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Original Sound Track (1)
며칠간. 계속. 뚫어져라.
내게 들어온 일들을 보았다.
레이블 소속 뮤지션들이 바쁜 스케줄로 강제 공백기인 터라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언론에선 거듭된 성공에 펌핑을 해대고.
회사에선 대표 자리까지 줘서 띄웠는데.
어떻게 부담이 안 될 수 있겠나.
이 상황에 첫 단추가 손에서 미끄러지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렇기에 뇌 주름이 싹 다 펴질 정도로 고민했다.
그럴수록 자꾸 아쉬워졌다.
‘멜로디가 들렸으면.’
모르는 길을 한참 가다가 갑자기 내비게이션이 툭 꺼진 기분이다. 동시에 수없이 갈라진 갈림길에 직면한 상황이고.
애타더라. 나도 모르게 고르고 있더라.
‘이 중에 멜로디가 들릴만한 선택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런 작은 기획사의 의뢰를 받으러 갔는데, 딱 들려온다거나.
희망 사항이 분수처럼 샘솟았다.
아마 그때쯤, 하서윤이 나타났고···.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성공의 방정식을 맞추고 싶어 안달 난 내 모습에 위화감을 느낄 무렵.
눈에 계속 걸리는 프로젝트가 생겼다.
드라마 OST.
솔직히 내가 드라마와 친한 인생은 아니었지. 남들이 다 봤다는 드라마도 찍어 먹어보지도 못한 게 수두룩하다.
영상매체에 흥미가 없었다기보단, 시간이 없었달까.
그런 내게 들어온 드라마 OST가 계속 눈에 밟혀 은근히 신경 쓰였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정말 한 레이블의 대표답지 않고.
정말 음악 못해 죽은 사람다운 이유였다.
‘재밌어 보여서.’
흥미가 돋았고, 관심이 자랐다.
성공한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냥 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제는 미래를 모른다는 것.
아무리 뒤져봐도 기억에 없었다.
드라마를 봤어야 알지···.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허우적거리진 않고 계속 습작을 만들었다. 멜로디 의존증이 돋는 걸 쳐내기 위해.
천천히 성장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만끽하며 부담감을 몰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했지.
#<가장 너다운 날씨에>
큼지막하게, 명조체로 적힌 글씨가 책상 위에 올라있다. 도톰하다. 시나리오라고 하는 거겠지.
고개를 드니 퀭한 눈의 남녀가 날 보고 있다. 요상하게도 그중 중년 남자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당연히 거절하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중년 남자, 정준철 감독의 말에 옆에 있던 직원이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마치 ‘아니었잖아?’라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르는데 조금 신중했습니다.”
“아 하긴, 프로듀서님께 들어간 의뢰가 많을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조금 느긋하게 기다렸죠. 하하핫.”
“···?”
직원의 표정이 기묘해진다.
어쨌든, 간단하게 오해를 풀고 일 이야기로 넘어왔다.
시나리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앞에 놓인 책자를 넘겼다.
정직한 로코물이었다. 그리고 드라마 측이 내게 원하는 건 이 로코물의 타이틀 곡이었고.
얼추 내용설명이 끝나자 다음은 자연스레 가창자에 관한 얘기로 넘어왔다.
옆에 있던 직원이 얼른 입을 연다.
“보통은 OST를 부를 가수를 먼저 정하잖아요? 근데 저희 감독님은 피디님께 사정사정해서 작곡가님을 먼저 정하셨어요.”
생색을 낸다. 당연히 그다음은.
“그래서 말인데, 최정아 씨가 보컬이면 어떨까요? 로맨틱 코미디에도 정말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하거든요.”
원하는 게 튀어나온다.
최정아라···.
‘정아가 스케줄이 되려나?’
아니, 그건 그거고.
“일단, 가창자는 3회 분량을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분위기가 어울리는지가 중요하니까요.”
직원의 얼굴에 실망한 얼굴이 서리는데, 오히려 정준철 감독은 내가 뭐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기세다.
“맞는 말이죠. 역시! 영상매체에 음악을 씌우는 건 예민한 작업이니까요.”
그러는 자신의 상사를 직원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본다.
제일 당혹스러운 건 난데.
정준철 감독의 성격이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나에게만 그런 건진 몰라도.
호의가 계속되니 둘리든 뭐든 될 것 같다.
과장 조금 보태서 열렬한 팬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그것도 아저씨 팬을.
‘적응이 안 되네.’
미팅은 순탄하게 끝이 났다. 오히려 감독과 직원 사이에 의견이 안 맞는 경우가 있으면 있었지.
3회분을 전달받은 후 다시 연락하겠다며 미팅을 마쳤다.
회의실을 나선다. 정준철 감독과 직원과 함께.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양쪽으로 녹음실들이 슥슥 지나간다. 여긴 어떤 형태의 룸인가, 어떤 장비를 쓰나. 그런 것들을 구경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
정준철 감독이 문 앞에 다다라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다 시선이 내 뒤쪽으로 넘어간다.
“어, 경호 왔어?”
돌아보자 한 남자가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날렵한 콧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잘생긴···당연히 배우겠지?
날 보자마자 심봉사마냥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이번 저희 드라마에 출연하는 조연인데. 오늘 목소리 녹음할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역시나. 잘생기고 예쁘긴 가수나 배우나 매한가진데, 뭔가 둘 사이를 구분 짓는 분위기가 있다. 남자는 후자 쪽이었고.
“알지? 기로 프로듀서님.”
정준철 감독이 말하자마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세요.”
순간 동굴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묵직한 중저음의 보이스가 들려왔다.
그리고.
“···.”
“···?”
귀가 왕왕 울린다.
메아린가···?
‘그럴 리가.’
멜로디였다.
*“1화에 주연들 위주로 나레이션이 들어가요.”
유리 너머로 남자가 콘덴서 마이크의 각도를 맞추고 있다. 꽤나 능숙하게.
이름은 박경호.
나이는 서른이라고 했던가.
“저 친구 배역이 큰 배역은 아닌데,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나레이션에 포함 시켰죠. 1화에 기대되는 씬 스틸러랄까요.”
녹음실에까지 따라 들어와 정준철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온 마을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네.
다시 박경호를 보았다.
그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굉장히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내 표정도 딱 저럴 거 같은데···.
이윽고 정준철 감독의 리드 하에 녹음이 시작되었다.
모니터에 1화의 한 장면으로 보이는 영상이 틀어지며, 박경호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시작한다.
나는 잠시 모니터를 보다가 이내 박경호를 응시했다.
“저 친구 긴장했나 보네. 장 피디님이 오셔서.”
정준철 감독이 껄껄댔다.
하지만 지금 대답할 여력이 전혀 없다.
박경호가 읊는 나레이션을 들으며, 그리고 머릿속으론 아까 들었던 멜로디를 되새김질하며, 매칭 하는 중이거든.
저 목소리로. 이 멜로디를.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흐릿하다.
노래 부르는 걸 보면 선명해질 것 같은데 말이지.
아쉬움 담긴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왜 들렸을까?
배우인데? 뭐, 남몰래 노래하는 취미를 가진 배우라도 되는 건가?
의구심이 점등되어 반짝이는데, 옆에서 정준철 감독이 계속 떠들었다.
“저 친구가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노래도 잘 한다더라고요. 아직 들어보진 못했는데.”
“···?”
고개가 돌아갔다. 정준철 감독은 별 이상함을 못 느끼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배우는 부업이고. 보컬 트레이너를 한다더라고요. 아주 예전엔 앨범도 하나 냈다던데···.”
#레이블 사무실로 돌아오며 박경호의 앨범을 찾아냈다.
검색해 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브리드’라는 그룹명으로 활동했던, 거의 무명에 가까운 R&B 뮤지션.
곧장 음원을 찾아 재생했다.
‘노래를 부를 땐 이런 느낌이구나···.’
확실히 매력적인 보이스다. 보컬 트레이너 답게 노래 실력도 상당했다. 결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다.
새삼 이 판이 얼마나 뜨기 어려운지를 다시 실감한다. 노래를 잘 불러도. 음색이 좋아도. 심지어 외모까지 괜찮은데도 무명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는 것.
‘물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건 아니야.’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게 부족했다.
곡과 박경호와의 궁합.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내가 들은 멜로디는 어떤가.
딱 떨어진다.
차 안에 울리는 저 음색, 창법과.
노래까지 들으니 더욱 확신이 선다.
“······.”
운전대를 부여잡고서.
또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 고민은 프로젝트를 정할 때처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멜로디가 안 들리면 안 들렸지, 들은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과거로 돌아온 후, 내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으라고 하면···.
멜로디가 들린다거나. 미래를 안다거나 하는. 그런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고, 믿어주지도 않을 초현실적인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변한 것들이 있지. 그중에도 최근 들어 가장 실감하는 게 있다.
바로, 행동력. 예전 같았으면 이리저리 쟀을 순간들에 더는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다시 받은 시간을 허투루 쓰고, 또 후회하진 않기 위해서.
뭐, 굉장히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내가 작은 학원에 도착해 있다는 거다.
레슨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정수기 앞에서 수다를 떨다가 날 보며 엉거주춤 굳어버렸고.
‘마스크를 썼어야 했나···.’
누군가 땡을 외친 것처럼 얼음이 풀렸다.
“기로 프로듀서님!”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너 쌍꺼풀 수술 잘 못 된 건 맞지.”
“그 얘기가 아니잖아! 대박, 나···나. 사인. 사인받아야 해.”
“데모 들려드려야겠다. 가만 어딨더라. 으악, 정리 좀 할걸!”
누군가는 종이와 펜을 찾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급히 꺼내 들어 데모를 찾는다.
“지금 수업 중인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안쪽에서 박경호가 나타났다.
금세 날 보고 굳어졌지만.
이번엔 저쪽이 얼음인가?
*“제 레슨실은 어떻게 아시고···.”
당황한 목소리도 멋스럽게 울린다.
작게 난 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레슨생들을 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이름 치면 블로그 나오던데요?”
“아···.”
상대의 복잡함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듯하다. 무수히 많은 물음표를 머금은 표정이 드러난다.
왜 왔을까?
노래를 배우러 온 건 아닐 텐데?
갑자기 블로그를 보고 찾아왔다고?
다행히 난 그런 모습을 보며 즐기는 성향은 아니었고. 곧장 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노래해볼래요?”
“지, 지금 여기서···?”
“아뇨. 무슨 제가 회식 자리 부장님도 아니고.”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시원하게 무례해질 뻔했네.
“제가 곡 만들고. 경호씨가 노래하고.”
백지 같은, 멍한 표정이 떠오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천천히 기다렸다. 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으니. 종이가 젖어 얇아지길.
이윽고 투명해진 종이 너머로 민낯이 드러난다. 놀람이란 감정 뒤로 보이기 시작한다.
욕심도, 갈증도, 행복감도 모두 뒤섞여 버무려진 표정이.
그럼에도 박경호는 섣불리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잡아야 할 기회. 다시 도전할 기회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 크게 실패한 사람들에겐 이런 것조차 희망 고문처럼 느껴질 테니까.
“지금 거절하면 평생 후회하겠죠?”
물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답할 필요 없는.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한 듯 그가 말을 이었다.
“해보겠습니다.”
이에 나는 끄덕이며 입매를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런데, 어떤 곡을···?”
“아.”
그걸 설명 안 했네.
“드라마 타이틀 곡이요.”
“드라마요···?”
“경호씨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요. 가장 너다운 날씨에.”
굳었다. 또 얼음이다.
어떻게···땡이라도 해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