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비단 옷을 입고 돌아오다 (2)
<드디어 공개된 제인의 네 번째 앨범, 그리고 1번 트랙, ‘브릿지’.>
제인의 네 번째 정규앨범 ‘낯선’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전 곡을 차트에 줄 세우는 중이다.
타이틀 곡인 ‘브릿지’와 ‘도도한’은 앨범 공개 직후 나란히 1, 2위에 오르며 작은 여왕이라는 그녀의 위치를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특히나 1번 트랙인 ‘브릿지’의 경우엔 화제가 되었던 프로듀서, 기로가 작곡한 곡으로, 제인의 변화에 개연성을 주었다는 찬양이 끊이질 않고 있다.
현재 ‘브릿지’는 차트 1위에 굳건히 머물고 있으며······.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는 중이다. 살짝 벙벙한 느낌이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보니 내 곡이 차트 1위에 올라있다니.
차트 맨 위에 걸려있는 ‘브릿지’란 글씨를 빤히 보다가 늘 그랬듯 리뷰란으로 넘어갔다.
다행히도, 대중들의 반응은 내가 알던 미래와는 많이 달랐다. 내가 원했던 대로, 내 곡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인의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기보단.
‘이해가 간다.’ ‘속상하지만 언제까지 제인이 16살 소녀일 순 없다.’ 등의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더불어 앨범 퀄리티와 곡에 대한 호평들은 넘쳐 흐를 지경이지. 하루 만에 리뷰란이 이렇게까지 차오르는 건 처음 본다. 역시 제인이네.
쭉 내리다 보니 내 얘기도 제법 있었다. 레이블 직원들이 아주 좋아할 법한···.
낯뜨거운 칭찬들.
-넋 놓고 전곡 다 들었네요. 기로 프로듀서 빙의합니다. 한 번 더!
-역시 기로 프로듀서네.
-제인이 인터뷰에서 1번 트랙은 순전히 기로 프로듀서의 아이디어였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1번 트랙 없었으면 이질감 심했을 듯. 두 제인을 연결해준 느낌. 진짜 레알 브릿지잖아?
-이런 거 보면, 기로라는 프로듀서가 언플이 아니라 진짜 천재긴 천잰가 보네.
아니라니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특히나 내가 아닌, 곡을 향한 칭찬들은 절로 흐뭇해진다.
입꼬리를 올리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조금 더 했다간 슬슬 멀미가 날 것 같아서.
편한 자세를 찾아 뒤척이다 눈을 감는다. 그러자 몇몇 얼굴들이 떠올랐다. 학준이 형, 최정아······.
무슨 가장이라도 된 기분이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네. 다음은? 그다음은?
눈을 반개하여 차창 밖을 보았다.
택시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은은한 고양감이 차오른다.
그래, 내 몸이 나보고 일하란다.
#집에 들러 짐을 풀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하루 더 쉬고 내일부터 출근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거든.
‘집에 있으나 작업실에 있으나 곡 생각하는 건 똑같은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이 날 보고 토끼 눈이 되었다.
“피디님!?”
“네, 저 왔습니다.”
“무슨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출근을 하세요?”
“잠은 비행기에서 충분히 잤고, 집에선 딱히 할 게 없어서요.”
그러자 여직원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지독한 워커홀릭.”
푸스스 웃으며 커피머신으로 다가갔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여직원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미국은 어땠냐는 물음부터 룩 스튜디오와 턴투더 레이블, 그리고 코첼라에 대한 것들까지.
전부 좋은 일들뿐이라 그런지, 그녀도 말할수록 신나 하는 게 보였다.
“한국에서도 기사가 엄청 올라왔었어요. 원래 7천 명 정도 정원인 공연장인데, 거기에 3만 명이 몰렸다면서요? 완전 국위선양 밴드 아니냐면서 난리도 아니었어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얘기들.
공황에서의 통화는 시작에 불과했나 보다. 한참 통화하고 이따 만나서 얘기해. 같은 느낌이랄까.
“아쉽다. 그걸 직접 봐야 했는데. 지은씨 엄청 좋아했겠네.”
발발대던 유지은의 모습이 그려져 흐뭇하게 끄덕였다.
“아무튼, 레드리시에 제인까지. 피디님은 앞으로 더 유명해지시겠어요.”
“유명해지는 건 그만하고 싶은데요.”
이미 늦은 것 같지만···.
고개를 저으며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카페인도 충전되었겠다.
이제.
“오랜만에 왔으니까. 스케줄들부터 확인부터 할까요?”
“네, 그러세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로 다가온 그녀가 패드를 척 보여주었다. 빽빽하다. 한울도, 최정아도, 그리고···음?
고갤 들어 여직원을 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이거 전부······.”
“네, 전부 피디님한테 들어온 것들 맞아요.”
#“선배.”
기사를 마감 친 채연주가 비척거리며 정이철에게 다가섰다.
“퇴근 안 해요?”
“어, 할 게 좀 남아서.”
채연주가 갸웃거리며 그의 모니터들을 훑었다.
“엥, 아더 레이블에 대해서 정리 중이에요?”
“아니, 꼭 아더 레이블만 정리한 건 아니고.”
정이철이 마우스 휠을 굴리자 다른 레이블의 기사나 자료들이 쭉 딸려 올라왔다.
“대형 기획사 산하의 레이블들 성과를 정리해보면 재밌겠다 싶어서. 마침 아더 레이블이 거진 반년 정도 되어 가더라고.”
“오, 나쁘지 않겠는데요? 사람들 순위 매기는 거 좋아하니까. 그래서 어떤데요?”
채연주가 흥미 돋은 눈빛으로 물었다.
이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정이철.
“보다시피. 네가 아더 레이블만 정리한 줄 알 정도로 그쪽 활약이 대부분이야. 솔라톤 그리드 레이블의 턱밑까지 올라왔다고 봐도 될 정도로.”
“그 정도예요?”
솔라톤의 그리드 레이블은 또 하나의 솔라톤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났다.
비록 반년간의 성과만 정리했을 때지만, 그래도 그런 곳과 비교될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채연주의 물음에 정이철이 능글맞게 웃는다.
“사실 그 정돈 아니야. 그 이상이지.”
“네?”
“일단 이성원 프로듀서는 이번에 퀀텀보이즈 영훈의 솔로를 맡아서 호평을 받았고.”
일렉트로니카와 대중음악의 믹스. 여러 뮤지션들의 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이 없었던 차에 나온 앨범이라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비스트로는 <배드 래퍼>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이돌 힙합 프로듀서라는 꼬리표를 떼고 완벽하게 힙합 프로듀서로서 자리를 잡았고.”
동시에 프로그램에 나오는 인기 래퍼들을 아더 레이블로 모두 끌어들였지.
이것만 해도 신생 레이블의 반년치 성과 치곤 상당한 것이었다. TKM이라는 모기업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지원만으로 되는 거였다면 꽤 많은 기획사들이 독립 레이블을 만드는 데 실패하진 않았겠지.’
근데, 아더 레이블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니, 사실 시작이라 해도 될 정도.
“어···대단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까······.”
채연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더 대단하네요.”
한울, 레드리시, 최정아.
정이철의 검지가 휠을 굴릴 때마다 음원 차트 상위권에 머물렀던, 그리고 1위는 당연하다는 듯 올라 한동안 내려올 생각을 않았던 이름들이 보였다.
공통점은 모두 장기로가 프로듀싱한 뮤지션들이란 것.
“여기다 레드리시는 미국 진출까지 했잖아. 거기서 엄청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제인에게 준 곡은 음원차트 1위에, 평론가들과 팬들의 호평까지.”
채연주가 추운 듯 살짝 걷었던 블라우스를 쓸어내렸다.
“당장에 몸집 자체로는 솔라톤의 그리드 레이블을 이기기 힘들겠지만, 이대로 반년 정도 더 지나면, 글쎄···?”
그가 말꼬리를 올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채연주가 씩 웃었다.
“저한테 방금 했던 말을 고대로 쓰면 사람들이 좋아라 하겠는데요? 재밌었어요.”
이에 낄낄 웃던 정이철은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말한 것들을 정갈하게 다듬어 기사에 담았다.
가뜩이나 레드리시가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고 찬양받고 있고. 제인은 음원차트를 휩쓸고 있는 와중에 이런 기사가 올라오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올린 지 하루 만에 조회 수는 10만을 넘겼고, 2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오랜만이다.
뭘 입을지 이렇게 고민하는 건.
TKM에서 공모전에 합격했다고 불렀을 때 보다 더 신중하게 옷을 골랐다.
누가 보면 소개팅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네.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걸.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며 집을 나섰다.
사무실이 있는 방향이 아닌, 본사를 향해.
발걸음은 가벼운데 머리는 무겁다. 분명 좋은 일로 가는 것임에도 이렇게 불편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하긴, 하다못해 본부장을 만나러 가도 긴장될 텐데···.
지금 나는 대표를 만나러 가는 거니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스스로를 토닥이며 본사로 들어갔다.
만남의 광장이라 할 수 있는 로비에서의 사람들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안면이 있건, 없던 달려와 악수를 건넸다.
그리고 레드리시의 미국 진출 이야기나, 제인의 앨범에 대한 칭찬을 이어간다.
그중 매니저들은 끝말에 명함을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가져온 명함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같은 회사 직원에게 명함을 이렇게 돌릴 줄이야···.
아더 레이블이 독립 레이블을 표방하고 있다 보니 곡을 의뢰하는 데 절차가 꽤나 복잡하다. 그러니 매니저들로선 다이렉트로 연락하는 방법이 가장 빠를 수밖에.
입장이 바뀐 거다.
이제는 리스트업에 오른 가수에게 곡을 간택 받아야 하는 게 아닌, 오히려 내가 선택하여 작업하는 상황이 된 거다.
기분이 끝내줘야 하는데, 일단 눈앞에 닥친 일이 워낙 크다 보니 그런 생각이 안 든다.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연신 핥으며 11층으로 올라갔다.
널찍한 복도를 지나 문 앞에 다가서니 비서가 날 알아보곤 일어나 문고리를 잡는다.
안쪽에 내가 왔음을 알리고, 문이 열린다.
시야에 빠르게 세 명이 들어왔다.
먼저 가장 익숙한 서재원 팀장. 그리고 본부장으로 추정되는 머리가 하얀 중년 남자. 마지막으로 날 보고 있는, TKM의 유재완 대표.
몇 걸음 더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프로듀서, 장기로입니다.”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제야 바짝 얼어붙은 내 긴장감이 녹기 시작하는지, 사람들의 면면이 제대로 보였다.
유재완 대표는 푸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 보고 얘기나 좀 할까 해서 불렀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너무 잘 해주고 있어서.”
그리고 칭찬들이 이어진다.
로비에서 들었던 것과 다를 것 없는 칭찬들인데, 무게감이 다르다.
중간중간 본부장과 서재원 팀장도 거드는데 핑퐁 게임 같다. 정신이 없어. 이러다 칭찬 먹고 체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더 레이블이···이제 반년 정도 되었지?”
이윽고 대화의 초점이 나에게서 아더 레이블로 넘어갔다. 순간, 이게 본론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본부장이 끄덕이자 유재완 대표가 다시 날 보며 말했다.
“잘해줘서 고맙군. 자네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프로듀서도 유의미한 성과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가 빙그레 웃었다.
“이 정도면 반년 더 기다릴 거 있나? 프로젝트란 이름 떼고, 정식으로 시작하지.”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더 레이블을 자네가 맡아보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