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의지와 의지 (1)
카운터 옆. 직원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바깥 자리에 홍보 담당자, 주재윤이 앉아 있었다. 그의 책장 자리로 다가간다. 지나가다 발끝에 걸리는 스툴 하나를 집어다가 그의 옆에 두고 앉았다.
“재윤 씨.”
“아, 피디님.”
“보도자료는 다 만들어졌나요?”
“네, 그럼요. 말씀하신 날짜에 뿌리려고 대기 중입니다.”
주재윤이 모니터 하나를 내 쪽으로 스윽 돌렸다.
거기엔 박경호의 사진과 함께 구구절절한 스토리들이 잔뜩 적혀있었다.
이미 한차례 보도가 되었던, 중고신인 박경호의 이야기. 거기에 이번에 추가될, <가장 너다운 날씨에> 타이틀 곡에 참여하게 되었단 내용까지.
내가 모니터를 쭉 읽어내려가는 사이, 주재윤이 고개를 저으며 감탄한다.
“이거 적어놓고 보니 진짜 영화 시나리오가 따로 없더라고요. 아시죠? 제 꿈이 영화감독이었던 거.”
회식 자리에서 들었던 것도 같다.
“제가 영화감독이었으면 이걸로 영화 하나 만들었어요, 진짜.”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뭔데요?”
“저요? 클레멘타···.”
“저희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넵···.”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주재윤이 잠깐 조용하다,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요새 하서윤님이 안 보이시네요. 선녀 옷을 찾아 올라가셨나···.”
그것보단 프라다를 입으러 가지 않았을까?
“옆에서 봤는데도 선녀 소리가 나와요?”
“왜요. 전 더 팬 됐는데.”
“···?”
“솔직히 이전까진 그냥 섹시하고 도도한 실력파 여가수? 정도였는데 실체는 완전 츤데레시더라고요. 남자라면 안 좋아할 수가 없죠.”
희한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하긴 하다.
그렇게 가서 뭘 하고 있으려나.
정 대리 말론 TKM 사옥에도 출몰하지 않는다던데. 정말 해외여행이라도 갔나?
주재윤에게 보도자료 올리면 바로 링크를 쏴달라 부탁하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퍼뜩 드는 생각에 멈춰섰다. 당장에 필요한 건 아니지만,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지금 말해둬야겠지.
“지희 씨.”
“네···!?”
화들짝 놀란 얼굴이다.
며칠 전 회식 이후로 계속 저 상태다.
저 정도면 이불이 아니라 지붕을 걷어찼겠는데?
“저 다음에 말 걸까요?”
“아뇨!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급하게 손사래를 치는 김지희에게 말을 이었다.
“정아 이번 활동 끝나면 정규 앨범 내려고 하거든요.”
“정말요?”
“네. 근데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TKM 쪽에 프로듀서 지원 좀 요청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회식 때 막 헛소리를 늘어놔서······.”
다음 날 아침, 이불이 아니라 지붕을 걷어찼을 것 같은 표정이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눈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전 진심이었어요.”
“네···?”
“잘해주고 있다는 거요.”
#보도자료가 뿌려졌다.
아더 레이블이 모셔간. 기로 프로듀서가 선택한. 그리고 동시에 <가장 너다운 날씨에>에 출연하는 그 박경호가.
드라마 OST를 부른다는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였다.
주재윤이 링크를 보내왔을 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단 이후였다. 그가 나에게 늦게 보내준 건가? 싶을 정도였다. 고작 십 여분 사이에 사람들이 그만큼 몰린 거다.
엄청난 관심이었다. 이 관심을 이용해 판을 짰던 나로서도 새삼 놀랄 만큼.
중고신인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와 이 성공 스토리가 대중들에겐 어떤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진 것 같았다.
‘이제 이 관심이 방영 당일까지 이대로만 쭉 이어지면 되겠네.’
그러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쭉 이어지긴 했는데.
위로 이어졌다. 그것도 가파르게.
예고편의 퀄리티, 배우들의 인지도, 그리고 박경호의 화제성까지 연달아 터지며,
방영일 직전이 되어선 메인 예고편 조회 수가 2배가량 뛰었고.
게시판에 기대한다는 수많은 댓글이 끝도 없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드라마가 방영되는 월요일 저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맥주 사 왔어요?”
“네, 냉장고에서 꺼내올게요.”
“과자도요!”
음원 발매를 기다리는 건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기다리는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근처 호프집이나 횟집에서 회식 겸 자정을 기다렸다면, 오늘은 그보다 일찌감치 업무를 정리하고, 남을 사람들만 남아 사무실에 앉아 있다.
회의용으로 산 티비를 가운데로 끌어다가 틀어놓고 말이다.
덕분에 나도 일하다 말고 직원 사무실로 불려 왔다. 원래는 작업실에 앉아 모니터로 보려고 했었는데···.
여직원이 궁상이라며 끌어냈다.
그렇게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은 여직원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막 시청률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그러던데!”
그러자 주재윤이 웃었다.
“경호 씨가 가 있는 제작진 쪽은 실제로 그러지 않을까요?”
“아쉽네. 나도 시청률 바로바로 알고 싶은데. 경호 씨한테 물어볼까요?”
“그러다가 안 좋으면 어쩌려고요. 지금 다른 경쟁작들도 장난 아니라서 혹시 몰라요.”
그러면서 옆에 있는 직원들에게 묻는다.
“어때요? 지금 반응은?”
모니터에 머리를 박은 직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경호 씨 이전 노래 들어보니 목소리 정말 좋다고, 이번 OST 기대한다는 얘기가 꽤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그냥 경호 씨가 이번엔 잘 됐으면 좋겠다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주재윤이 긴장되는 듯 손바닥을 비볐다.
“이제 드라마만 잘되면 충분히 음원도 그 힘을 받겠네요. 그러면······.”
동시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거지.
연기자로서의 박경호와 뮤지션으로서의 박경호를.
“그나저나, 경호 씨 노래가 드라마 씬 내에서 언제 처음으로 나오는지가 궁금하네요.”
“맞아요. 그게 은근히 영향이 있다더라고요.”
그건 나도 궁금하다.
아직 음원도 없고, 예고편이든 메이킹 필름이든 어디에서도 아직 쓰지 않았으니.
사실상 대중들에게 첫 공개가 되는 순간일 텐데···.
어떤 장면이려나.
“어, 시작한다!”
맞춰진 채널에서 <가장 너다운 날씨에>가 시작되었다. 동이 트는 장면을 시작으로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기 나오기 시작한다.
주인공, 정민아가 알람 시계를 내리치듯 끄면서······.
지이이잉.
선반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
드라마 말고. 내 거다.
위치가 얇은 철판 위라 꽤 큰 소릴 냈다. 그러자 날 쳐다보는 직원들.
“어, 미안해요.”
여직원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영화 시작했는데 에티켓 좀 지켜주시죠. 대표님.”
드라마겠지.
웃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음···.
“저 시청률이 몇 프로면 괜찮은 거예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최근 시청률 추세를 잘 모르니 감이 안 온다. 예전엔 막 40프로 넘고 그러지 않았나?
직원들이 저마다 의견을 낸다.
“10프로만 넘어도 요즘은 대단한 거 아녜요?”
“그래도 15프로는 넘어야 대박이라고 할 수 있지.”
“에이, 요즘 15프로 넘긴 드라마 몇 안 될걸요? 일일연속극이 아닌 이상.”
이에 내가 말했다.
“어쨌든, 15프로 정도만 넘어도 괜찮다는 거죠?”
“그럼요.”
“근데 그건 갑자기 왜요?”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시청률이 16프로였다네요. 괜찮은 출발인 거죠?”
“······.”
“아닌가?”
다들 눈들이 커지고 있다. 입도 함께.
“1화 시작부터요!?”
#다들 초 흥분 상태로 드라마에 집중했다.
누가 보면 제작진인 줄 알겠네.
박경호가 뜨문뜨문 나올 때마다 무슨 월드컵 축구 선수 교체 마냥 박수를 보냈다.
‘역시 특이한 사람들.’
입 밖으로 이 얘길 꺼내면 세상 억울한 눈으로 ‘피디님이 더요.’라고 말하겠지만.
어쨌든, 나도 눈을 떼기 힘들 정도다.
가 편집본을 봤는데도 재밌다.
앞으로 극을 이끌어갈 주연들의 개인사들이 쫙 펼쳐져 나오며 각각의 캐릭터를 확고히 잡아간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잔웃음과 짠함을 발 바꿔가며 선보였다.
그러다 직원 중 하나가 의문은 던졌다.
“근데 생각해보니까···아직 경호 씨 곡 안 나오지 않았어요?”
“어, 어 그러게?”
“너무 재밌어서 그것도 모르고 봤네.”
한 시간이 넘어갔다.
1화가 곧 끝나겠지.
아니나 다를까, 여주인공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다들 이렇게 끝나나, 싶어 놀란 눈을 하는데, 마무리 짓는 대사 너머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비춰진다.
이어서 주연들의 하루가 마무리되는 것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대사도 나레이션도 더는 없었다.
박경호의 ‘너다운’이 깔려, 그들이 사는 세상을 대변했다.
마침내 첫 화가 끝나고.
누군가 말했다.
먹먹한 목소리로.
“로코라며.”
“끝날 때 다 돼가는데 우리 노랜 언제 나오는 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넣을 줄이야···.”
“연출 너무 좋지 않았어요? 노래랑 찰떡.”
내심 놀랐다.
영상과 음악이 만났을 때 주는 효과가.
내겐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인터넷 반응을 잠시 확인했지만 오래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직원들 반응을 똑 닮아 있었으니까.
대신 걸려오는 박경호의 전화를 받았다.
배우와 제작진의 것으로 추정되는 왁자지껄한 소음들.
“드라마 잘 봤어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윽고 묵직한 박경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디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뜸을 들이다, 말한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뭘 두 번씩이나.”
피식 웃으며 답하자, 박경호가 말했다.
-방금 건 순수한 감사였어요. 절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거에 대한.
“···.”
-다 감사해요. 그중에서 가장 감사한 건, 자신감 되찾아 주신 거.
소리 없이 웃다가 답했다.
“역시 이유가 있었죠?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온 거요.”
내 말에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그러게요. 이번엔···해냈네요.
#사람 몸통 만한 고급 스피커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윽고 반주도 함께 흩어지듯 사라졌다.
“자존심 상하지만···여전히 좋네.”
스피커가 잘게 토해내는 여운을 들으며.
하서윤은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했다.
“······.”
그런 하서윤을 보며 매니저는 배고픔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아침 일찍 불러놓고, 노래나 듣고 있다니.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났는데, 다행히 스피커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나 보다. 들렸으면 보나 마나 한소리 했을 테지.
“노래 좋았지?”
질문이 던져졌다.
매니저는 저걸 어떻게 받아야 하나 고민했다.
애초에 가시 돋힌 질문이라면 손바닥이 남아나질 않으리라.
“그게···.”
“당연히 좋았겠지. 내가 듣기 좋을 정도였는데.”
“그, 그치. 또 서윤이 귀가 모차르트 뺨치지!”
피식 웃은 하서윤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어딜?”
“한동안 안 갔잖아. 기다리겠네.”
“···그니까 어딜?”
“아더 레이블.”
매니저는 거기에 널 기다리는 사람이 어딨어? 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새하얀 잠옷(?)으로 대리석 바닥을 다 쓸며 옷 방으로 들어가던 하서윤이 잠깐 멈춰 서서 매니저를 돌아봤다.
“아. 가기 전에 밥 먹고 가자.”
“어? 너 원래 아침 안 먹잖······.”
“아 몰라. 그냥 배가 고파. 그니까 오빠가 맛있게 먹었던데 추천 좀 해봐. 가격 신경 쓰지 말고.”
“그, 그래!”
순간 하서윤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맛없으면 식당 바닥에 드러누워서 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