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85화 (85/221)

085. 봄

손을 휘적거리며 직원들과 일별했다.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들이 오가고. 어둑한 새벽길로 빠져들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여보세요?’라는 음성이 들려온다.

최정아였다.

“어, 방금 막 회식 끝났어.”

-회식이요?

회식의 이유(?)를 설명하자 그녀가 주억거리는 소릴 냈다.

-아아, 기영씨 소식 봤어요. 차트 1위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어. 내일 꼭 전해줄게.”

최정아는 여전히 한국이 아니다.

잠깐 들어왔었지만, 다시 또 나갔다.

이번엔 조금 더 멀다. 발리란다.

화보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그것만으로도 24시간 31일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럴만한 비주얼이긴 하지.’

특히나 연예인으로서 가꿔지기 시작한 최정아는 더욱 그렇다. 직원들의 말을 빌리자면, 웬만한 여배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가 되었다고.

“거기도 밤이지?”

-네, 촬영 끝나고 들어와서 쉬고 있었어요.

청담 사거리에 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오늘따라 청담답지 않게 공기가 좋다.

봄이 성숙하게 익었다.

“촬영은 잘 돼?”

-네, 익숙해진 것 같아요. 오늘도 포즈 칭찬받았어요.

“그랬어?”

-아 그래서 제가 사진을······잠시만요?

최정아의 목소리가 훅 멀어진다.

전화로는 3일에 한 번꼴로 듣는 목소리.

하지만, 실제로 만나서 듣는 건 꽤 오래되었다. 무려 미국 가기 전이었으니까.

‘혹시.’

궁금해진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최정아니까.

하루에도 몇 시간씩. 모든 스케줄이 끝난 후에도 목을 가다듬는 그녀니까.

또다시 벽을 깨지 않았을까?

들려오는 멜로디가 변하지 않았을까?

그때 핸드폰이 연달아 울렸다.

뭐가 들어온다. 최정아가 보낸 사진들이었다.

-B컷들이긴 하지만···제가 피디님 보여드리려고 작가님한테 졸라서 받았어요. 보정되면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셔서.

엄지로 툭, 툭. 사진을 넘기며 내심 감탄했다. 기가 막히네. 이게 B컷들이라고?

“보정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헤, 진짜요?

“그렇다니까. 야, 정말······.”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사진들이 훅훅 넘어가다가, 봐버린 것 같다.

방금, 수영복 사진이었나···?

어느새 엄지가 뻑뻑하다. 타짜가 패를 쪼듯 전 사진으로 넘겨보았다. 역시나. 수영복이다. 그것도 비키니.

-정말? 정말 뭐요?

“어, 어? 아냐. 잘 했네.”

뭐라는 거야. 뭘 잘해.

사진을 닫았다.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억도 싹 털어내고.

“그으래서. 그 뭐냐. 밥은 먹었어?”

-아까 먹었죠. 여기도 지금 새벽이에요.

“아. 그렇지······.”

-원래는 좀 더 일찍 전화하려고 했는데, 회식하신다길래 수영장도 가보고, 노래 연습도 하고.

수영을···했어?

사진이 다시 아른거리려 하길래 얼른 다른 주제를 떠올리려 했다. 쉽지 않다. 다행히 최정아가 먼저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기영씨 진짜 대단한 거 같아요. 차트 줄 세우기라니······.

늘어지는 말꼬리에 부러움이 치덕치덕 묻어있다.

순간, 내가 대답이 없자 최정아가 민망한 듯 다짐했다.

-전화 끊으면 노래 연습을 해야겠어요!

마침 바람이 분다.

머리에 덮여있던 얇은 고민을 들출 만큼.

그러자 언젠가부터 항상 상기하고 있던 생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쉬엄쉬엄해. 목도 쉬어야지.”

-더 잘 부르고 싶어요. 더 잘해 내고 싶고.

“그래도 쉬어.”

-···?

단호한 대답에 잠깐의 마가 떴다.

내가 말했다.

“오면 많이 써야 되니까.”

-네? 그게···.

“내자. 정규앨범.”

질렀다.

멜로디가 변했는지, 혹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서.

왜 그랬을까.

막상 최정아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서 멜로디가 들리지 않음을 확인하면.

‘다음에 하지 뭐’

-라고 넘기게 될까 봐. 근데 그러면 평생 멜로디만 쫓으며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되긴 싫어서.

이런 굉장히 자기 발전적인 이유들이 곱게 깔려있다.

하지만 살랑살랑 불러오는 바람이 그걸 또 들춰낸다.

그냥······.

‘서기영을 부러워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구나.’

마침, 청담 사거리의 신호가 바뀌었다.

걸음을 옮긴다. 하얀 선들이 꿀렁거렸다.

내 결정에 심장이 점점 크게 뛰고 있었다.

만약 멜로디가 없어도 해낼 수 있을까? 라는 부담과.

그렇더라도 꼭 해내고 싶다, 라는 벅참.

아무래도.

봄은 내가 타나 보다.

#“······.”

핸드폰이 툭 떨어진다. 새하얀 침대 위로.

최정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새 살짝 습해져 있던 눈가가 마르며, 입가에 미소가 화사하게 번진다.

어두운 바다를 보는 눈빛이 밝다.

“그럼, 오늘은 쉬어야겠다.”

작은 중얼거림.

들뜬 목소리가 사뿐거린다.

설렘이 진정 되지 않는지, 침대 주변을 빙빙 돌던 최정아가 갑자기 베개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파에 있는 쿠션들까지 싹 긁어와 침대를 빙 구른다. 그 위에 이불을 깔자, 가운데만 움푹 들어간 둥지가 만들어졌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이불에 파묻혀 가늘게 호를 그린다.

“좋다······.”

#최정아에게 앨범을 약속하고 며칠 동안.

머릿속엔 그에 대한 생각들이 가득 채워져 계속 커져갔다. 빈 공간이 전혀 없을 정도로.

적어도 여섯 트랙.

홀로 채우긴 역부족이겠지.

서기영은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작업해온 자작곡들이 쌓여 있기에 가능했던 거고.

그렇다고 최정아보고 몇 년을 기다리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성원과 비스트로는 색이 맞지 않는다.

그러면 작곡이 가능한 건 나와 서기영 정도인데, 둘이서 여섯 곡도 버거울 것 같다. 서기영은 방송 활동까지 스타트를 끊은 상황이니 더더욱.

‘프로듀서가 더 필요하겠는걸.’

정신없는 와중에도 박경호의 OST 작업이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행이지.

<가장 너다운 날씨에> 첫 방까지 일주일.

마스터링까지 끝난 음원을 이 스피커, 저 스피커에 연결해보며 계속 테스트 중이다. 최대한 많은 스피커에서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뽑아내기 위해서.

“확실히 이 스피커가 플랫 하네요.”

음원 확인차 온 박경호가 얇고 길쭉한 스피커를 가리켰다.

“네, 옆에건 베이스용이라···. 방송국 가는 김에 차에 달린 스피커에서도 한 번 들어봐야겠네요.”

내 말에 박경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오늘이셨나요? 감독님들이랑 작가님 만나러 가시는 게?”

“네. 학부모 상담이랄까요.”

박경호가 점잖은 웃음을 흘린다.

자리를 정리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출발해야겠네요. 차 막힐 시간이니.”

“넵. 다녀오세요.”

박경호를 뒤로하고 녹음실을 나가려다 멈춰섰다.

“아 경호씨.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죠?”

두 눈이 끔뻑인다. 당연한 소릴 들은 듯.

“네. 좋아하죠?”

나는 고갤 끄덕였다. 그러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연기도 좋죠?”

#‘네, 연기도 좋습니다. 재밌어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박경호는 양쪽에 모두 흥미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흥미만 있어 보였다면 물어보지 않았으리라.

‘양쪽에 재능이 있지.’

노래는 멜로디가 이를 보증했고.

연기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여러 사람들에게 확인을 마쳤다.

굳이 최정아 앨범이 머릿속에 꽉 들어찬 와중에 드라마 업계의 인물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가수와 연기자.’

시도는 많지만 두 가질 모두 잘 해낼 수 있는 경우는 드물지.

그런 드문 인재가 내 뮤지션, 아티스트로서 커나갔으면 좋겠다.

차에 시동을 걸고서 블루투스를 연결했다.

음원을 적당한 볼륨에 맞춰놓고 브레이크를 뗐다.

‘차에서도 듣기 좋네.’

테스트를 마치고. 최정아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놓고서.

방송국으로 향하는 내내 생각을 굴렸다.

곽 감독과 홍 작가.

그들을 만나서 뭘 얻어낼 수 있을지.

#“오, 장 피디!”

회의실로 들어서자, 정준철 감독이 산적 같은 목소리로 날 맞이했다.

옆에는 호탕하게 웃고 있는 곽 감독이 보인다. 진짜 산적은 따로 있었네.

“반갑네.”

투박한 인사를 나누고서 가장 끝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날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목인사를 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도움 많이 받고 있어요.”

도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홍 작가겠지 싶었는데, 아닌가?

작가가 나한테 도움받을 일이 뭐가······.

“작곡가님의 곡이 너무 좋고, 드라마랑 정말 잘 어울려서 요즘 대본 쓸 때마다 꼭 틀어놓고 있어요. 노랠 들으니까 글에 이입이 더 잘 돼. 막히지도 않고.”

아, 그런 얘기였구나.

옆에서 곽 감독이 거들었다.

“덕분에 나도 편해. 홍 작가님이 대본은 정말 기똥차게 쓰시는데, 항상 손이 느리셔서 애가 탔거든. 근데 요즘은 날짜에 맞춰서 딱딱 보내주신다니까?”

“진짜 큰일 났어. 다음 작에 글 안 써지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그때도 장 피디한테 곡 맡겨야지.”

“장 피디가 해줘야 말이죠.”

회의실인지 기내인지 모르겠다.

비행기를 이렇게 태우나.

옆에선 정준철 감독이 흐뭇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곡에 대해 칭찬하던 홍 작가가 잠시 차로 목을 축이는 사이.

곽 감독이 넌지시 물어왔다.

이쪽이 탐내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근데, 경호 그 친구 말이야···.”

늘어지는 말꼬리에 귀를 기울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번 작 끝나면 아무래도 음악 작업을 열심히 하겠지?”

“그렇겠죠?”

“흠. 그치, 그렇겠지. 노랠 그렇게 잘 부르는데. 장 피디면 계속 좋은 곡을 줄 능력도 있고.”

곽 감독이 볼을 긁적이며 말한다.

퍽 어색하게.

이 양반이 연기를 하네.

“근데, 참 아쉬운 게 연기도 너무 잘해. 이게 두 가질 다 가지기 쉽지 않은 데 말이지.”

부리부리한 눈이 순한 양처럼 나를 향한다.

“마침 내가 최근에 검토 중인 작품들이 있었는데······여기에 그 친구한테 딱 어울리겠다 싶은 작품들이 툭툭 걸리네?”

대충 어떤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박경호가 탐이 나는데. 나도, 아더 레이블도 음악에 치중되어 있으니 아쉽다. 중간중간에 연기도 좀 하게 해주라.

뭐, 이런 뉘앙스였다.

“참 아쉬워.”

“그러게요. 아쉽네요. 근데 경호씨가 워낙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요.”

“···?”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지 고개가 올라갔다.

내심 내가 덥석 물 줄 알았나 보네.

“저도 음악 레이블의 근간을 흔들 생각은 없어서, 당분간은 음악에 집중하지 않을까 싶네요.”

“아니 뭘 또 근간까지야···.”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진미가 갑자기 발이 달려 달아난 것 같은 표정이다.

이쯤이면 됐으려나.

“이번 드라마에서 연기로도 확 주목을 받는다면 모를까요···.”

“응? 주목이야 당연히 받지! 연기를 잘한다니까? 그 친구가.”

“드라마가 연기만으로 될까요? 전 잘 모르지만, 들어보니 역할 따라가는 게 7할이라던데······.”

순진한 척. 능청스럽게 그의 말에 대응했다.

“어어? 그치. 역할 중요하지.”

곽 감독의 시선이 돌아갔다. 홍 작가를 향해.

홍 작가도 감독을 본다.

눈빛이 오가는 가운데 옆에서 정준철 감독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날 보는 표정이 무슨 천연기념물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충분히 내 의사가 전달 된 것 같네.

비중 더 올려줘요.

음악을 하고 싶은 거지, 연예기획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고로 배우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뮤지션이 연기에 재능이 있고, 하길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결국, 그런 것들이 또 다른 무기가 되어 음악 활동에도 도움을 줄 테니까.

그러니 박경호는 양쪽에서 모두 성공하도록 만들어 볼 생각이다.

모르잖아.

언젠가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는 박경호를 보게 될 수도.

‘너무 먼 미래인가?’

왠지 아닐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