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의지와 의지 (3)
송골송골 맺히던 땀이 앞머리를 적시더니 검은 브라톱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하서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뚝. 노래가 끊기며 연습실이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확실히 TKM보다 시설도 좋네.’
목을 간질이는 불편함에 하서윤이 물통과 겉옷을 챙겼다. 시원하게 물 한 모금 마시고 떠날 생각으로.
‘가는 김에 장 피디한테 얼굴도 좀 비춰야지.’
방해와 어필의 사이를 줄타기하며 계속 신경 쓰이게 해줄 요량이었다.
고양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나선다.
곧장 정수기 쪽으로 향하는데, 마주 오던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지금 막 온 것 같은 차림새로 보온병을 열고 있던 박경호.
먼저 인사한 건 그였다.
“안녕하세요.”
하서윤도 작게 끄덕이며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통을 확인한 박경호가 슬쩍 비켜선다.
“먼저 받으세요.”
“고마워요.”
사양하지 않고 물통에 물을 받는다. 뒤이어 박경호가 보온병에 온수와 냉수를 번갈아 가며 섞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서윤이 물통 뚜껑을 돌리며 시선도 함께 굴려댔다.
“지금 오신 거예요?”
“네. 촬영이 조금 늦게 끝나서···바로 왔습니다.”
“지금 10시인데요?”
“그러네요.”
무미건조.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투에 하서윤이 말꼬리를 올렸다.
“안 힘들어요?”
다시 던져진 물음에도 박경호는 여전했다.
“네.”
단호하게까지 느껴지는 대답.
하서윤이 작게 끄덕이며 작은 입을 오물거린다.
“노래 부르는 걸 엄청 좋아하시나 보네···.”
작은 목소리였지만, 코앞에 있는 박경호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박경호가 옅게 웃으며 끄덕인다.
애꿎은 물통 뚜껑만 돌리던 하서윤이 은근히 입을 뗐다.
“그···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했던 게 있는데.”
박경호가 고갤 들어 듣고 있다는 시늉을 하자 하서윤이 입술을 적셨다.
“그때 녹음할 때요.”
“네.”
“어떤 기분이었어요?”
조금은 생뚱맞을 수도 있는 질문. 하지만 박경호는 오히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기억이 워낙 강렬했기에, 충분히 해줄 얘기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부를 수 있었나···? 진짜 신기했었어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짙게 그려진다.
주억거리는 하서윤에게 박경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요?”
“네. 지금도 계속 그런 기분을 느껴요. 간절했던 것들이 하나씩 이뤄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라 해야 하나.”
박경호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저한텐 쉽사리 허락되지 않던 기분이었거든요.”
“······.”
하서윤은 물통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그게 녹음 중에 했던 장 피디의 말 덕분이든.
그가 만든 곡 때문이든.
단 한 명이. 세상이 만든 트라우마를 깰 수도 있구나.
‘어쩌면······.’
더욱 궁금해진다.
그게 두근거리는 설렘을 주지만,
동시에 몹시 불편했다.
목이 탄다고 해야 하나.
그래, 꼭 그런 느낌이다.
‘싫다. 이런 기분.’
그때였다. 자동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온 것은.
“그래서 킵을 한다는 건, 사실 가창자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장기로였다.
그 뒤로는 누구였더라. 그래, 어디 경연 프로그램에 나와서 우승했던···.
“······.”
“뭐예요. 왜 나보니까 말을 하다 말아요?”
“아니. 딱히 하서윤 씨 때문은 아녜요.”
그러자 옆에서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 그럼 저 때문······.”
장기로가 웃는다.
“아뇨. 경호 씨 때문만도···이거 영업 비밀이라.”
“영업 비밀이요?”
그러자 장기로가 서기영의 어깨에 손을 툭 얹는다.
“기영이한테 디렉 보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중이거든요.”
“아···?”
장기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근데, 하서윤씨는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꽤 오래 있······.”
갑자기 하서윤이 벌컥 소리를 높인다.
“아뇨! 물 마시러 나왔는데요?”
보란 듯이 물통을 찰랑찰랑 흔들며, 몸을 돌린다.
“들어가서 더 할 참이었어요.”
“···?”
#“아무튼, 가창자의 노래가 부족해도, 대놓고 얘기해선 안 된다는 거지. 좋다고, 킵 한다는 말을 해두고 계속 시도하게 하는 거지.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제대로 된 칭찬을 섞는 거요.”
“맞아.”
뿌듯해하는 서기영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중요한 걸 하나 더 알려줄게.”
“넵.”
의지가 결연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방금 내가 손을 네 어깨에 올렸잖아?”
“넵.”
“그러면 네가 무릎을 조금 굽혀줘야 하는 거야.”
“···?”
“이유는 말 안 할 거야. 슬퍼질 것 같거든.”
뒤늦게 빵 터진 서기영을 녹음실에 앉혔다.
“자, 이제 작업물 좀 볼까?”
*앨범 활동 중에도 틈틈이 이어온 서기영의 작업물들을 봐준 후에 녹음실을 나섰다.
‘좋네···.’
서기영을 보면 항상 자극을 많이 받는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내 작업을 하고 싶단 충동이 강하게 널뛴다.
곧바로 커피 한 잔 내려서 작업실로 들어왔다.
마우스를 툭 건들자, 모니터가 환해진다.
그리고 두 개의 트랙이 보인다.
하나는 내가 들은 멜로디, 즉 중심음이 드문드문 찍혀있는 트랙.
다른 하나는 완전히 비어있는, 이제부터 내가 사이사이에 채워 넣을 트랙.
“보자···.”
두 개의 트랙을 놓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댄스곡의 뼈대가 될 멜로디를 듣는 건 두 번째였다. 플로라 때 들었던 단조롭고 중독성 있었던 중심음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자연스레 하서윤에게 들려온 멜로디와 비교해보았다.
비슷했다.
중독성 강한 중심음들이 반복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코드의 난이도랄까.
여기서부터 확실히 아이돌 곡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댄스곡답게 꽤 화려한 텐션음을 보여준다.
하이힐 한쪽이 짧을 때 더욱 농염해지는 걸음걸이처럼.
불완전한 텐션들이 주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모니터에 찍혀있는 중심음들 사이에 한 음을 집어넣었다.
Bb.
또 한음.
Db.
다시 또 한음.
곡이 출렁댄다. 구름다리가 흔들리듯 불안정해 보인다. 덕분에 긴장감이 한 층 더 해지고 있다.
음악에 공식이랄 게 없다지만, 여기서 지켜져야 할 건 있지.
이렇게 긴장을 연거푸 넣었으면, 그다음에서 반드시 해결을 해줘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음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뭔가가 되어버리니까.
3화음 안에 속한 안정적인 음으로 불안정한 뼈대에 기둥을 세워준다.
비로소 안전하지만, 긴장감 있는 멜로디가 일부분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하서윤의 음색으로.
확실히···.
‘어울리네.’
하서윤를 잘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녀를 떠올릴 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는 게 어색할 만큼.
멜로디는 항상 이래왔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도록.
‘자, 이젠···.’
후렴에 사용할 멜로디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이번엔 다른 고민에 봉착했다.
‘리듬.’
하서윤의 곡.
즉, 댄스곡이었다. 그렇기에 멜로디만큼 중요한 게 리듬, 그루브였고.
내가 항상 어려워했었던. 그래서 윤태영의 손을 빌었던.
내심 윤태영에게 작업물을 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앤 더글라스의 앨범 준비로 바쁠 텐데, 그 엄청난 기회 앞에 서 있는 윤태영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해결해 보자.’
윤태영과 함께 작업을 해오면서 배운 것들이 있으니까.
윤태영의 시선으로 멜로디를 본다.
그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내게 어떤 의견을 줬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리듬, 동기, 그루브, 베이스의 워킹, 정 박자 킥과 싱코페이션(당김음)을 머금은 스네어.
윤태영은 이 많은 생각들을 그 짧은 새에 해냈구나.
‘대단하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윤태영을 보며 배운 게 많지만.
그리고 그가 뛰어난 것도 맞지만.
꼭 그의 방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내 방식대로.
내 시선으로 멜로디를 해석해보자.
‘텐션이 많은 만큼, 적당한 그루브를 낼 수 있는 리듬을 넣으면···?’
‘대중음악이니 너무 매니악하진 않도록.’
‘스윙 리듬 정도는 넣어도 되지 않을까?’
‘두 번째 박에서 벨로시티(강세)를 좀 더 주고···.’
생각들이 이어지고, 손이 바빠진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트랙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윤태영처럼 턱 하니 답을 내놓는 이가 없어서.
이번만큼은 답을 내놓아야 하는 이가 나여야 해서.
‘이건가···?’
‘이런 식이 나으려나?’
‘아니지. 이것보단···.’
하지만, 그래서인지.
‘이거네!’
답을 찾았을 때, 내가 얻는 건,
그 시간의 곱절이었다.
#조금은 고양된 기분이다.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질간질한 게,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윤태영에게 들려주면, 어떤 반응일까?
아이 같은 궁금증이 꿈틀댄다.
‘나도 어지간하네···.’
차갑게 식은 커피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직원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얼른 닦아놔야······.
‘···!’
식겁해서 떨어트릴 뻔했다. 커피잔을.
사람인지, 좀비인지, 아니면 그 경계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하서윤···?’
카운터 앞 소파엔 그녀의 매니저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하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왜 여기 있어요? 아니, 그보다 지금 시간이······.”
그녀가 찌릿, 날 노려본다.
“방해하지 말래서. 그래서 기다렸잖아요.”
어이가 없어서 눈을 끔뻑였다.
“왜···요?”
“확인할 게 있어서요.”
“···?”
잠시 그녀를 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의자를 끌어 앉자 하서윤이 헝클어트렸던 머리를 재빠르게 정리한다.
다행히 사람인 듯싶네.
“뭔데요?”
“그때 저 싫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말이 이상한데?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제대로 된 말을 끄집어냈다.
“작업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걸 말하는 거죠?”
“그래요. 그거.”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열기를 반복하다, 말했다.
“제가 그 이유 찾은 거 같은데. 듣고 맞는지 알려줘요.”
“그걸 확인하려고 기다린 거예요?”
벙쪄서 보는데, 하서윤이 답했다.
“네. 거절당한 경험이 아예 없는 편이라, 알아야겠거든요.”
“아···.”
“그리고, 알아야.”
입에 쓴 사탕이라도 문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고치든 말든 하니까.”
그녀의 말에 살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적응을 했나?
이제 이런 게 웃기네.
“알겠어요. 들어보죠.”
하서윤이 천천히 입을 연다.
“나한테 없는 게 박경호 씨한테는 있나요?”
“네.”
“최정아한테도?”
“네.”
“플로라한테도···?”
“···네.”
“······.”
무슨 스무고개를 하는 기분인걸?
잠시 막힌 것 같던 하서윤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보다 더 무겁게.
“제인한테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녀가 느릿하게 끄덕인다.
그리고 툭 던진다.
“맞네. 간절함.”
순간, 나도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그렇지 않을까? 싶던 걸 하서윤이 확인시켜준 기분.
···정말 그런 걸까?
그렇다면, 지금의 하서윤도 간절하단 얘기잖아?
질문에 답하듯, 귓가에 멜로디가 왕왕거리고 있다.
그 사이, 하서윤이 침묵을 깼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전 제인을 싫어해요.”
알지. 그거야, TKM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티를 그렇게 내고 다니니 모르기가 더 어렵지.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열일곱 살인가···그때 연습생으로 처음 봤는데, 깜짝 놀랐어요. 내 또래에 나보다 잘 부르는 애가 있다는 사실에.”
저런 말들을 풀어 놓는 게 의외라고 생각할 무렵. 하서윤이 살짝 뜬 톤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보다 잘 부르는 주제에···.”
여전히 쓴 사탕을 볼에 한가득 문 표정으로.
“간절하기까지 해서.”
고양이스러운 눈을 싱긋거리며 웃는다.
“진짜 재수 없지 않나요?”
대답하지 않자 그녀의 시선이 툭 떨어진다.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있다.
“근데, 좀 알 것도 같아요.”
“···?”
“제가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저 나름 간절해졌거든요.”
지긋이 그녀를 보며 귀를 기울였다.
나도 궁금했다.
뭐가 하서윤을 변하게 했는지.
“듣고 싶어졌어요. 제 멜로디가.”
심장이 훅 가라앉는다.
놀랐다.
그녀는 결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트럭 한 대가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내 표정이 굳어져서일까.
하서윤도 덩달아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연다.
“···다 말해버렸네. 적당히, 방해는 안 되고 신경은 쓰이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쓴 사탕들을 다 내뱉어내서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방해됐죠?”
“네.”
대답과 함께 하서윤의 표정이 음울해진다. 그리고 꾹 뭔가를 참는 듯 쪼그라들었다.
“퇴근하려고 했는데. 쩝.”
“···?”
무슨 소리냐는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들어가죠. 아직 컴퓨터도 안 껐고.
서윤씨 곡도 열려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