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차이 (1)
“왔어요?”
목소리에 시럽을 끼얹었나.
말꼬리를 감아올리며 입꼬리도 함께 올린다.
미소라는 거다. 어울리지 않게.
‘얼마 만이지? 아니, 그보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과 행동에 순간 ‘왜 왔어요?’라는 질문이 튀어나갈 뻔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직원들이 밀려나듯 하나, 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지이이잉. 커피를 내리며 이쪽을 힐끔거리는 하서윤 매니저를 제외하곤.
다시 하서윤을 보았다. 이쪽은 이미 커피를 홀짝이는 중이시다.
“커피 맛있네. 좋은 원두 쓰나 봐요? 파나마? 블루마운틴?”
“그냥 주는 거 씁니다. 저거 렌탈이라.”
“아? 음. 아무튼···.”
눈알을 굴리던 하서윤이 돌연 날 쏘아봤다. 억울한 일이 기억난 사람의 표정인데, 저런 눈빛이 날 향한다는 게 의아하다.
“왜 연락 안 줘요?”
“제가요?”
“네. 곡 의뢰했잖아요.”
아, 그거?
안 그래도 눈을 의심하긴 했었지.
하서윤이 나한테 곡 의뢰를?
“검토 중이었어요.”
안 하는 쪽으로.
“아니, 뭐···제가 막 검토 필요하고 그런 급은 아니지 않나요?”
갑자기 급을 논하길래 급하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예요, 그 표정?”
“제 표정이 왜요?”
“피디님 표정을 왜 나한테 물어요!”
“···?”
우리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나?
어두운 밤길을 걷는 장님이 된 기분이다. 이러나저러나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라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일단, 오셨으니 얘기는 해보죠.”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이제서야.
“그래서. 왜 왔다고요?”
입술을 앙 다물고,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하서윤이 돌연 도도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의뢰를 했는데, 답을 안 주니까.”
“그런 의뢰가 백 개가 넘어가서 저도 당황하고 있어요.”
“어머, 지금 자랑하는 거예요?”
“자랑이 아니라···.”
“저도 피디님보다 더 대단한 피디들이 곡 엄청 보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와! 잘됐네요. 그럼 그 곡을 쓰시면 되지 않을까요?”
“······.”
손뼉까지 쳐주자 꿀 먹은 벙어리가 입을 삐죽거린다.
“마음에 안 들어.”
작은 중얼거림이 테이블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힘없이.
“암튼, 곡 하나 줘요.”
맡겨놨나.
“검토해볼게요.”
이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넋을 놓고 보았을 법한 크고 반짝이는 눈이 날 푹푹 쑤신다.
어깨를 으쓱거리자, 하서윤이 몸을 홱 일으켰다. 테이블을 반 가를 기세로.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자, 그녀의 매니저가 가루약 먹듯 커피를 털어먹더니 급하게 따라 나간다.
뾰족뾰족한 화환 사이를 지나가는 그녀가 빽 짜증을 부렸다.
“밀림이야, 뭐야!”
“하나 가져가도 돼요.”
“됐어요!”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해요.”
사무실 안쪽. 김지희가 곡 의뢰인 목록(?)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스튜디오에서 학준이 형 촬영에 속상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정말 커리어우먼 같다. 그것도 유능한.
그나저나,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그런가요.”
“네. 피디님이 정말 이거다 싶은 뮤지션이 없다면, 하서윤만한 카드가 없긴 하죠. 넝쿨째 굴러들어온 스타랄까.”
굴러들어온 고슴도치겠지. 소닉.
“이거다 싶은 게 없는 건 아닌데···.”
흐음. 단호한 대답에 입맛을 다셨다.
하서윤.
레이블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다음 타자일 수 있다.
제인 다음이 하서윤이라면, 사실상 TKM의 거목? 기둥? 간판? 뭐가 되었든 가장 인기 높은 여가수 둘과 작업을 하는 거니까.
실패하기 힘들고, 또 한 번 박수 받기는 비교적 쉽겠지. 심지어 멜로디가 들리지 않는 지금. 가장 수월하게 슬럼프(?)를 넘어갈 수 있는···동굴 탈출 로프일 수 있다.
사실 큰 거부감도 없다. 젠가처럼 오늘 한 층 더 비호감을 쌓아 올리고 가셨지만, 그렇다고 척을 진 정도는 아니니까.
최정아와 플로라를 무시하고, 못된 면모를 다양하게 보여주긴 했지만···.
저 성격에 길성혁처럼 뒤에서 사부작거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근데. 그럼에도.
‘영······같이 하고 싶은 타입은 아냐.’
모르겠다. 과거로 돌아온 직후였다면. 그리고 대중에게 보여진 모습 그대로였다면 하늘 모시듯 떠받들 수도 있었겠지. 근데 아니잖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화감 같은 게 느껴진다.
멜로디를 들으면 미친 듯이 그 곡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처럼. 안 그러면 세상이 무너지는 양 아쉬운 것처럼.
하서윤은 정 반대다. 그냥 왠지 하기 싫다.
“이 정도가 제 의견이구요. 결정은 대표님이 하시는 거니까~.”
거울이 보고 싶다. 내 표정이 굉장히 이상할 것 같은데.
“그냥 피디로 불러줘요.”
“에이, 어떻게 그래요. 이제 대표님이신데. 그럼, 리스트업 추가 되는대로 자세히 정리해서 가져오겠습니다. 대표님.”
김지희가 가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게 요즘 직원들 사이에 유행어다. 뭐만 하면 대표님, 대표님.
역시 짤리더라도 거절했어야 했나···.
눈을 꾹꾹 감았다가 뜬 나도 몸을 일으켰다.
작업실에 들어와, 두툼한 문을 닫자마자. CCTV라도 달린 것처럼 핸드폰이 울린다.
화보 촬영 차 싱가폴로 향한 최정아였다.
“뭐하고 계세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긴장된다고 떨던 그녀의 목소리가 싱그럽다. 화보 촬영이 잘 되고 있나 보네.
지금 막 작업실에 들어왔다고 답하려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제가 맞춰 볼게요. 작업실일 거고, 다음 작업 준비 중이시겠네요!”
“지켜보고 있는 거냐.”
“헤에. 다 보고 있죠. 전 지금 뭐 하고 있었게요?”
“오늘 화보 촬영은 끝났을 거고. 소리 들리는 거 보니까 바닷가 같은데?”
“맞아요. 그리고···.”
통화가 이어진다. 최정아는 보고하듯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읊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종종 이런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표현력이 워낙 좋다 보니 나도 함께 싱가폴에 간 것처럼 그려진다. 한참을 얘기하던 최정아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피디님이랑 통화하면 꼭 본론을 잊고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게 돼요.”
“아 본론이 있었어?”
“네. 그게 뭐냐면···.”
갑자기 목을 푼 최정아가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굉장히 뜬금없지만 들어주기로 했지.
이윽고 그녀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굉장히 담담하고 절제한 목소리.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풍부한.
전해져 오는 노래를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윽고 노래를 끝낸 최정아가 물었다.
“어때요?”
“두 달 동안 연습 엄청 열심히 했구나?”
일취월장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성장의 정석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제인이 폭발적인 성장이라면, 최정아는 꾸준한 성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디님 곡을 부르면, 항상 배우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 부르고 있어요.”
“그래?”
“네. 안 그래도 노래 부르는 게 좋았는데. 더 좋아지려고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행복감이 뚝뚝 떨어진다. 한 번의 성장통을 겪은 이후, 그녀는 음악을 더욱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참 흐뭇한 순간이다.
그런데, 왜일까.
문득 하서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그녀와의 작업에 흥미가 없던 이유가.
카메라 초점이 맞춰지듯 선명해진다.
그래, 없다.
윤태영처럼 욕심 그득한 눈빛도.
제인처럼 갈증이 느껴지는 생각도.
최정아처럼 행복해하는 목소리도.
하서윤에겐 없다.
#“어어, 왔나?”
서기영의 녹음이 있는 날.
그새 시력이 나빠진 걸까. 최 기사가 까만 뿔테를 쓰고 녹음실에 앉아있었다.
“안경 쓰셨네요?”
“어때? 좀 어울리나?”
“네. 왠지 디자이너 같아 보이네요.”
“흐흐, 그런가. 사실 조카가 쓰라 그래서 써봤어. 이거라도 있어야 안 휑해 보인다고.”
굉장히 슬픈 사연이 있었구나···.
묵념하듯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근데 그거 사실이야? 숱 많은 친구가 앤 더글라스 다음 앨범에 참여한다는 거?”
웃으며 끄덕였다.
사실이다.
앤 더글라스가 코첼라 직후 완전히 윤태영의 베이스에 매료되어 있다는 것도.
결국, 페스티벌만 끝나면 바로 들어오기로 했던 윤태영이 추가로 LA에 머물게 된 것도.
애초에 윤태영을 데려갔을 때부터 기대했던 바이긴 하지만 이렇게 순조롭게 풀릴 줄은 몰랐다.
‘역시.’
윤태영의 천재성은 언어가 다른 곳에서도 인정을 받는구나.
이로써 윤태영의 이름도 서서히 퍼지겠지. 예정된 미래보다 더 빠르게. 더 넓게.
“캬, 장 피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날아오르는구만.”
최 기사가 술 한잔 마신 것 같은 소릴 내며 추켜세웠다. 어쩐지 나에 대한 칭찬보다 더 기분이 좋다.
그때 녹음실 문이 열리며 서기영이 들어왔다.
꾸벅 인사하는 그에게 녹음 때마다 늘 해온 질문을 던졌다.
“컨디션 어때?”
“좋습니다!”
“잘 녹음해서 얼른 내자. 앨범.”
“넵!”
내 펌핑에 호기롭게 들어가는 서기영.
최 기사가 그 모습을 보며 푸흐흐 웃었다.
“저 친구는 군인을 해도 체질에 잘 맞겠어.”
나도 따라 웃으며 녹음을 준비했다. 최 기사는 믹서 앞에 바짝 붙어. 나는 프린트 된 가사와 악보를 훑으며. 녹음이 시작되었다.
“오디셔닝때도 잘했지만, 지금은 더 잘하네.”
“보셨어요?”
“그럼. 장 피디 한 번 더 외치고 그러는 것까지 다 봤는걸.”
끙.
그나저나 최 기사의 말대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기영의 작 편곡 실력이 느는 것에 감탄했는데. 지금은 점점 안정되어가는 노래 실력에도 놀라고 있다.
여전히 기성 가수들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개성이 채워주고 있고.
제인이나, 최정아와는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만약 서기영에게 멜로디가 들리지 않는 것의 이유랄게 있다면 이런 거 아닐까.
애초에 필요하지 않아서.
#곡의 절반 정도를 녹음까지 마쳤다.
도자기가 구워지듯, 후반 작업으로 넘겨졌다. 이제 나머지 절반을 할 차례.
“근데, 곡들이 좀······.”
최 기사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유사하지 않나?”
그의 말에 나도 끄덕였다.
사실이니까. 서기영의 곡들은 느낌이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멜로디의 유사성이나, 편곡의 단순함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시도를 하는 편이지.
“개성이 강해서 그렇죠.”
“그니까. 너무 강해서 곡들이 다 저 친구화 되어 버린달까···.”
걱정은 이해가 갔지만, 공감이 되진 않았다.
“그래서 저 노래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앨범에 더욱 만족할 거예요.”
“···?”
“보통 그런 경우 있잖아요. 한 곡 듣고 좋아서 다른 곡도 들어봤는데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른 거.”
“어어, 그럴 때 있지.”
“근데 서기영은 그럴 일이 없죠. 이 곡이 마음에 들었다면 저 곡도 분명 마음에 들 테니까.”
파스타 집에서 파스타를 파는 것뿐.
물론 앞으로 좀 더 다양성을 갖추긴 해야겠지.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몸 안에 쟁여두고서, 토크 백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수고했어.”
곧장 녹음실을 나섰다.
휴게실에서 잠깐 눈을 붙일까. 작업실에서 내 일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서기영을 보니 또 뭔가 뜨거워져서 습작이라도 끄적대야 식을 것 같았다.
그렇게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다가 웅성거리는 직원들과 마주했다. 뭐지 데자뷰인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뭔가를 보면서 놀라는 중이었다.
‘저건 또 뭔······.’
나도 그들이 보는 것을 목도 했다.
그리고 말문이 콱 틀어 막혔다.
하서윤이다. 새침하게 서 있는. 그리고 그녀 뒤로 뭔가가 우뚝 솟아 있다.
무슨 바오밥나무마냥 거대한···.
화환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저번에 올 때 빈손으로 왔더라고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