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준비 (2)
TKM 사옥 5층.
자판기 앞에 모여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뒤적거리는 게 자연스러운 시간이다.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세 남자가 상대적으로 젊은 프로듀서들의 인사를 받으며 라운지에 들어섰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던 한명이 화두를 던졌다.
“그거 결국 아무도 지원 안 했다며.”
“당연한 거지. 거길 누가 가냐. 여기 죄다 5년 차 이상 프로듀서들뿐인데. 도전을 좋아하는 젊은 피, 그런 거 싹 다 헌혈해서 초코파이로 바꿔먹었어.”
낄낄대던 남자가 거들었다.
“비 피디나, 이성원처럼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니면 누가 가냐고.”
“난 독자적으로 해줘도 안 가. 굳이 가서 왜 리스크를 만드냐. 곡 잘못되면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데.”
“그것도 그건데, 대표가 장기로잖아. 뭐 대표님, 대표님 하면서 예의 차려야 하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쫌 그르치. 걔 나이가 이제 스물일곱이라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끼어들었다.
“근데 말도 안 되게 성공했잖아.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듀서 아니냐?”
이에 나머지 두 남자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중들한테야 그렇겠지. 그래도 아직 업계 사람들한텐 거품이다 뭐다 말 많아. 2년 차면 아직 햇병아리지.”
“하긴 1, 2년 히트곡 제조기 소리 듣다가 지금은 쏙 들어간 작곡가들 많잖아.”
그렇게 장기로에 관한 이야기로 한참을 떠드는데, 그들의 시야에 복도로 지나가는 두 사람이 걸렸다.
“정 대리?”
“그 옆엔 누구지?”
정 대리 옆에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 전혀 생소한 얼굴이었다.
“아, 걘가 보다. 공모전.”
“그 세 곡 내서 3등까지 싹 쓴?”
“오, 귀엽네. 새끼 작곡가처럼 나한테 배정해줬음. 좋겠다.”
“미친놈. 네 딸뻘이다.”
“쯧. 그러다 길가 놈 마냥 목 날아가지.”
“누가 그런 쪽이랬냐! 멘토, 멘티 몰라? 너네도 심사할 때 곡 들어봤잖아. 센스있더만.”
“그렇긴 하더라. 재능 충만한 케이스야.”
끄덕거리던 남자가 툭 던졌다.
“확실히 공모전 출신이 실력 있어.”
“엥, 언제부터 그랬냐. 보통은 무시당하지 않았어?”
“언제부터겠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내심 모두가 알고 있을 답을 내놓았다.
“장기로부터지.”
#들고 있는 커피잔이 무거워진다.
나른하게 포개지는 눈꺼풀만큼이나.
내가 햇빛에 눈을 감게 되는 건지. 졸려서 감는 건지 모르겠다.
며칠 밤을 지새우니 이런 상태가 돼버렸다.
앨범에 수록될 곡은 어림잡아 여섯 곡 정도.
만의 하나의 경우에 그 모든 짐을 내가 떠안을 생각도 해야 했다.
서기영은 자신의 색이 너무 강하고.
새로 올 프로듀서는 여전히 미지의 인물이니.
‘공모전 곡 중에 최정아한테 어울릴 것 같은 곡이 있긴 하던데···.’
수없이 듣다 보니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세 곡 중 하나가 머릿속에서 최정아에게 맞게 그려졌고.
이러니, 자연스레 밤이 길어질 수밖에.
고민하고 미리 정해둬야 하는 것들이 끊이질 않았다.
부담감도 한몫했다.
작곡천재. 히트곡 제조기. 아더 레이블의 수장···.
이런 나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보면 항상 피식 웃음만 나왔는데.
남 일인 것처럼, 강 건너 불구경인 것처럼 그렇게 봤는데.
지금은 웃음이 안 나온다. 부담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달까.
그럼에도 줄곧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여전히 즐겁다.’
멜로디가 들리건 안 들리건.
변하건, 그대로건.
이렇게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음악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는 것에.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잠시 꺼졌던 발전소가 다시 돌기 시작한다.
심장이 벌컥거리는 게 분명 카페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지.
그때 뒤쪽에서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디님.”
창문에 붙어 있던 시선을 돌리자 날 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여직원이 보였다.
“어, 괜찮아지셨네요?”
“네? 뭐가요?”
“표정이요. 뭔가 복잡하게 엉켜있는 실타래를 조금은 풀어내신 느낌이랄까?”
내가 넌지시 물었다.
“제가 그렇게 안 좋아 보였어요?”
“안 좋아 보인다기보단 좀···부담감을 안고 계신 것 같았어요. 그거 있잖아요. 청년 가장 느낌?”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몸 상태가 이러니, 그 잘하던 ‘척’이 안 되는구나, 하고.
“아마 새로 오신 직원분들을 제외하고 기존 직원분들 중엔 모르는 사람 없을걸요?”
그 정도였나···.
“그래서 요즘 직원분들 엄청 열심이었어요. 피디님 짐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고. 특히나 지희 씨가 요새 의욕이 활활 타요.”
그건 나도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김지희는 정말 눈에 보일 정도로 열심이다.
홍보담당자, 주재윤도. 눈앞의 여직원과 모든 직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고.
그들을 떠올리니 묵직하던 커피잔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기분 탓일지라도 좋네.
그때였다. 끼릭 거리며 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홀 안쪽으로 누군가 걸어들어온다.
고갤 돌리니 곰의 몸매와 조금 더 유사해진 정 대리가 웃고 있었다.
“오셨어요?”
나도 마주 웃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대각선 아래로. 꽤 아래로.
아담한 여자가 보인다. 놀이동산에 놀러 온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어쩐지 나를 회전목마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그녀가 꾸벅 정수리가 보이도록 인사해왔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오나연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얼굴이다. 모르는 이름이고.
노래? 당연히 처음 들었지.
그런데 왜일까. 알아야 할 것만 같다.
이 곡들을 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지.
이 작곡가를 왜 모르는지.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예컨대, 오나연이라는 이 친구의 작곡 실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흩날렸다거나.
영화 크레딧을 꼼꼼히 읽듯, 음악을 들으며 작, 편곡을 항상 확인하던 내가 유난히 그녀의 곡을 들을 때만 다른 할 일이 생각났다거나.
이유야 무궁무진한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뭔가가 내 감각이 만든 그물에 걸려 펄떡거리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 대리와 오나연은 눈앞에서 한참을 실랑이 벌이는 중이다.
대화 주제는 자기소개서.
“말하면 안 돼요?”
오나연이 도리질을 한다.
“욕을 쓴 것도 아닌데?”
다시 도리질.
“차라리 욕이 나아요.”
뭔데. 대체 뭘 써야 욕이 나은 건데?
작은 이목구비가 커 보일 정도로 작은 얼굴. 작은 몸집의 오나연이 나를 보며 눈을 빛낸다.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정 대리가 자리를 피하고, 그제야 나는 그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볼 수 있었다.
“아, 노래 정말 잘 들었어요.”
“진짜요? 감사합니다!”
들뜬 그녀와 꽤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 대해 특정하지 못했고, 날뛰는 감각은 그저 과거로 돌아오니 예민해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모르는 작곡가가 있을 수도 있지.
좋은 곡들이지만, 마땅히 부를 가창자가 없어서 썩혔을 수 있지.
그땐 최정아도 없었으니까.
“아참, 오나연 씨가 낸 곡 중에 ‘서성걸음’이란 곡 있잖아요?”
“네.”
“이걸 좀 다듬으면 정아한테 어울릴 것 같거든요?”
“···?”
오나연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아무래도 정 대리에게 듣지 못한 것 같다.
“정아라면···최정아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그분한테 어울릴 것 같다는 건······.”
끄덕이며 답했다.
“정아 정규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게 아마 오나연씨 첫 프로젝트가 되겠네요.”
“···!”
오나연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첫 프로젝트가 정규앨범. 그것도 최정아의 앨범이라는 것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신입이라고는 들었는데. 그럼 공모전 이전엔 뭐했어요?”
나처럼 군대일 리는 없고.
여전히 진정이 안 되는지, 떠듬떠듬 입을 연다.
“학교 다니면서, 사운드클라우드에서 활동했었어요.”
“그래요? 오나연이란 이름으로?”
“···아, 아뇨.”
순간,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뭐지?
의아해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유가 튀어나왔다.
“기로바라기라는 이름으로···죄송합니닷!”
하하···.
“설마 그 네임으로 데뷔할 생각은 아니죠?”
“안 되겠죠?”
되겠나.
“그럼 기로······.”
“기로를 빼요.”
“넵.”
곰곰이 생각하는 오나연.
이름이야 나중에 정해도 된다고 하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레비닛’은요?”
“그건 있잖아요.”
“엥? 있어요?”
“몰라요? 유명하잖······.”
순간 묵직한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퉁 하고 흔들린다.
또 다. 또 기억이 꼬였다.
가끔 내가 서른일곱으로 착각을 하듯.
그때의 기억이 밀려들어 섞여버렸다.
레비닛은 미래의 유명 프로듀서.
이 당시엔 아직 활동 전이거나, 무명이었을텐데.
설마···.
곧바로 물었다.
“왜 그 네임을 떠올렸어요?”
“네? 이거 원래 기로바라기란 네임 쓰기 전에 쓰던 이름인데요?”
“······.”
오나연이, 레비닛이구나!
#머릿속 한 켠을 채웠던 의문 하나가 정리되었다.
퍼즐 중 하나가 황금 퍼즐이었다는 것.
엔지니어 주기훈이 기억을 빌려 얻은 황금 퍼즐이라면.
작곡가, 레비닛. 오나연은 별안간 굴러 들어온 황금 퍼즐이었다.
‘설마 나 때문에 그녀의 미래가 바뀌었을 줄이야.’
애초에 ENB라는 기획사로 갔어야 할 그녀가 어찌어찌 아더 레이블로 온 데엔 내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나 때문에 TKM 공모전을 노렸다고 하니. 그것도 아더 레이블에서 프로듀서를 뽑지 않으니 거기로 간 거라더라.
뭐, 나에겐 반가워할 만한 일이겠지.
꼭 이번 최정아 앨범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내가 일을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는 셈이니까. 윤태영이나 서기영만큼.
‘기대되네.’
그나저나···.
윤태영은 앨범 작업을 잘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핸드폰이 울렸다.
윤태영은 아니고, 최정아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헐떡거리는 소리가 넘어온다. 뛰고 있나?
-피디님, 저 회사 앞 지나는데 아직 작업실이에요?
“응, 위에 있어.”
-그럼, 금방 올라갈게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문이 열렸다.
후하.
꼭 안에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상자를 열기 직전 같다. 마른 침이 절로 삼켜진다.
최정아가 입구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긴 생머리를 재빠르게 정리하며.
“피디님···.”
숨은 거칠었고.
목소리도 꿀렁댄다.
그리고,
상자 뚜껑이 확 열렸다.
자연스레 난 그걸 확인할 수 있었고.
“뛰어왔어?”
“네.”
“천천히 온다고 내가 도망가냐.”
“그래도, 오랜만이잖아요.”
그러네. 석 달 만이네.
그게 왜 뛰어온 이유가 되는진 모르겠지만.
“항상 연습하러 올 시간은 있었는데. 이번엔 진짜 짬이 요만큼도 안 나더라고요.”
울상이 된 최정아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근데, 뭐하고 계셨어요?”
“고민.”
“무슨 고민이요?”
“안 변했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안 변했으면 어쩌지? 하는 줏대 없는 고민. 근데 지금 막 끝났어. 확인했거든.”
“···?”
“좋네.”
나는 작게 웃었다.
결국, 최정아에게 들려오는 멜로디는 한 음도 변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곡, 그대로.
멜로디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걸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어느 때보다 의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