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87화 (87/221)

087. 의지와 의지 (2)

과거 두 번이나 차트 앞길을 막았던,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장기로 프로듀서.

하서윤은 그 이름값이 탐났다.

심지어 제인과 작업했음에도 그녀의 이름에 가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제인 팬들에겐 팬송을 만들어준 은인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찾아가야 했고, 얻어내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전혀 창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했었지.

‘가수가 유명한 작곡가를 찾아가는 게 어때서?’

그러다 녹음을 보게 되었다.

작은 충격이었다. 울림은 큰.

녹음 부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배우, 단역에 가까운 조연, 중고신인···.

하서윤에게 유리 너머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단순히 한 조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박경호는 부르지 못했다.

마이크가 무서운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굳었다.

‘어떡하려나?’

궁금해졌다.

이런 것까지 계산해서 부른 건 아닐 텐데.

자신에게 당당하게 와서 보라던 남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슬쩍 고개를 빼었다.

분명히 당황한 표정이······.

‘아니네?’

덤덤하다. 아니 그거론 부족하다. 부드럽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헤드셋을 낀다.

그리고 박경호에게 괜찮다며, 녹음을 미뤄도 된다고 말했다.

이후에 박경호가 한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 것도 같았다.

가수가 마이크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니까.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장 피디가 답했다.

‘알 것 같네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공감. 근데 그게 어설프면, 티가 나면, 오히려 역효과일 텐데.

하지만 뒤이어진 말들이 그런 생각들을 쓸고 내려갔다.

청산유수다.

마치 진짜 공감한 사람처럼.

아니, 진짜 겪어본 사람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작곡가로 데뷔하자마자 승승장구한 사람이···?’

더 놀라운 건 박경호의 굳어진 표정이 그의 말을 들은 직후부터,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거였다.

박경호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시도했고.

그대로 성공했다.

매력적인 중저음의 보이스가 멜로디를 그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깜짝 놀랐고,

거기서 끝난 게 아니란 것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여러번 부를 수록.

같은 노래인데, 같은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달라졌다.

저렇게 대단한 보컬이었다고?

그럴 리가.

아무리 이 바닥이 운이 중요하다지만, 이 정도였다면 운 따위 가볍게 무시했을 거다.

‘처음 제인을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자신에게 자격지심을 심어주었던, 그날이 스치고.

눈앞엔 자신의 성장에 희열을 느끼는 듯한 박경호와 이를 느긋하게, 하지만 날카롭게 지켜보는 장기로가 보였다.

순간, 하서윤은 여러 이름들을 떠올렸다.

최정아, 플로라, 제인···.

그와 작업한 이들의 모습이 유리 너머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유리에 자신이 비추어진다.

왜일까.

순간 부끄러워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일어나 나왔다.

지금도 그때 그랬던 이유를 하서윤은 알지 못했다.

“······.”

밀려오는 기억이 출렁댄다.

시뻘건 부대찌개처럼.

“···맛없어?”

매니저가 눈치를 보며 물었고.

하서윤이 그제야 수저를 다시 움직였다.

“아니. 맛있네.”

안도하는 매니저를 뒤로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도망치듯 나왔던 이유는 몰라도.

지금 다시 가는 이유는 명확하다고.

‘기로 프로듀서’의 이름값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옅어졌다. 대신 궁금함은 더 선명해졌다.

그가 자신에게 곡을 준다면.

그 노래가 기대한 것처럼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노래가 맞다면.

어떤 멜로디일까?

그리고 그 멜로디를 부르는 자신은···.

유리 너머의 박경호처럼 보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설레였다.

#“최정아 앨범 작업?”

말꼬리는 올라갔지만, 서재원 팀장의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다.

“정규를 낼 때가 되긴 했지. 그래서였군. 추가 인력을 요청한 이유가.”

“네.”

서재원 팀장의 표정에 아주 미묘하게나마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어떤 프로듀서도 아더 레이블에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엔지니어나 직원들은 이미 지원이 꽉 찼는데, 유독 프로듀서만 지원이 아예 없었다.

‘이유를 알 것 같긴 한데···.’

서재원 팀장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어린 나이에 능력이 뛰어나면 피곤한 거야.”

딱히 할 말을 고르지 못해 소리 없이 따라 웃었다. 차나 마시며.

그나저나 어쩐다.

못 해도 한 명 정도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아더 레이블 자체적으로 뽑자니 시간이 부족하다. 들어오는 데모의 양만 봐도 얼마나 몰릴지 짐작이 갔다.

‘그걸 일일이 확인하면서 뽑긴 힘들지.’

그때 서재원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아직 한 명 남았어.”

“···?”

“출근날짜 받은 친구가 한 명 있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거리는데, 서재원 팀장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공모전은 올해도 했으니까.”

그 말에 입이 벌어졌다.

날 이 자리에 올려놓은 시작.

그 공모전이 올해도···.

갑자기 흥미가 확 당긴다.

“혹시 이번에도 쌩 신인가요?”

“어. 자네처럼.”

어쩐지 서재원 팀장의 눈빛에 기대가 어른거린다. 그래서 물었다.

“제출한 곡이 마음에 드셨나 본데요?”

그가 끄덕인다. 웃음 지으며.

“어. 자네처럼.”

#어떤 사람일까? 신인이니까 아더 레이블로 지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었다. 신입이 정규 앨범을 함께 작업할 만큼 능숙할지가 미지수라는 것.

‘또 모르지.’

나처럼 과거로 돌아왔다거나.

아니면 애초에 시간 따위 뛰어넘는 천재라면 괜찮을지도.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내가 더 능숙해지면 되겠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반대편에서 날 보며 반색했다.

나이가 지긋한 건지 육안으로만 그런 건지 감이 오질 않는 중년 남자. 매니지먼트 임 팀장이었다.

“장 피디!”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자마자 숨을 고른다.

헐레벌떡 올라온 것 같은데···?

“아, 요즘 소식 잘 듣고 있어. 아니 사실 소식이 끊긴 적이 없지. 그것도 좋은 소식들만. 대단해 진짜.”

갑작스러운 금칠에 당황하는데, 그가 물어왔다.

“회사엔 웬일이야?”

“다음 작업 관련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어서요.”

그러자 그의 눈빛이 변하게는 게 느껴졌다.

“다음 작업?”

고개가 돌아가며 라운지를 훑더니.

“장 피디. 시간 좀 괜찮나?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걸쩍지근한 느낌이 들었지만, 본사의 팀장이다 보니 바쁘다고 거절하긴 애매했다. 게다가 눈가의 눈그늘이 참 짙다.

“그러시죠.”

라운지 창가 자리에 앉자, 임 팀장이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실토했다.

“요새 하서윤이 거기로 출근 도장을 찍는 다더라고.”

“그랬었죠. 요즘은 안 보이는 중입니다.”

“그래? 흠······.”

미간 골이 깊어진다.

실시간으로 늙는 한 남자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침음성을 삼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거기로 폭탄을 던져서 미안해. 사실 던진 건 아니고 걔가 알아서 굴러간 거긴 한데···원래 컨트롤이 안 되는 애다 보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는다.

“지난 활동 때 방송 출연 안 해서 실적이 죽을 쒔단 말이지. 그런 이미지 굳어지기 전에 얼른 앨범 내고 활동을 해야 하는데, 자네 곡 아니면 안 하겠다는데 어떡해. 본부장님도 설득 못 하는 애야.”

“죄송합니다. 일이 많이 몰렸었고 그중에서 고르다 보니 매니지먼트팀의 요청은 거절했었습니다.”

“아, 장 피디가 죄송할 일 아니지. 바쁜 것도 알고. 이 업계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어. 게다가 대표까지 달았으니 레이블 식구도 챙겨야 할 테고.”

그가 아쉬운 대로 부탁을 해온다.

“무조건 해달라는 건 아니고, 만약에 또 거기에 출몰하면 재고는 한 번 해달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싫다고 하나.

출몰이란 말에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서글서글하게 웃는 임 팀장에게 인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로소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한쪽에 구석에 기대며 생각했다.

‘하서윤이 또 출몰하면 이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이긴 하지.

뭐 그래도.

그렇게 나가고서 다시 돌아온다면···.

뭔가 달라졌다는 거 아닐까?

#“하서윤씨 안쪽에 와있어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직원이 속삭인다.

진짜로 출몰했네.

제 말 하면 오는 게 호랑이면 족한데 말이지.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서자 하서윤이 고개를 든다.

나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뭐라 말하려 입을 여는데, 그녀가 재빨리 먼저 말했다.

“왔어요?”

“······.”

똑같은 말투. 똑같은 톤.

데자뷔라고 착각해도 될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다른 이들이 알 수 없는 차이.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커서 머리가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하서윤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여기 연습실만 빌릴게요. 알다시피 TKM 연습실이 몇 개 없잖아요.”

“···.”

“방해 안 할 거예요.”

“···.”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나씩 추가한다. 계속 가만히 있으면 뭘 걸 기세다.

“진짜로.”

으쓱거리는 하서윤을 보며 입 사이로 살짝 바람이 샜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하서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나름대로 신선한 광경이다. 부릅뜨는 것만 봤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툭 내뱉은 말에 하서윤의 큰 눈이 빠르게 돌아왔다.

“정말요?”

“네. 대신 정말 방해하지 말고요.”

“약속해요.”

“곡 달라고도 하지 말고요.”

“앗. 그건······.”

“······.”

“알았어요···.”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숙주마냥 숨이 죽는 하서윤을 보며 이전과는 다른 기분을 느꼈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조금은 순둥순둥해졌달까. 이렇게 안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니.

마침 잘됐네.

“아, 그리고.”

“···?”

다시 고개를 드는 하서윤을 보며 손가락으로 입구 쪽을 가리켰다.

“화환 잘 썼어요. 이제 가져가 줘요.”

“네?”

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반납.”

#하서윤이 3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작업실로 들어와 앉았다.

막 내려온 커피잔을 앞에 두고.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아까부터 입안에서 맴도는 말이 있다.

‘얄궂네.’

도통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것도 하서윤에게 멜로디가 들렸다는 게.

‘하서윤이 그날 이후로 뭔가 변한 건가···.’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 될 수밖에 없었다.

가만.

‘그러면 안 들리던 사람에게도 어느 순간 듣게 될 수 있다는 거네?’

이 능력이 무슨 양파 같다.

까도 까도 새로운 면이 계속 나와.

단색으로 칠해진 퍼즐처럼.

어디에 맞춰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걸 맞추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이 능력이 대체 뭘 가리키고 있는지.’

해결 못 할 궁금증들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한 가지가 남는다.

하서윤에게 들은 멜로디.

빈칸이 숭덩숭덩 나 있는 문장을 보는 것 마냥, 간지럽다. 채우고 싶다. 무슨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일단 완성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문장이 완성되면.

그래서 이 멜로디가 하고자 하는 말이 조금 더 명확해지면.

그땐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곡을 내가 해야 하는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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