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비단 옷을 입고 돌아오다 (3)
정말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건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 프로듀서에게 승진이랄 게 없다 보니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도 예상은 했다.
그런데 그게 아더 레이블의 대표 자리일 줄이야.
파격적인 인사에 어안이 벙벙하다.
아무리 결과로 말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이제 2년 차인 내게 이런 제안이 올 줄이야.
근데, 이거 제안은 맞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유재완 대표와 본부장. 서재원 팀장은 이 상황이 몹시 흥미로운 듯,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기대가 된다는 표정으로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놀랐다. 그것도 많이.
저렇게 웃으면서 말한다고 제안 자체가 가벼운 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건 그거고···.
“거절해도 됩니까?”
“???”
순간, 탁구공이 네트에 걸려 툭 떨어지는 것 마냥 세 사람의 표정이 벙벙해졌다. 좀 전의 나처럼.
“그게 무슨···.”
본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떼는데 유재완 대표가 물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어느새 입꼬리가 다시 올라가 있다. 재밌다는 듯.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가 계속 프로듀서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해했다는 듯 끄덕이는 유재완 대표.
“레이블의 수장자리가 음악 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맞나?”
천천히 끄덕이자 그가 호쾌하게 웃었다.
“자네가 걱정하는 만큼 바쁘진 않을 거야. 뭐 대외적으로 나서야 할 일들이 아예 없진 않겠지만···사실 레이블 대표라는 게 간판 같은 거니까. 어때 이러면 해주겠나?”
유재완 대표가 재차 물어온다.
본부장은 별 이상한 놈 본다는 듯한 눈빛이었고. 서재원 팀장은 여전히 옅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난······.
#대표실에서 나왔다. 서재원 팀장과 함께.
“아마 며칠 내로 사내에 알려질 거야. 외부로 보도자료도 나갈 거고.”
아더 레이블의 정식 출범. 그리고 프로젝트란 이름을 뗀 레이블의 대표자가 누군지가 알려지겠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 대표실을 들어간 순간부터 나온 지금까지의 기억이 흐리멍덩해진 기분이다.
그런 날 보던 서재원 팀장이 피식 웃었다.
“할 게 많아질 순 있겠지만, 배울 것도 많을 거야.”
그렇긴 하겠지. 하다못해 대외적인 활동을 하면서 인맥 같은 게 쌓일 수도 있는 거고···.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올라타며 서재원 팀장이 넌지시 물어왔다.
“다음 자네 프로젝트는 정해졌나?”
“아뇨. 아직입니다.”
“TKM에서도 자네 다음 행보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일감도 엄청 몰렸을 텐데?”
끙. 안 그래도 지금 그것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러다 결정 장애가 오는 거 아닌가 싶다. 일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안 그래도 정리 중에 있습니다.”
“얼른 골라. 자네 때문에 매니지먼트 팀장이 머리 빠진다고 죽으려 해.”
“저요···?”
“가수들이 너도 나도 다음 앨범 자네랑 하겠다고 하니까.”
순간 갸웃거리다 리스트업 되어있던 TKM 뮤지션들의 이름들을 상기하며 주억거렸다.
데뷔를 준비 중인 아이돌 그룹부터, 제인만큼은 아니어도 이미 인지도가 높은 기성 뮤지션들까지 다양했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나 싶다. 기분 좋을 일인 건 분명한데···.
“뭐 그중 한 명이 유독 머리채 잡을 기세로 심하게 괴롭히는 것 같다만.”
“···?”
의미심장한 말에 갸웃거리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서재원 팀장이 내리며 손을 들었다.
“아무튼, 축하하고. 다음 회의 때 보지.”
#뭐가 달라지려나.
그런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으니, 감이 안 온다.
‘그래. 일단, 일부터 생각하자.’
불순물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착 가라앉히고, 일 생각을 끄집어냈다.
지금 내가 당장에 해야 할 것들.
곡을 만드는 것 자체는 우선순위에서 조금 밀려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게 있기에.
서기영의 앨범이 가장 첫 타석에 걸려있다.
오디셔닝이 종영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으니 되도록 빠를수록 좋았다.
사무실로 도착하자마자 여직원에게 물었다.
“기영이 왔어요?”
“네. 새벽같이 와서 녹음실로 올라갔어요.”
커피를 내려 곧장 몸을 돌리려는데, 여직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피디님.”
“···?”
“곡 작업 관련 내용들만 따로 분류해달라고 하신 거.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드렸어요.”
“네, 이따가 확인해볼게요. 고마워요.”
빙긋이 웃으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맨 끝 녹음실로 들어가니 서기영이 보였다. 건반을 만지작거리며 고심 중인 듯한.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았다.
“억, 피디님!”
“오랜만이지?”
“넵!”
두 달 만에 만난 서기영은 여전했다.
목소리는 크게 반색을 하는데, 표정 변화는 쥐똥만 하다.
피식 웃으며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작업 중인 모니터를 슥 훑어보며 물었다.
“잘 돼 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숙제를 좀 내줬지.
앨범 준비를 위해 기존에 있던 자작곡들을 발전시키라는 것.
이제 그걸 확인할 차례였다.
내 물음에 서기영이 어색하게 웃는다.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태영이 형이 엄청 칭찬하더라. 너 멜로디 만드는 실력이 대단하다고.”
서기영이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 쭉 들어볼까?”
옆자리에 앉아 말하자, 서기영이 얼른 곡을 재생시킨다. 그의 자작곡들이 차례대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이면지 하나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펜 하나를 내 앞으로 끌어놓고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총 7곡. 그 중엔 오디셔닝에서 생방송으로 했던 곡도 있었고, 당시 우선순위에서 밀려 공개되지 못한 곡도 있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곡들도 있었다.
‘오···.’
내심 감탄했다.
발전한 결과물들에.
윤태영이 도와줘서인지, 아니면 서기영이 그새 더 는 건지.
곡들의 완성도가 상당히 올라있었다. 뭐, 멜로디야 원래부터 좋았고.
모든 멜로디가 서기영의 목소리에 착착 감긴다. ‘이건 서기영의 곡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흐뭇하게 펜대를 굴리며 감상했다. 이윽고, 서기영의 개성이 담긴 곡이 전부 끝나자마자 나는 서기영을 보았다. 그의 눈이 긴장한 듯 느릿하게 굴러오길래 빙그레 웃었다.
“좋네.”
그제야 서기영의 얼굴이 살짝 핀다.
나는 펜으로 이면지를 툭툭 찍으며 덧붙였다.
“근데 마지막 곡은 조금 수정이 필요하겠다. 브릿지에서 코러스로 넘어가는 게 좀 부자연스럽네?”
내 말에 울적해질 줄 알았던 서기영이 오히려 세차게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안 그래도 이걸로 태영 쌤이랑 고민 많이 했거든요.”
“그랬어? 근데?”
왜 해결을 안 해줬지?
“태영 쌤도 어려워하셨어요.”
“···?”
“이건 피디님께 여쭤보는 게 좋겠다고 하시던데요?”
순간, 이면지에 끄적거려놓은 콩나물들로 시선이 내려갔다.
이걸? 윤태영이?
‘의왼데···.’
조금 아리송한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윤태영은 귀찮아서 어물쩍 넘어갈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그 번들거리는 눈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답을 내놓을 사람이다.
나한테 떠넘기는 게 아닌, 정말 어려웠다는 건데···.
이게 어려웠다고?
“이상하네.”
“네?”
“어, 아냐. 아냐. 내가 봤을 땐···.”
쉬운데?
“일단 브릿지랑 코러스 사이에 프리 코러스를 넣고.”
마스터 건반 위에서 내 오른손이 움직였다.
“탑 라인을 이런 식으로 가져가면.”
브릿지 멜로디를 연주하고. 새로 넣은 프리 코러스의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붙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코러스 멜로디로 넘어갔다.
“되지 않을까?”
역시 되네. 쉽게.
서기영이 ‘역시 피디님’이라고 적힌 눈빛으로 날 보고있다. 이에 멋쩍어하며 건반에서 손을 뗐다.
어쩌면. 실력이 늘고 있는 건 서기영만이 아닐지도.
#한참을 서기영과 작업하다 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서기영을 집으로 보내고, 나는 작업실로 내려왔다. 이제,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축 기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기영 앨범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던 머리를 비우고.
밀린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쌓인 데모들부터 확인했다. 너무 많아서 며칠을 쪼개어 들어야 할 판이었다.
한 두어 시간쯤 들었을까? 커피를 리필해 와 카페인을 충전하는데, 문득 여직원이 보냈다는 메일이 생각났다.
나에게 들어온 제안 중 곡 관련 의뢰만 따로 정리해 달라고 했었지.
첨부파일을 열자 문서가 떠올랐다. 어제 패드로 본 것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빽빽하다.
‘미치겠네.’
이걸 다 언제 확인해서 고르지?
헛웃음을 지으며 마우스 휠을 굴렸다. 화면이 쭉 내려간다.
TKM에서 새로 데뷔를 준비하는 아이돌 그룹부터. 제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TKM 내에서 주름 좀 잡는다는 뮤지션까지. 심지어는 타 기획사에서 들어온 의뢰도 있었다.
이 모든 게 나 한 명에게 들어온 일이 맞나 싶을 정도다.
‘어?’
그러다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잘 못 봤나? 순간 여기서 봐선 안 될 이름이 보인 것 같은데?
절대 내게 곡 의뢰를 할 리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이름이라 눈을 껌뻑였다.
순간 서재원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매니지먼트 팀장을 유독 괴롭히는 한 명이 있다고 했었던······.
그러고 보니, 사실 TKM에 매니지먼트 팀장을 괴롭힐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나.
네임밸류로 따지면 제인이나. 그와 비슷한···.
드륵.
휠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그 이름과 마주했다.
눈을 비비고 봐도, 커피를 쭉 들이기고, 눈살을 찌푸리며 유심히 봐도.
하서윤이란 이름은 그대로다.
#<한울, 최정아, 레드리시, 제인. 잇따른 성공에 힘입어 아더 레이블 정식 출범···!>
<정식 레이블이 된 아더 레이블. 수장은 프로듀서 기로로 낙점!>
<프로듀서 기로의 다음 행보는···?>
보도자료가 뿌려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들끓었다.
장기로가 과연 다음 작업을 누구와 할 것인가.
부담스런 시선들이 집중포화를 하고 있다.
안 그래도 계속 밀려들던 곡 의뢰가 보도자료 이후로는 더 많아지는 중이다.
미치겠다. 선택지는 넓어졌고, 선택 장애도 극심해져 가는 중이다. 거기에 부담은 덤이고.
“수고하셨습니다.”
“네. 한 기자님도요.”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곧장 카페를 나섰다.
어지럽다. 이번 주에만 몇 개나 한 건지 모르겠네.
뭐, 인터뷰 정도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줄줄이 있으니 장난이 아니다.
비척대며 사무실로 출근한다.
입구에 밀림처럼 늘어선 화환들을 비집고 들어가자 어쩐지 어수선한 분위기인 직원들이 보였다.
레이블의 정식 출범 이후로 줄곧 이런 분위기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부산하다.
왜 죄다 카운터로 나와 있는 거지?
들어가자 직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날 보더니 쪼르르 달려오는 여직원.
“피디님. 대박이에요.”
또 뭐가?
“안에 지금 누가 와있는 줄 아세요?”
“···?”
왜 이렇게 신났는지 모를 여직원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늘 그랬듯 긴 테이블이 먼저 보인다. 이어서 새하얀 실크 재질의 옷이 살랑거리는 게 보이고. 그리고···.
맙소사.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떡하니 있었다.
사실 얼굴이라고 하기엔 선글라스가 절반 이상 가리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지 알아보기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왔어요?”
퍽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서윤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