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의지와 의지 (5)
문이 열리자 하얀 공간을 무대 삼아 서 있는 하서윤이 보였다.
배가 훤히 드러나는 브라톱에 다리 굴곡이 여실히 보여지는 레깅스를 입고서, 중앙에 서 있는 그녀를 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지금까진 그녀를 봤을 때, 온실 속···그것도 대리석 화분에 담긴 화초를 보는 듯했는데 말이지. 물론 자세히 보면 가시가 뾰족뾰족 나 있는.
근데 지금 모습을 보니 장르가 달라진다.
어드벤처. 그것도 밀림 속을 뛰어다니는 육감적인 여전사를 보는 것 같다.
방금 사자 한 마리를 쌈 싸 먹고 왔을 법한 여전사의 두 눈이 날 향했다.
“···피디님이 웬일이에요?”
못 올 곳을 온 것도 아닌데, 괜히 움찔했다.
“그···호객 행위를 당해서요.”
내 말에 옆에 있던 정수연이 쿡쿡대며 웃는다.
“맞아요. 제가 피디님 호객해 왔어요. 여기 춤 천재가 있다고.”
그제야 하서윤이 끄덕이며 묻는다.
“구경하러 온 거예요?”
“그럴까 해요.”
살며시 웃는 하서윤.
“뭐, 작곡만 잘하시지. 춤에 대해 아시나?”
분명히 작게 중얼거렸는데 들렸다. 꽤 크게. 고의지. 일부러야.
“저 같은 사람도 춤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곡이 안 아깝지 않겠어요?”
웃으며 말하자, 하서윤이 날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땀을 저렇게 흘렸는데, 은은한 향기가 풍겨온다. 뭇 남성들을 설렐만한 의미심장한 눈빛은 덤이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정수연이 하서윤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노래를 튼다.
동시에,
하서윤이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동작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주뼛 선다. 그냥 팔을 앞으로나란히 했을 뿐인데, 저럴 수 있다는 게 꽤 충격이었다.
그런 건가. 피아노의 같은 음을 눌러도, 사람마다 완전히 다른 음이 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춤 선’이란 게 뭔지 알 것 같다. 몸의 굴곡이 유려한 선이 되어 움직인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녀에게서 비롯된 곡과 그녀가 만든 춤이 만나는 순간의 시작.
다음 동작이 나오기도 전에 생각했다.
이건. 시작부터 졌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에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는 경우가 있다.
최근엔 박경호가 출연한, <가장 너다운 날씨에>의 1화 엔딩 장면이 그랬다.
영상이 노래와 섞였을 때, 상호 보완적인 시너지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실감했지.
지금도 그와 유사했다.
솔직히 춤을 보는 내내 그녀가 하서윤이란 것도 잊고 봤다.
백열등 가득한 밝은 연습실에. 그것도 역광조차 아닌데, 사람의 실루엣만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선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어디 한 부분 모난 곳 없이.
그렇다고 완전히 시선을 강탈당하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노래가 또렷이 들리는 경험이었다.
<가장 너다운 날씨에>가 그런 것처럼.
춤과 노래는 완벽하게 상호 보완적인 존재였다.
‘멋지네.’
그런 생각과 함께, 순간 내가 그녀에게 곡을 줬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살짝 고마워졌···.
“입이 안 다물어져요?”
쓰읍.
“잘 다물어져요.”
“다행이네요. 턱 빠진 줄.”
머리가 갈래갈래 뭉칠 정도로 흠뻑 젖어있다. 방금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그런 하서윤이 악동처럼 웃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온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별안간 하서윤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역시 덤덤하네요. 놀리는 맛 없게.”
“그니까요. 적응됐나 봐요.”
눈썹 부근을 긁적이다, 말했다.
“그리고 춤은 멋졌어요.”
“와.”
이번엔 하서윤의 입이 벌어졌다.
“처음이네요. 칭찬?”
“그랬어요? 항상 대단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건 욕이었잖아요.”
피식.
“어쨌든, 춤은 감탄만 하다 가요.”
“노랜 안 그러겠다는 거죠? 그때도 또 입 못 다물게 만들어줄게요.”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제발요.”
#-매니지먼트 임 팀장님이 언제 꼭 밥 한 번 사겠다고 그러시던데.
핸드폰 너머의 서재원 팀장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TKM 간판 가수들과 모두 한 번씩 작업해 본 셈이군.
그가 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제인, 하서윤······그리고 최정아.
마지막 말에 내가 되물었다.
“정아요?”
-그래. 아직 나머지 둘에 비하면 시간이 짧지만 그래도 TKM 간판으로 공공연히 인정받는 분위기더라고. 레드리시는 해외에 있는 데다가 밴드라 논외인 것 같고.
어느새 제인, 하서윤과 같이 언급될 정도로 커져 있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학준이 형 다음으로 멜로디가 들렸던 카페 알바생에서 말이다.
최정아에 대한 생각들이 채워지자 잠시 미뤄뒀던 고민이 퉁, 하고 튀어나왔다.
최정아의 정규 앨범.
서재원 팀장에게 물었다.
“혹시 공모전으로 뽑은 신입 프로듀서는 어떻게 됐나요?”
-어, 그렇지 않아도 오늘 회사로 오기로 했어. 오면 물어보도록 하지.
“좋네요.”
-내친김에 얘기해야겠군. 일단 프로듀서를 제외한 확정된 인원은 다음 주에 옮겨 갈 거야. 인사 정보는 따로 정 대리가 보내줄 테니······.
그렇게 추가 인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되어 전화를 끊었다.
적당히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3층으로 올라갔다. 녹음실에선 최 기사의 준비가 한 창이었다.
“왔어?”
“네. 아 그리고, 곧 본사 지원 올 거예요.”
“으아, 좋네. 이제 허리 좀 펴겠구먼.”
“혼자 레이블 작업 전부 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요즘은 후반 작업을 업체에 맡기니 살 것 같더라. 예전에 레드리시 믹싱까지 만질 땐 진짜 졸도하는 줄 알았어.”
“하하, 죄송해요.”
올라오는 길에 자판기에서 뽑은 매실 주스를 건네고, 의자에 앉았다.
하서윤은 이미 부스 안에 들어가 목을 풀고 있었다.
토크 백을 누르고 늘 하던 질문을 던진다.
“컨디션은 어때요?”
-좋아요.
주억거리는데 역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피디님은요?
반대로 들으니 신선한데?
“좋아요.”
-됐네요, 그럼. 바로 시작하나요?
“네.”
하서윤이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고 말했다.
-아 참. 저한텐 킵 한다고 거짓말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줘요.
“들었어요?”
-원래 알고 있던 거예요. 경호 씨는 모르는 것 같아서 눈치껏 아무 말 안 했고.
새삼 놀랍다.
하서윤에게 그런 눈치가 있다니.
-또, 또. 욕하죠, 지금?
“이젠 눈빛만 봐도 알아요?”
-그럼요. 척 보면 척······그래서 했다는 거예요?
푸스스 웃으며 가사지를 펼쳤다.
밑줄을 그어가며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내가 어떤 파트에 어떤 걸 중점적으로 디렉할지. 이 부분에선 어떤 느낌으로 불러야 할지.
그때 스피커에서 하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부를 거예요.”
다짐 어린 목소리였다.
밑줄을 쓱쓱 그으며 답했다.
“그렇겠죠.”
오케이. 체크 끝.
고개를 들었다.
미우나 고우나,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 뮤지션인 가창자가 보인다.
“애초에 누가 와도 하서윤 씨만큼 못 불러요. 이 노랜.”
#스타킹 마냥 촘촘한 팝 필터.
그 너머에 투박하게 빛나는 콘덴서 마이크.
그리고 통유리와 건너편에 앉아 있는 무심한 표정의 프로듀서.
하서윤에겐 별다를 거 없는 풍경이었다. 수백 번은 봐 온 그저 그런 녹음실의 풍경일 뿐.
그뿐인데···.
‘다르네.’
지금까지 숱하게 겪은 녹음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이렇게 다를까.
룸의 구조도 비슷하다.
장비도 크게 다를 거 없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엔지니어의 모습도 익숙하다.
그런데 뭐가 다른 걸까?
뭐가 다르길래.
‘이렇게 자신감이 차오를까.’
의문 어려있을 그녀의 눈이 장 피디, 장기로의 얼굴과 마주쳤다. 가사지에 밑줄을 그으며 고개를 든.
‘애초에 누가 와도 하서윤 씨만큼 못 불러요. 이 노랜.’
걱정이 전혀 끼어있지 않다.
담담한 말 속엔 기대와 확신만 걸려있다.
자신감이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만은 아닌.
마치 자신의 노래를 내가 꼭 잘 불러줄 거라는, 확신.
‘저거구나···.’
저게 장작이 되어 이 자리에 선 가창자의 의지를 활활 태웠구나.
하서윤은 자신조차도 고양감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웃었다.
‘이런 기분이니까, 그럴 수 있었지.’
박경호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 가창자들도 다르지 않았겠지.
-1줄부터 할게요.
유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장기로의 목소리에 하서윤은 목을 가다듬었다.
노래.
춤만큼이나 좋아했지만, 너무 일찍 최고일 수 없다는 벽에 가로막힌 탓에 이제는 애증의 관계가 된···.
그런데 왠지 그의 말처럼 누구보다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이 노래만큼은.
자신이 최고일 것 같았다.
#녹음은 단 한 번의 브레이크도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쉴새 없이 이어진 녹음에 지친 하서윤과 최 기사가 나가고.
나는 녹음실에 홀로 남아 가득 채워진 가사지와 악보를 훑었다.
녹음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실제로 적용해본다. 후반 작업을 할 믹싱 엔지니어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하서윤 성량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코러스조차 힘이 너무 강하네. 악기까지 많으니 후렴에서 너무 빡빡한데?’
-라는 메모를 보고, 궁리하는 거지.
코러스의 힘을 빼자. 어택을 완전히 줄이고, 웻(Wet)하게.
물어 젖은 듯 하서윤의 코러스가 힘을 잃고 흐물댄다. 이게 따로 들으면 무슨 깡통 속에 입을 대고 부르는 것 같은데. 막상 메인 멜로디와 함께 틀면 오묘한 느낌을 낸다.
적절한 공간감도 생기고.
‘음원 보낼 때 이것도 얘기해 놔야겠다. 좋은···.’
“좋은데요?”
식겁했네.
“···언제부터 있었어요?”
“좀 전에 들어왔어요. 후렴구 틀기 직전에요. 음, 이렇게 하는구나.”
옆으로 훅 다가온 하서윤이 너저분하게 쌓인 가사지와 악보들을 훑는다.
“글씨체가 예쁜 편은 아니시네.”
“왜 안 갔어요?”
내 물음에 하서윤의 시선이 날 향했다. 고개까지 돌리니 더욱 가까워졌다. 숨 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의자를 슬쩍 뒤로 밀어 거리를 벌린다.
“이제 끝났잖아요. 인사하러 왔죠.”
하서윤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작업은 모두 끝났다. 음원도 후반 작업이 끝나면 TKM으로 전달될 테고.
하서윤은 아더 레이블이 아니니까.
“어때요. 좀 아쉽나?”
“후련한데요?”
“말을 꼭.”
눈을 흘기던 하서윤이 짐짓 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여기 올 일 없을 거예요.”
“당분간?”
“뭐, 아예 오지 말라고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근데, 왜요?”
“전 원래 한 작곡가한테 연속으로 곡 안 받거든요.”
그녀의 대답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이유가 들려온다.
“그러면 곡에 의지하게 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툭 말했는데, 나에겐 꽤 묵직하게 떨어졌다. 저 말이.
하서윤이 말을 이었다.
“내가 또 누구한테 의지하고 그런 건 싫어해서. 이용한다면 모를까.”
난 이용했다는 말처럼 들리네.
내 생각을 읽은 듯, 그게 맞다는 듯. 그녀가 싱긋 웃는다.
“저 가요.”
“그래요.”
“나올 생각 말아요. 제거나 열심히 봐줘요.”
몸을 돌려 걸어가던 하서윤이 갑자기 멈춰섰다. 그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근데 안 궁금해요?”
“뭐를요?”
“본인이 만든 내 두 번째 곡은 어떨지?”
저 말이 나한텐 ‘내 두 번째 멜로디는 어떨지?’로 들린다.
근데 뭐, 적어도 지금 당장 그녀에게 두 번째 멜로디가 들릴 일은 없으니까.
“지금은요.”
“흥, 나중에 궁금하다고 해도 내가 안 해줘요.”
꼭 본인이 궁금한 것 같은데?
“궁금해지면 연락할게요.”
“안 해준다니까.”
홱 돌아가는 옆모습에서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 것도 같다.
“진짜 가요.”
그대로 하서윤이 떠났다.
소리 없이 웃던 나는 의자를 돌려 다시 악보를 보았다.
잠시 마우스를 달칵거리며 몇 가지 아이디어를 지지고 볶다가, 다시 손을 뗐다.
그리고 허리를 의자에 푹 기댔다.
“의지···.”
두 가지 뜻이 있어서 그런가.
참 묘한 단어다.
#TKM 5층, 미팅룸.
반창고 모양의 테이블에 정 대리가 앉아 있다.
반대편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노래 잘 들었어요.”
“앗, 감사합니다!”
“곧 팀장님···어. 오셨네.”
여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유리문이 열리며 서재원 팀장이 미팅룸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빈 자리에 앉은 서재원 팀장이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에게 묻는다.
“오나연 씨?”
“넵!”
하이톤의 힘찬 대답.
서재원 팀장이 옅게 웃었다.
“세 곡이나 냈던데?”
“아 네. 개수 제안이 없길래···.”
“덕분에 아주 골치 아팠어.”
“네?”
눈알이 미팅룸을 굴러다닌다.
‘나 잘못한 건가?’
-하는 문구를 띄우며.
옆에서 정 대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블라인드 심사로 3등까지 뽑았는데. 전부 나연씨 곡이었어요.”
정처 없이 떠돌던 오나연의 눈이 우뚝 멈췄다. 표정에 놀람이 번진다.
“네에에···?”
“우리도 딱 그렇게 놀랐어요. 신기하더라고.”
신이 난 표정으로 들썩이는 오나연.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서재원 팀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기소개서가 특이하던데?”
정대리가 그의 말을 받았고.
“무슨 팬레터인 줄 알았죠.”
그러더니 둘의 시선이 오나연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존경해요? 기로 프로듀서를?”
정 대리의 질문에 오나연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파닥거린다. 좋은 걸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넵! 너무요!”
이에 서재원 팀장이 웃었다.
“잘됐네.”
“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