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의지와 의지 (4)
기다란 트랙을 질주하던 세로줄이 멈췄다.
동시에 들릴 듯 말 듯 한 노이즈를 깔던 모니터 스피커가 뚝 하고 끊긴다.
나는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로 하서윤을 돌아보았다.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이,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유려하게 떨어지는 그녀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항상 겪지만, 이럴 때마다 참 묘한 경험이다.
당사자에게 발전시킨 멜로디를 들려줄 때 말이다.
완벽하게 딱 들어맞는 멜로디와 내가 발전시키며 덧씌워진 내 느낌. 그리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른 컨셉.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나온 곡을 멜로디의 주인과 함께 듣는다는 게.
그토록 깊게 되뇌었던 상대가 옆에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의 기분이 오묘했다.
내가 이런데, 당사자는 어떨까?
갑자기 눈앞에, 자신을 대변할만한 노래가 툭, 하고 튀어나온다면···.
궁금하지만 나로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때, 하서윤이 적막을 깨며 읊조린다.
“······이런 기분이구나.”
“네?”
“아, 아녜요.”
고개를 내저어 보인다.
조금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여전히 시간이 멈춰있는 모니터 속 자신의 노래를 보고 있다.
꼭 물에 젖어 얌전해진 고양이 같다. 여운에 젖어 툭, 툭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는.
조명이 은은해서 그런가. 하서윤의 눈도 그렇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노래······좋아요.”
“뭐라고요?”
사람 목소리가 웬만하면 자신의 멜로디보다 작기 힘든데 말이지.
심지어 멜로디는 가끔은 소리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다른 소리와는 완전히 구분되어 들린다.
하서윤은 그런 멜로디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노래, 좋다고요.”
“네?”
“좋다고요!”
이번 건 일부러.
피식 웃으니 이를 눈치챈 하서윤의 두 눈이 표독스럽게 변한다.
“어, 그 표정 어디서 봤는데?”
“뭐요?”
“어딨지. 고양이가 크앙 하는 이모티콘이었는데.”
“이, 이상한 거 찾지 말고, 노래나 보내줘요.”
지금? 3시가 다 돼가는데?
“이 시간에 담아가서 뭐하려고요?”
“뭐, 잘 때 들을 수도 있죠.”
“댄스곡을···?”
“흥, 전 원래 잘 때 덥스텝도 들어요.”
“······.”
“문제 있어요?”
“아뇨. 참 어울리네요.”
“욕이죠?”
내가 웃으며 말했다.
“돌아왔네요?”
“뭐, 뭘 돌아와요.”
속마음을 내비치며 천천히 가라앉던 그녀가 어느새 앙칼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듯한 하서윤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래도 이게 활기차 보이네요.”
“···갈 거예요.”
“조심히 가요.”
덤덤하게 인사하자 하서윤이 홱 돌아본다.
“내가 왜 조심해요. 남들이 날 조심해야지! 그리고 노래 꼭 보내줘요!”
홱 나가는 하서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하서윤 답다고.
#하서윤은 잠들어있던 매니저를 깨워 사무실을 나왔다.
밴 위에 앉아 있던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가로등 줄줄이 켜진 골목길로 호다닥 뛰어간다.
“···나 같네.”
“어?”
“아냐, 아냐. 근데 졸려서 어떡해? 내가 운전해?”
“아냐, 괜찮아.”
손을 휘적거린 매니저가 차 문을 열어젖혔다. 하서윤이 뒷자리에 올라타고, 매니저도 운전석으로 향한다.
시동을 거는 그에게 하서윤이 말했다.
“내일부턴 그냥 내가 연락하면 여기로 와. 그때까진 좀 쉬고.”
“어? 아냐, 괜찮대도.”
“내가 불안해서 그래. 그리고 부탁할 것도 있고.”
“부탁할 거?”
“응. 그, 박경호란 배우 있잖아.”
“알지. 너 대신······어후, 내가 아직 덜 깼나 보다.”
얼굴을 벅벅 비비는 매니저를 보며 하서윤이 웃었다.
“됐고. 그 사람한테 갚을 게 좀 생겨서.”
“갚을 거? 뭐?”
“그냥, 녹음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여러모로 도움을 좀 받았거든. 근데 내가 이런 건 또 꼭 갚아야 하는 성격이잖아? 뭐가 괜찮을까?”
질문을 던진 그녀가 작게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장 피디한테까지 생색낼 만한 걸루.”
#남양주의 한 대학교에서 진행된 <가장 너다운 날씨에> 촬영이 잠시 멈췄다.
촬영이 길어지며 점심을 먼저 먹기로 결정되었다.
은박지에 곱게 쌓인 김밥을 손에 쥔 조연이 박경호의 옆에 앉으며 투덜댔다.
“서러워서 살겠나.”
박경호의 성공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했던 그의 친구.
노랠 들으며 앉아 있던 박경호가 이어폰을 빼며 갸웃거렸다.
“왜?”
“저기 봐.”
친구의 턱 끝엔 부산한 남자 배우가 한 명이 걸려있었다.
오늘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배우 이정운.
탑 급이라고 부르긴 뭐하지만, 충분히 인지도가 있는, 주연급 배우였다. 그리고 동시에 박경호와 비슷하게, 과거에 음원을 냈던 원로 아이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감독과 주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건네고 있었다. 도시락이었다. 그것도 초밥.
“우리건 없대.”
“왜?”
“저 말론 팬들이 해줬다는데, 주연들 것만 해준 모양이더라고. 봐봐, 조연들만 쏙 빼고 도시락 돌리는 거.”
이에 박경호가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뭐. 팬들이 준비한 거면 그럴 수 있지. 다 돌리긴 부담이 될 수 있잖아.”
“그럴 수야 있겠지만, 난 왠지 느낌이 팬이 아니라 자기가 준비한···어, 이리로 오는데?”
이정운이 도시락을 한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다가선 그의 눈이 살짝 휜다.
“박경호 씨. 맞죠?”
“아, 네.”
박경호가 일어나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가수로서도, 연기자로서도 그는 철저히 선배였기에.
“OST 작업 한 거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아쉽더라고. 어찌나 배가 아프던지.”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멀리서 보여주던, 감독과 탑 급 주연들에게 아양을 떠는 듯한 미소와는 판이하게.
“정준철 음악 감독님께 저도 꽤 러브콜을 보냈었는데 말이죠. 이 드라마 OST도 하고 싶다고. 근데 순식간에 날름 경호 씨가 가져갔네? 난 또 무슨 최정아가 부르나 싶어서 포기했었는데 말이죠.”
불쾌감이 물씬 묻어나오는 말들을 웃으며 뱉어냈다.
“역시, 뒤 봐주는 유명 프로듀서가 있으니 일이 일사천리다. 그죠?”
“······.”
그런 이정운의 태도에도 박경호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나섰다.
“그 유우명 프로듀서분이 이 친구를 탐내한 걸 어쩌겠어요.”
그 말에 시선이 돌았다.
더욱 착 가라앉는 눈빛으로.
“매니저예요?”
이번엔 박경호가 끼어들어 말했다.
“배우예요. 여기 출연하는.”
“아. 난 또. 매니저라도 되는 줄 알았네.”
이정운이 자신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슥 보았다.
“이건 주연들한테만 주는 거라. 박경호 씨 분량이 많이 늘었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주연급은 아니잖아요?”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홱 가버린다.
어이없다는 듯 성난 목소리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지가 OST 못 부른 게, 따지고 보면 너 때문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야?”
박경호는 여전히 고요한 호수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냥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잖아. 실패의 원인을 만들어내서 원망하는 게.”
“딱 그 말이 맞네. 재수 없는 자식. 근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내가 그랬었거든.”
“네가? 남을? 상상이 안 가는데.”
“아니.”
박경호가 웃었다.
“내가, 나를.”
그때 세트장 건너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둘 다 뭔가 하고 목을 빼는데, 스태프 중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지금 밖에 밥차 와있거든요.”
“오 정말요?”
친구가 엉덩이를 들썩인다.
스태프는 웃으며 박경호를 보았다.
“경호 씨 이름으로 온 밥차던 데요?”
“저요??”
박경호가 갸웃거리며 일어났다. 조연 친구도 얼른 일어나 그를 따라 움직였다.
큰 트럭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박경호라고.
“맞네. 박경호.”
“누가······.”
순간의 의아함은 금세 풀려버렸다.
바로 밑에 하서윤이란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근데, 왜···?’
어리둥절한 박경호의 뒤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무슨 밥차가 아니라 레스토랑이 왔네.”
곽 감독이 다가와 껄껄거리며 웃는다.
그 뒤로 이나라를 비롯한 주연들이 다가왔다.
“저거 소고기죠?”
“핏기 뚝뚝 떨어지는 거 보니, 소고기 맞네. 때깔을 보니 한우 같은데?”
“잘됐다! 회 못 먹어서, 김밥 먹어야 하나 했는데!”
배우들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그 옆에 서 있던 이정운의 표정이 마리오에 밟힌 버섯마냥 툭, 툭, 구겨졌다.
곽 감독이 박경호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나도 이거 먹어야겠네. 잘 먹을 게.”
그러자 이나라가 뒤따르며 웃는다.
“감독님 초밥도 거의 다 드셨잖아요.”
“그걸로 배가 안 차지.”
“그건 그래. 경호 씨 잘 먹을게요!”
“저도요!”
“잘 먹을게요. 아 그리고, 그리고···하서윤님한테 진짜 팬이라고 좀 전해줘요. 진짜 너무 팬인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하하, 네 알겠습니다.”
줄줄이 밥차로 향하는 주연, 조연, 그리고 스태프들.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웃던 박경호의 시선이 이정운에게 향했다.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자신이 아닌···
‘옆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세상 재수 없는 표정으로 이정운을 보며 싱글거리는 친구 녀석이 있었다.
#박경호와의 전화를 끊고 커피를 내렸다.
쪼르르 떨어지는 생명수를 보며 피식거리자, 여직원이 물어왔다.
“뭐 웃긴 일 있으세요?”
“아, 그게. 경호 씨 촬영 현장에 밥차가 왔대요.”
여직원이 갸웃거린다.
“촬영 현장엔 원래 밥차가 가는 거 아녜요?”
“그렇죠. 근데 그게 제작진 측에서 부른 게 아니라 사설이었대요. 그것도 웬만한 출장 뷔페보다 비싼.”
항상 생각의 진도가 빠른 여직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경호 씨 팬클럽에서···!”
“그건 아니고요.”
“그르쳐? 경호 씨가 인기가 많아지긴 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서윤 씨가 보냈대요.”
“네···?!”
그건 더 의외라는 듯, 여직원이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저 표정이 퍽 이해가 가서 나도 따라 웃었다.
“아니, 서윤 씨가 왜요?”
“그러게요. 뭔 사연이 있나 봐요.”
“이게 무슨 일이람.”
피식 웃으며 커피를 들었다.
“위에 서윤 씨 있죠?”
“네. 아까 안무가분이랑 같이 올라가셨어요.”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현재 데모곡이 완전히 나온 상황.
곧 있을 녹음을 앞두고, 하서윤은 안무 짜기에 한창이었다. 대체 왜 TKM 일을 여기서 하는진 모르겠지만···.
여기가 시설이 더 좋다나 뭐라나.
서기영도 봐줄 겸, 3층으로 올라서니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어, 피디님 오랜만이에요.”
플로라의 안무를 담당했던, 안무가 정수연이었다.
아무래도 하서윤이 불렀다는 안무가가 그녀인가 본데.
플로라의 안무가가 지금은 하서윤을 봐준다는 게, 같은 소속사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냥 왠지 신기했다.
하서윤에게 플로라가 딱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 같진 않기에.
“그러게요. 반년은 훨씬 더 된 것 같네요. 잘 지내시죠?”
“그럼요. 피디님은···뭐, 물어 뭐하겠어요. 피디님 승승장구하시는 소식은 제가 있는 사옥 지하에까지 아주 잘 들려 와요.”
“아닙니다.”
“어머, 웃음에서도 아주 여유 넘치시는데요?”
꺌꺌 웃는 정수연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안무는 어떨 것 같아요?”
댄스곡이다. 곡 아무리 기깔나게 뽑아도 춤이 받쳐주질 않으면 반쪽짜리 밖에 안 되는.
그러니 춤에 문외한인 나로서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다행히 정수연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좋아요. 아니, 미쳤어요!”
과하게.
“하하, 감사해요.”
“저요? 전 한 게 없는데요?”
이건 또 무슨 소리.
안무를 만드는데, 안무가가 한 게 없다니?
“전 검사하러 온 거예요. 뭐 디테일 잡을 게 있으면 의견도 좀 주고.”
“그럼 안무는···.”
“서윤 씨가 다 짰어요. 즉흥으로 한 번 춰봤는데, 이거다 싶어서 만들었다더라고요. 춤 잘 춘단 건 알고 있었지만, 만드는 건 별개의 영역인데···.”
즉흥으로? 그게 가능한가?
내가 아무리 춤에 대해 몰라도 쉬운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이것도 멜로디의 영향이려나?’
그런 추측을 하는데, 정수연이 들뜬 표정으로 연습실을 가리켰다.
“한번 들어오셔서 봐봐요. 이번 곡 진짜 대박 날 것 같다니까요?”
그녀의 손을 따라 연습실을 응시했다.
순간, 궁금해진다.
멜로디의 주인이. 자신의 멜로디에 입힌 춤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