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비단 옷을 입고 돌아오다 (1)
“우리가···.”
키 큰 엔지니어가 믹서에 손을 올린 채로 굳었다.
“뭘 걱정했더라?”
털북숭이 남자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앤 더글라스가 대놓고 홍보까지 해줬으니, 충분히 저럴 만하지. 문제는 지금부터인 거고. 연주가 시작되면······.”
그때였다.
-!
파워코드가 터져 나오며 이목이 집중된다. 무려 수천 명의 이목이.
기타 하나로 공연장이 가득 찼다. 그 정도로 볼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관객들은 환호했지만, 엔지니어들은 당황했다.
“뭐야, 왜 이렇게 커?”
사고다. 아니, 사고라고 생각했다.
레드리시의 여자 보컬이 노브를 더욱 올리는 걸 보기 전까진 말이다.
일부러?
“왜 저러는 거야?!”
엔지니어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레드리시의 보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스탠드 마이크에 붉은 입술이 가까워지며 노래 부를 준비를 한다.
엔지니어 중 하나가 털북숭이 남자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어떡해? 마이크 볼륨 올려? 아니면 기타를 내려?”
“그럼 일단···!”
입술이 열렸다.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울리며, 고음이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
공연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큰 기타 소리를 송곳처럼 뚫고서.
엔지니어들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저 작은 체구가,
공연장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노렸군.”
폴 토레트의 시선이 무대가 아닌 관객들에게로 향했다.
이미 공연장에 자리를 잡은 관객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무대를 올려다본다. 서로를 쳐다보며 감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번엔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확인했다.
저 멀리서 밀려드는 사람들. 그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반면 이탈하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그걸 보고, 어떻게 돌아설 수 있었겠나. 고음이 뇌리에 제대로 박혔을 텐데.
폴 토레트는 다시 무대를 보았다.
한편으론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처음부터 패를 전부 보여준 건 아닐지.’
이제 1분이 지났다.
39분.
그동안 뭘 더 보여줄 수 있을까?
이미 클라이맥스는 보여준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한 곡이 채 끝나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눈썹이 꿈틀거린다.
‘클라이맥스가 아니었나?’
보컬은 보여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숨기고 숨겨서 일각을 보여줬을 뿐이다.
우리는 그거에 놀라 자빠졌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역치가 툭툭 치고 올라간다.
그때마다 듣는 입장에선 짜릿하다.
소름이 팔뚝을 훑고, 뒷골을 쓸어 올린다.
박자에 맞춰 들썩이는 수천 명의 관객들.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브랜이 미친 밴드를 데려왔군.’
폴 토레트는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다시 고개를 돌리던 그의 시선이 밀려드는 관객들에서 멈췄다.
“곧 컴플레인 들어오겠어.”
“네, 관객들이 늘어나는 속도로 봐선···이 공연장으론 턱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공연장을 바꿀 수도 없었다.
폴 토레트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철골과 그걸 덮고 있는 천막들이 보였다.
“저거 벗겨내.”
“네?”
벙찐 직원을 보며 씩 웃었다.
“저거 걷어버리자고.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려는데, 고작 천 쪼가리가 그걸 막고 있으면 안 되지.”
“아, 예, 예!”
상황을 파악한 직원이 재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지고.
폴 토레트는 흐뭇하게 공연장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밴드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브랜이 밴드를 데려오긴 했지만, 정작 그들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건 따로 있다고 들었다. 밴드가 속한 기획사의 프로듀서.
‘다리를 좀 놔달라고 해야겠군.’
전 세계 무대가 코첼라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이윽고, 그의 지시대로 햇빛을 막고 있던 천막이 걷어졌다. 시야의 제약이 없어지자, 인원은 점점 더 불어났다.
천막을 걷은 것도.
이만큼의 관객이 모인 것도.
적어도 이 공연장에선, 개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백 스테이지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기다렸다. 천천히 들어오는 무대를. 그리고 성공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미국 데뷔 무대를 마친 레드리시와 윤태영을.
들뜬 만큼 긴 기다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집어넣었다. 들었던 대로 인터넷이 전혀 안 된다.
쩝. 얼른 사람들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어떤 피드백을 남길지 궁금해 미치겠다.
왜일까.
내가 편곡에 참여한 곡들이라?
글쎄. 좀 다르다.
만족이라기보단, 뿌듯함에 가까워.
이정명 피디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 뮤지션이라. 그들의 성공이라.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옅은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작곡만큼 가슴 뛰는 일이 있을 줄이야.’
곡을 만들다 못해, 뮤지션을 만들고 싶나 보다. 내가.
주먹이 절로 쥐어지려는데, 마침 무대가 들어왔다.
네 명의 뮤지션들은 벙벙한 얼굴로 악기조차 정리를 못 하고 있었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허하다.
‘본인들이 태풍이여 놓고선.’
피식 웃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의 얼굴에 벅찬 표정이 차오른다. 곧 넘칠 기세로.
가장 먼저 유지은이 무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곧장 내게로 다가온다. 잔뜩 상기되어선.
“봤어요? 막, 막 사람들이 끝도 없이! 계속, 계속!”
“네, 봤어요.”
그녀가 자신의 가슴주위를 문지르며 미소를 짓는다.
“아직도 두근거려요.”
“보는 저도 그랬어요.”
유지은의 머리가 홱 올라온다. 코앞에서. 날 빤히 올려다본다. 그러다 씩 웃는다. 눈웃음이 줄줄 흐르네.
“배고파요.”
피식.
“아까 병국이가 봤대요. 초밥도 있고, 치킨도 있고, 타코도 있고, 맥주도 종류별로 있고, 칵테일도 있대요.”
“가서 골라요. 다 사줄 테니까.”
“그럼 저 가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해요?”
“네, 해요.”
“역시 피디님!”
유지은이 배시시 웃는다. 엄지를 치켜들며.
“머시써. 스포츠카가 없는 것만 빼면.”
“···?”
“뭐 그건 내가 사면 되지.”
콧노래를 부르며 비어 존으로 앞장서는 유지은이다.
참···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공 같다.
어디까지 높이 튀어 오를지 알 수 없는 공이기도 하다. 그리고···.
‘꼭 내가 던지고 싶은 공이기도 하고.’
스스로 욕심을 마주하는 사이, 정리를 마친 윤태영과 나머지 멤버들이 다가왔다.
“저희도 해당하는 거죠? 여기부터 저기까지.”
“그럼요.”
“흐흐, 좋았어! 얼른 먹고, 라엘 윈스 보러 가자!”
“라엘 윈스 몇 시지?”
“30분 남았어.”
“빨리 가자. 빨리.”
공연이 끝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
눈앞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페스티벌이 펼쳐져 있고.
나는 욕심을 잠시 접어 넣었다.
그리고 타임테이블을 꺼내어 펼쳤다.
···이걸 어떻게 안 놀 수가 있겠어?
#“코첼라, 최고의 순간!”
브랜이 탁상 위에 패드를 내려놨다.
신문 기사처럼 만들어진 포맷.
그 1면을 레드리시가 장식하고 있었다.
천막이 모두 걷어진 철골 구조물이 있고, 그 주위로 반원을 그리듯 몰린 관객들이 보인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니 저 숫자가 무려 3만 명이란다.
벅찬 마음으로 쭉 읽어내려다가 기사 마지막에 붙은 내용에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이 공연 중간에 공연장을 떠나기도 했다. 확신하건대, 그들은 화장실이 급했을 것이고. 자신의 소화 기능을 증오하게 되었을 거다.]
“반응이 대단해요.”
“그러네요.”
이것뿐만이 아니다. 코첼라 공식 트위터뿐만 아니라 SNS와 각종 커뮤니티까지 레드리시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많은 것들이 미래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전부 더 좋은 방향으로.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았다.
브랜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고, 내가 건네는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힌트를 듣고도 얻을 것들을 뽑아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레드리시를 위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드리시가 미국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코첼라 하나로는 부족하니까.
“브랜. 골든보이스 쪽이랑 얘길 더 해보는 건 어때요?”
코첼라의 프로모터 골든보이스. 그들이 앞으로 확장해 나갈 사업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사업들이 레드리시를 미국 전역에 알릴 수 있다는 것도.
시작이 달라진 만큼,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내 말을 들은 브랜의 얼굴이 묘했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
“폴이 전화를 했나? 아니지, 번호를 알았다면 내게 다리를 놔달라 연락했을 리가 없지.”
“···?”
“이것도 감이다? 아니, 이 정도면 통찰력이라고 해도 좋을 것······.”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고개를 기울이자, 브랜이 손을 휘적거렸다.
“아녜요. 좀 놀라서. 장 프로듀서, 한국 언제 간다고 했죠?”
“모레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일쯤에 시간 괜찮아요?”
“네, 괜찮죠. 그런데 무슨 일로···.”
브랜이 빙그레 웃었다.
“방금 말했잖아요. 골든보이스랑 얘기해보자고.”
“그랬···죠?”
“그렇지않아도 폴이 만나고 싶어 해요.”
폴? 폴이 누구지···?
“골든보이스는 아는데, 거기 대표가 누군진 모르나 봐요?”
“···!”
#레드리시는 일주일 뒤에 있을 두 번째 무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반응이 펄펄 끓고 있는 만큼, 수 많은 사람들이 몰릴 거다.
기사들의 과장이야 믿을 게 못 되지만, 그들이 말하는 5만 명이 불가능한 숫자일 것 같진 않았다.
‘직접 볼 수 없다는 건 좀 아쉽네.’
그때쯤이면 아더 레이블 사무실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지.
어쨌든, 그들이 피나는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나의 일을 해야 했다. 프로듀서가 아닌, 레드리시의 담당자로서.
골든보이스의 수장, 폴 토레트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다.
다행히도 내가 그려본 레드리시의 청사진에 대해서 그는 완벽히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났다.
“폴이 장 프로듀서가 엄청 마음에 드는 눈치던데요?”
“그런가요?”
레드리시가 마음에 든 게 아니고?
“그에게 시장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은 건 아마 장 프로듀서가 처음일 거예요.”
응, 내다본 거 아니야. 그냥 보고 온 거야.
브랜이 특유의 냉소적인 미소를 흘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협력 관계만 아니었으면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건데.”
“하하···.”
뭔가 더 어색하다. 음악이 아닌 다른 것들로 칭찬 비행기를 타는 건.
“그럼 전 레드리시 연습하는 것 좀 보러 가겠습니다.”
어색함을 털어내며 대표실을 나섰다.
곧장 레드리시가 있을 녹음실로 올라갔다.
두터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부스 안에서 열정적으로 연주 중인 레드리시가 보인다.
믹서로 다가가 모니터를 켰다. 그러자 녹음실로도 그들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의 연주를 감상했다.
역시, 대단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레드리시는 점점 더 빠르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계적인 레드리시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원래대로라면 3년이 넘게 걸릴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폴 토레트와의 대화를 통해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도 1년은 좀 터무니없지 않나?’
폴 토레트가 한 말을 되짚으며 합주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합주가 끝나고. 레드리시와 윤태영이 지친 상태로 부스를 나왔다.
나는 그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빙그레 웃었다.
“합주 좋은데요? 이제 다들 숙소로 들어가서 얼른 쉬어요.”
“싫어요!”
유지은이 소리를 빽 질렀다.
“오늘은 안 되죠···.”
그녀가 날 보며 말했다.
“피디님 내일 가시잖아요.”
#우리는 근처 펍에 자리를 잡았다.
경쾌한 음악들이 흘러나오는데, 우리 테이블만 축축하게 젖어있다.
“왜 이렇게 침울해요?”
“안 침울하게 생겼어요? 이제 한동안 못 볼 텐데···.”
유지은의 말에 이병국과 기성운이 끄덕거린다.
씁쓸하게 웃었다. 해줄 말이 딱히 없었다. 곧 보자는 말 밖엔.
그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유지은이 잔을 탁 내려놓았다.
눈에 유난히 조명들이 많이 반짝인다. 그렁그렁해서···.
“딱 기다려요.”
“···?”
“엄청 빠르게 성공해서 돌아갈 거예요. 피디님 있는 곳으로.”
나는 울먹이는 유지은에게 냅킨을 빼서 건넸다.
“네, 꼭 그래 줘요.”
#기회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서 돌아간다.
아쉽기도, 한편으론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내 자리에서 그들을 응원하며, 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야겠지.
그러다 보면 또 금방 만날 날이 되어있을 거다.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
두 달의 시간 동안 딱히 변한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대박이에요, 대박!
“네?”
-제인 앨범도 대박! 피디님도 대박!
내가 비행기 안에서 쑤시는 허리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제인의 앨범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