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코첼라 페스티벌 (2)
“내 스포츠카···.”
흡사 말을 잃은 마차처럼 넋을 놓고 있다. 빨간 드레스에 검은 부츠를 신은 유지은이.
“그게 왜 니 스포츠카야.”
“내가 그거 타고 미국 돌아다니려고 이 옷도 가져왔는데···.”
이병국이 지적했으나,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좋을 빨간 원피스가 나풀댄다.
‘그러게 왜 기사를 믿고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혀를 찼다. 유지은과 이병국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나는 기성운에게 물었다.
“준비는 잘 돼가요?”
“네. 무대에 올라 할 곡들 반복 연습 중인데, 괜찮은 것 같아요.”
유지은의 말을 빌리자면, 기성운의 눈에는 부정 필터가 씌웠다고 한다. 그런 기성운이 저렇게 얘기할 정도면, 엄청 좋다는 얘기였다.
“다른 자작곡들도 문제없고요?”
“턴투더 레이블 관계자들에게도 들려줬는데 다들 반응이 괜찮더라고요.”
흐뭇하게 끄덕이는데 유지은이 끼어들었다.
“베이스 얘긴 들으셨어요? 굉장히 유명한 베이시스트를 붙여준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이 뭐랬더라 톰···톰···.”
“톰과 제리.”
“맞아, 그거. 아니잖아!”
스포츠카가 없어 서러운 유지은이 이병국을 퍽퍽 때렸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이병국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거 취소되었어요. 대신, 태영이 형이 참여할 거예요.”
멤버들의 눈이 확 뜨였다.
“정말요?”
“와, 대박!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맞아, 자주 맞춰봐서 편하잖아!”
그러다 갑자기 유지은이 주변을 홱홱 돌아보았다.
“가만. 근데 태영 오빠는 어디 갔어요?”
일찍도 찾네.
“어, 진짜 그러네.”
“푸핫. 우리 다 모르고 있었어.”
“기성운급 존재감 무엇.”
“야, 갑자기 왜 나한테 딜을 넣어.”
“몰라 삐뚤어질 거야.”
투덕거리는 레드리시 멤버들에게 그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태영이 형은 앤 만나러 갔어요.”
“앤? 앤 더글라스요?”
“네.”
놀란 얼굴이 된 유지은.
“둘이 아는 사이래요!?”
그럴 리가.
“당연히 아니죠. 면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태영이 형. 이번에 앤 더글라스의 세션으로도 무대에 설 것 같아요.”
“···!”
이건 레드리시와 함께 무대에 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앤 더글라스의 이전 세션들을 보면 각자가 이미 유명 밴드에 속해있는, 유명 연주자들이었기에.
놀란 얼굴들 속, 기성운이 묻는다.
“그럼 그 유명하단 베이시스트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내가 시원하게 웃었다.
“낙동강 오리 알?”
아니지. 로키산맥 펠리컨 알 정도 되려나.
#LA 빌딩 숲 사이에 한 사무실.
문이 열리며 매니저가 들어오자 톰 베젤이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며칠째. 그러니까, 룩 스튜디오에서 그 일을 겪은 후로.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턴투더 레이블에선 연락 안 왔어?”
고개를 젓는 매니저를 보고 그의 미간이 조금씩 구겨졌다.
“거기 때문에 지금 스케줄 몇 개를 깠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어. 먼저 연락 좀 해봐.”
“러브콜도 우리 쪽에서 먼저 보냈는데, 계속 연락해서 질척거리긴 좀···.”
“앤 더글라스 세션이야. 그것도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이거 잘 이용하면 다음 앨범에 날 쓸 수도 있는 거라고.”
“후우, 그건 그런데-.”
톰 베젤이 말을 끊으며 질겅댔다.
“뭐 듣도 보도 못한 무명 밴드 세션까지 맡는 건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앤 더글라스까지 포기할 순 없지.”
“알겠어. 지금 연락해볼 게.”
매니저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을 주고받던 턴투더 레이블 직원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아, 네. 네.
“혹시 결정이 났나 해서요. 꽤 오래 지났는데 연락이 아직 없네요?”
-아 죄송합니다. 같이 결정해야 하는 분이 오늘 오셨거든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지금은 결정 났나요?”
매니저가 힐끔 톰 베젤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확 풀린다.
결정이 미뤄져서 불안했던 건데. 결정권자가 오늘 왔다면 적어도 자신이 밀려난 건 아니란 거니까.
‘그래, 내가 보낸 연주를 봤다면 연락을 안 했을 리가 없지.’
상념이 끊어지며.
“예. 알겠습니다···.”
매니저의 통화도 끝이 났다.
톰 베젤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언제부터 연습한대? 두 팀 다 하려면 시간 빠듯하겠는걸.”
“······.”
“뭐야 그 표정?”
“다른···.”
불길함이 번지기 무섭게.
“다른 베이시스트를 구했대.”
현실이 되었다.
“뭐? 왜?”
“그게-.”
“젠장. 거의 다 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기다리라며. 지금 내가 몇 개를 깐 줄···.”
또다시 말을 끊으며 자신 탓을 하는 톰 베젤에 매니저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땍땍대지 마. 내가 까라 했어? 앤 더글라스 세션 비었다고. 거기 들어가야겠다고 한 건 너였어. 그것 때문에 내가 자존심 굽히고 계속 전화한 거고. 젠장, 그리고 이게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줄 알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모습에 톰 베젤이 얼어붙었다.
“누, 누구? 나 때문이란 거야?”
“하아···너 잘못 건드렸어.”
매니저가 머리를 짚는다.
톰 베젤의 머리가 뱅뱅 돌아간다.
무슨 소리지?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너 멱살을 잡았을 거야. 그 프로듀서한테 사과하라고.”
“프로듀서? 그 동양인 말하는 거야!?”
“그래. 니가 프로듀서 잡아먹겠다고 그 난리를 쳐놔서 지금 이렇게 된 거라고. 그 프로듀서 지금 턴투더 레이블에 있어!”
톰 베젤의 표정이 바싹 굳어진다.
매니저의 입에서 내막이 흘러나올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잿빛으로 죽어갔다.
#시간에도 가속도가 있는 걸까.
페스티벌이 맹렬히 다가오고 있다.
레드리시는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앤 더글라스와 레드리시, 양쪽을 맡아야 하는 윤태영은 또 바빠졌고.
제인 앨범 녹음 때도 일정 때문에 이 녹음실 저 녹음실 쉬지 않고 넘나들었는데. 지금 딱 그러고 있다. 이 합주실, 저 합주실···.
‘다행인 건, 본인이 즐거워한다는 거지.’
신이 났다.
표정도. 걸음걸이도. 그리고 실력도.
연일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윤태영.’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에서 좌절하지만.
같이 있던 새끼 용은 밖으로 나와 비로소 여의주를 무는 격이랄까.
그리고 나는 틈틈이 브랜을 만나 레드리시에 대한 향후 계획을 논의 중이다.
대강의 미래를 알고 있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이미 미래는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이번의 레드리시는 한국에서 앨범을 냈고.
코첼라에서도 꽤 좋은 시간에 괜찮은 공연장에 서게 되었지.
예정된 미래보다 더 좋은 판이 깔린 거다.
‘그러니 더 높이 뛸 수 있지 않을까?’
“저 왔습니다.”
대표실로 들어가자, 브랜이 손을 들어 인사한다. 그의 책상에는 뭐가 잔뜩 있었다.
슬쩍 훑으니 대강 뭔지 알 것 같았다.
“왔나 보네요?”
“방금 도착했어요.”
돌돌 말린 포스터가 쫙 펼쳐졌다.
맨 위에 헤드라이너, 앤 더글라스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있다.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들 사이로 레드리시도 보인다.
화려하게 꾸며진 포스터를 보니 내가 정신을 못 차리겠다. 여기 적힌 이름들을 훑어보면 정말 말도 안 된다. 한국에서 보려면 내한을 간절히 빌어야 하는 굵직굵직한 이름들이 여기 다 모여있다. 물론 상단에.
어쨌든, 이런 곳에 레드리시가 이름을 올린 거다. 12일과 19일, 이틀씩이나.
브랜이 흥미로운 눈으로 날 본다.
“어때요?”
“끝내주네요.”
“그렇죠. 여기에 이름이 오른다는 건 끝내주는 일이죠.”
천천히 끄덕였다. 시선은 여전히 포스터에 둔 채로.
“······근데, 역시 잘 안 보이네요. 이름이 너무 작아서.”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온다. 아쉬웠다.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겠지만. 레드리시라는 최고의 밴드가 고작 엄지손가락 하나로 가려질 크기라는 게.
시선이 올라간다.
[앤 더글라스]
그래, 저 정도. 저 크기에 위치 정도는 돼야지.
날 지켜보던 브랜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릴 올렸다.
“이거 앤한테 헤드라이너 자리 잘 지키라고 해야겠군.”
푸스스 웃는 브랜을 보며 말했다.
“날짜가 다르면 되죠.”
“···지니어스?”
#“떴어요!”
페스티벌 당일의 일정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전달받고 있는데,
남직원이 한 손에 얇은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주어가 없어도 나와 브랜은 뭘 얘기하는지 알아차렸다. 남직원이 노트북을 우리 앞에 올린다.
“반응 어떤데?”
성질 급한 브랜이 묻자, 남직원이 눈알을 굴렸다.
“그, 앤이야 당연히 반응들이 난리인데···.”
“근데?”
“아무래도 레드리시는 처음 보는 밴드다 보니까 좀···.”
“안 좋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노트북 화면을 쭉 훑었다.
시야에 툭툭 걸린다.
-대체 레드리시가 누구야? 아는 사람?
-검색해보니 한국에 있는 밴드네.
-레드리시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아. 그 시간에 메인 스테이지에선 나의 돕스가 디제잉을 한단 말이지.
-같은 시간에 더 작은 무대에 펑키펀치가 있잖아? 이게 말이 돼? 레드리시는 듣보잡 밴드잖아!
-코첼라가 점점 미쳐가고 있어.
-그래도 헤드라이너가 앤임. 이거 하나만으로 갈 이유는 충분하다.
-위쪽에 다른 이름들도 꽤 봐줄 만해. 하지만 밑으로 갈수록······.
-비어 존(Beer zone)에서 종일 마시다가 유명한 이름들만 쏙쏙 보고 오면 되겠군.
“흐음.”
내가 침음성을 삼키며 화면을 보고 있자 남직원은 입맛을 다셨다. 뭐라고 위로라도 해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때 브랜이 입을 뗐다.
“예상대로군.”
“그러게요.”
남직원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진다.
우리가 너무 태연해서일까.
‘애초에 욕심이지.’
좋은 반응을 기대하는 건.
60만 원짜리 티켓인데, 자신이 모르는 밴드가 가장 밑줄도 아니고 중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거슬릴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레드리시가 무대에 오르면, 그리고 저 사람들이 그 무대를 본다면.
저 생각들이 쓰레기통에 처박힐 거란 확신.
‘문제는 아예 듣질 않으면 그럴 기회가 없다는 건데.’
그래서 브랜에게 미리 부탁하나를 해뒀지.
내가 브랜을 보자, 그가 알겠다는 듯 핸드폰을 들었다.
“앤. 그때 얘기했던 거 있잖아. 지금 바로 해줄 수 있어? 오케이. 바로 올려줘. 바로. 나 새로고침하고 있을 거야.”
전화를 끊은 브랜이 날 보며 끄덕인다.
“곧 올라올 겁니다.”
“고마워요.”
“레드리시는 이제 턴투더 레이블의 소속 뮤지션이기도 하죠. 앤 트위터 들어가서 새로고침 좀 해봐.”
우리의 대화에 영문모를 표정을 짓던 남직원이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앤의 트위터로 접속했다.
잠시 후, 그가 놀라는 소릴 내며 우릴 돌아보았다.
“오, 올라왔어요!”
[브로들. 이번에 코첼라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었어. 놀라운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판타스틱한 노래들을 준비하고 있지. 하지만 나만 이런 준비를 하고있는 건 아니야. 이번에 내가 굉장한 밴드를 하나 소개시켜 줄게. 레드리시. 한국의······
(중략)
이건 분명히 하자고. 코첼라가 만들어진 이유는 유명 뮤지션이 아닌, 새롭고 실력 있는 밴드를 발굴하기 위해서였어. 레드리시가 정말 오랜만에, 코첼라의 취지에 맞는 밴드일 거야. 내가 보증하지.]
-앤 더글라스가 한국에서 보고 데려왔다고? 그 정도면 실력은 검증된 거 아냐?
-모르지. 직접 가서 봐야 알지.
-그래도 앤이 저 정도로 말하는 거 보면 뭔가 있긴 한가 본데.
-갑자기 궁금해지네. 펑키펀치를 포기해야 하나···.
-잠깐 가서 보긴 해야겠네. 별로면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한 죄로 가루가 되도록 까주겠어.
-어쨌든 이번 코첼라. 생각보다 재밌겠는데?
순식간에 반응들이 쏟아진다. 원하던 대로. 두고 보겠다는 반응들이.
나는 턱을 쓸며 낮게 웃었다.
그래. 두고 보든, 던지고 보든. 보기만 해라.
보는 순간, 빠져들 테니까.
가속도 붙은 시간이 뉴턴의 제2 법칙 뺨을 후리고, 순식간에 내 앞으로 페스티벌을 끌고 왔다.
드넓은 사막.
내리쬐는 햇볕 아래로.
25만 명.
그 말도 안 되는 인원이.
세계 최대의 페스티벌, 코첼라를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