 베이시스트. 아니, 이미 현재에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윤태영은 미국에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고 왔을까?
동시에 그가 그동안의 작업물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궁금하다.
‘통화할 때도 별말 없던 걸 보니,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긴장이랄 것까진 아니고. 설렌다고 하기도 모호한. 그런 간질간질한 느낌이 명치 부근을 맴돈다.
그때 여직원이 말했다.
“혹시 까먹으셨을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내일 인터뷰들이 좀 있어요.”
아, 그랬지.
“······세 갠가 그랬죠?”
“네.”
“하하, 많긴 많네요.”
“요새 인터뷰할 곳이 많아서 그런가, 기자분들 스케줄도 빡빡하더라고요.”
그렇겠지. 차트를 보면 확 이해가 가긴 하다. 치열하다 못해, 전쟁이란 표현이 딱 알맞은 차트.
앞으로가 더 문제다. 파급력 높은 뮤지션들이 줄줄이 컴백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1위를 찍는 것보다 어려운 건 유지를 하는 거다.
‘조만간 1위자리를 내줘야 할 지도···.’
6위 자리도 마찬가지일테고.
아쉽지만 당연한 거였다.
영원한 왕좌가 없는 곳이잖나.
곧장 작업실에 들어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점점 새우등이 되어가는 게 느껴진다. 큰일이네. 이건 과거로 돌아와도 바꿀 수가 없는 미래 중 하나인 걸까···.
자세를 고치고, 메일로 들어온 데모들부터 확인했다. 오후엔 그동안의 곡 작업이 고스란히 담긴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열었다.
지금까진 앨범을 냈다면 그걸로 끝이었지. 그래서 이번엔 복기란 걸 해볼까 한다.
내가 만든 곡과 멜로디가 들려준 곡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거기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뭐가 있을지.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대표님, 이번 앨범의 비하인드 스토리, 뭐 이런 게 없을까요?’
‘제2의 제인으로까지 불리고, TKM 3대 여가수란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최정아 씨가 앞으로 얼마나 크게 성장할 거라고 보십니까?’
‘앞으로 컴백 할 쟁쟁한 뮤지션들이 많은데요. 이번엔 얼마나 오래 1위에 있을 거라 보시나요?’
‘서기영 씨 말고도 새로운 이름이 있어서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있어요. 레비닛. 제가 알아본 바로는 사운드클라우드에서 활동하던 인디 작곡가였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
‘이번엔 음악적인 질문인데. 새여름 클라이맥스에서 첼로 라인이 올라가다가 바이올린으로 확 전환된단 말이죠? 이건 어떤 걸 노리신 건가요?’
질문들이 몰아친다.
어떤 건 큰 고민 없이 답할 수 있었고. 또 어떤 건 의외의 질문이라 말문이 턱 막히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잘 넘겼지.
‘1위를 얼마나 할진 왜 묻는 거야?’
알면 프로듀서를 할 게 아니라 점집을 해야 하지 않을까?
기획사 사장들이 줄을 서겠는데?
그런 질문을 받다가 첼로와 바이올린 라인의 차이를 물어보는 이가 나타나니 퍽 반가웠다.
의도는 있었으나 대놓고 앨범에 적기도, 먼저 보도자료로 뿌리기도 애매한 내용이었지.
‘계절의 변화.’
그걸 표현하고 싶었단 말을 하자 문 기자라는 남자가 낮게 감탄한다.
말이 좀 많은 것 같지만, 그건 기자들 공통적인 특징이고···.
꽤 좋은 질문들을 해주는 기자였다.
잠시 물로 목을 축인 문 기자가 질문을 이어간다.
“오늘이죠. 오늘 점심쯤? 론 스미스가 또 피디님의 곡을 언급했어요. 론 스미스가 대표님을 아는진 모르지만, 이게 플로라 때 이후로 두 번째란 말이죠.”
나도 들었다. 이전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에게.
“하서윤 씨와 최정아 씨 앨범 두 개를 연달아 올리면서 극찬을 했죠. 물론 해외 반응은 좀 싸늘하긴 했지만요.”
너털웃음을 짓는 문 기자.
그것도 들었다. 론 스미스을 조롱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동양 뽕을 맞았다느니, 이상한 거 추천하지 말고 앨범이나 내라느니.
“그래서 말인데···.”
문 기자가 고슴도치 마냥 삐죽삐죽 솟은 수염을 쓸어 올린다.
무슨 얘길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했는데.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나는 의아해졌다.
이미 하고 있잖아?
“올해 초부터 레드리시가 미국에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아직 다른 뮤지션들에겐 추가적인 계획이 없다고 말하려는데, 문 기자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든다.
“아뇨. 소속 가수들 말고요.”
“···?”
그가 날 보며 물었다.
“대표님이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서, 직접 해외에 진출하실 계획은 없는지 질문드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