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73화 (73/221)

073. 코첼라 페스티벌 (1)

“턴투더 레이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군.”

이정명 피디가 살짝 놀라 했다.

“TKM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쪽을 노리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쪽하고 연결되었지?”

“회사에서 연결을 지어준 건 아닙니다.”

“그럼?”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정명 피디가 속 빈 웃음을 흘렸다. 눈을 번들거리며.

“운까지 좋은 친구라니. 이거 더 탐나네···.”

“제 운이 아닙니다. 그 팀의 운이고. 그걸 잡을 실력도 있었고요.”

“제안은 자네가 했는데?”

“연주는 그들이 했으니까요.”

“고집 있군.”

“···네?”

“고집 있으면 데리고 일하기 피곤하지. 아 그냥 맞다고 해. 내 나름의 합리화야. 신포도 같은.”

“아···예. 저 고집 있습니다.”

“없네. 하란다고 하잖아.”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자 이정명 피디가 껄껄대며 웃는다.

그 후로도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번 작업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고, 앞으로에 대한 조언들도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학생도 아닌 내가 그에게 강의를 듣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대화의 끄트머리.

이정명 피디가 후반 작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자네가 회사를 차리게 되면 말이야.”

“네.”

“언제든 와. 녹음실 비용은 공짜로 해주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럼 비행기 푯값은···.”

“자네 양아친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오후.

믹싱 작업을 어느 정도 확인한 후, 윤태영과 선셋 비치를 다시 찾았다.

많이 돌아다니지 못해 비교할 곳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가장 좋았거든.

관광객들에겐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라, 날씨가 좋은 날에도 사람이 한산했다.

해변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길모퉁이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렀다.

윤태영과 커피를 한잔 씩 손에 들고 해변으로 내려왔다.

아직 일몰이라기엔 파란 하늘이었다.

입을 벌리고 수평선을 바라보는 윤태영.

“엄청 넓네요. 하늘이.”

“그쵸. 저도 깜짝 놀랐었어요.”

감탄을 쉬지 않던 윤태영이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누나한테 보여줘야겠네요. 저 미국 간다고 엄청 부러워했거든요.”

“아, 조카는 바이올린 잘 배우고 있어요?”

내 물음에 윤태영이 사진을 찍다 말고 피식 웃었다.

“아뇨, 이젠 발레가 배우고 싶다 해서 발레 학원 다닌대요. 티비에서 발레리노를 봤다나 봐요.”

“하하.”

“다행이죠. 솔직히 바이올린엔 소질이 없어 보였거든요.”

“냉정한 삼촌이네.”

윤태영이 낄낄대며 웃는데, 그의 전화가 울렸다.

“어···.”

“받아요. 누나인 것 같은데. 전 좀 걷다 올게요. 생각도 정리하면서.”

“아 그럼······여보세요?”

웃으며 바다 가까이 걸어갔다.

앞에선 파도가, 뒤에선 윤태영의 웃음소리가 밀려든다.

해가 서서히 진다.

노을이 연한 분홍빛을 띠었다.

결심한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예를 들면, 오늘 이정명 피디와 얘기했던···.

독립에 관한 것들.

그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기 시작하니 정말 한도 끝도 없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각들이 뿜어져 나온다. 거기엔 기대도 있었고, 불안도 있었다.

한참을 걸었다.

하늘이 완연하게 붉어질 때까지.

돌아올 때는 좀 더 가까운 미래를 떠올렸다.

로스앤젤레스와 턴투더 레이블.

레드리시와 코첼라 페스티벌.

사실 내가 LA로 향하는 건 프로듀서로서의 일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더 레이블의 대표로 가는 느낌이지.

제인 앨범 작업이 확정되며 자연스레 얹어진 일정.

목표는 간단했다.

레드리시의 미국 데뷔 무대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걸 확인하고 오는 것.

그리고 앞으로 턴투더 레이블이 레드리시에게 어떤 계획을 갖고 얼만큼의 지원을 해줄 것인지 확인하는 것.

이런 것들을 나누고 정리하기 위한 일종의 출장이었다.

근데, 이런 건 너무 당연하고, 뻔한 것들이고.

거기까지 갔으니.

‘뭔갈 더 얻어오면 좋긴 하겠는데···.’

그 뭔가가 퍼뜩 생각나진 않았다. 가봐야 떠오를 것 같았다.

모래에 발자국을 푹푹 찍으며 윤태영에게 돌아왔다.

통화를 마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발레는 잘 배우고 있대요?”

“또 바뀌었답니다. 보름 만에.”

“네? 이번엔 뭘로?”

“피겨···라네요.”

어쩐지 티비에서 누굴 봤는지는 알 것 같았다.

#다음날.

김 실장의 도움을 받아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배웅을 하겠다고 찾아온 제인과 함께.

“한국 들어가면 놀러 갈게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고, 꼭 그러라며 손을 흔들었다.

‘한국에 돌아갈 때쯤이면, 제인도 컴백을 했겠네.’

날짜를 대충 계산해보며 게이트로 향했다.

탑승을 기다리며 턴투더 레이블 측에 출발한다는 얘길 남겨놓고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통화하는 걸 유심히 듣던 윤태영이 물어온다.

“전부터 계속 궁금했던 건데요.”

“네.”

“영어는 따로 공부한 거예요? 아니면 유학?”

내 발음이 유학을 갔다면 이렇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굳이 따지자면 전자일 거고.

또 엄밀히 따지자면 먹고살기 위해서였달까.

영어라도 안 되면 정말 취직이 불가능할 것 같았거든.

다행히(불행히) 유통이 주력인 중소기업에 취직했었지···.

남자는 이게 최고라며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던 사장이 생각나길래, 얼른 상념을 닫았다. 휴, 잡념으로 변할 뻔했어.

어느것 하나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대충 둘러댔다.

“독학했어요.”

그러자 윤태영이 나를 멍하니 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무래도 오해가 커지는 것 같다만. 여기서 수습하려 하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할 것 같아 그냥 넘겼다.

'아니, 천재인 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 후로도 짧은 대화가 오갔다.

‘얼마나 걸리죠?’

‘한 시간 반 정도요.’

‘그럼 기내식은 없겠네요?’

‘그렇죠?’

딱 요정도.

이게 기억의 전부다. 직후엔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거든.

눈을 떴을 땐,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쾌한 덜컹거림과 함께 비행기가 바닥에 닿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기체가 서서히 안정을 찾는다.

그 사이, 잠에서 깨어난 윤태영이 머리를 다시 묶고 있었다.

“잘 잤어요?”

“어흐···푹 잤네요.”

나는 짙어진 그의 쌍꺼풀을 보며 킬킬대며 웃었다. 이내 그 와중에도 잘생겼다는 걸 느끼곤 의기소침해졌지만.

우릴 데리러 온 직원을 찾는 건 쉬웠다.

레드리시의 버스킹 당시, 앤과 함께 걸어왔고 한국어를 좀 할 줄 알았던 그 남직원이 서 있었다. 피켓···으로 추정되는 뭔가를 들고선.

그도 단박에 날 알아보곤 피켓을 흔들었다.

피켓이 맞다. 화려하고도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지은씨가 만든 것 같죠?”

내가 물었고.

“그렇다는 거에 제 머리카락을 걸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윤태영이 확신하는 듯 답했다.

저걸 저렇게 한 점 부끄럼 없이 들고 있는 저 남직원이 신기해진다.

다가가자 피켓을 내게 건네는 남직원.

“이거 디자인 죽이지 않나요?”

음, 정정해야겠다. 이상해진다.

그의 밴에 올라타 곧장 LA 시내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가 파스텔 톤의 도시였다면, 여긴 그에 비해 무채색에 가깝다. 회색빛 도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네.

이윽고 대로변에서 차가 멈춰섰다.

사거리. 커다란 건물들이 촘촘히 붙어있다. 건너편엔 메이시스 백화점이 보이고.

“피디님!”

뒤쪽에서 밝다 못해 화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유지은이 건물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뒤쪽에 이병국과 기성운도 보인다.

저렇게 반길 줄은 몰랐는데···?

늘 텐션 좋은 유지은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뭔가 과하게 반기는 것 같다.

꽤 오래 안 봤으니, 누적 반가움···뭐 그런 건가?

“피디님, 피디님.”

다가온 그녀가 눈을 초롱초롱거리며 날······안 본다.

어딜 보나 했더니, 그녀의 시선이 검은 밴에 꽂힌 채로 거무죽죽해지고 있었다. 무슨 CG를 보는 것 같다. 사람의 생기가 쭉 빠져나가는 뭐 그런 장면.

“어딨어요?”

“뭐가요?”

그녀가 날 보며 황망한 얼굴로 뻐끔거렸다.

“내 스포츠카···.”

#브랜의 회의가 끝났는지, 직원이 다시 다가왔다.

그를 따라 회의실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가니 상석에 앉은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브랜이었다.

“어, 왔습니까?”

벌떡 일어난 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가 건네는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브랜이 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블랙티 두 잔만. 블랙티 괜찮죠?”

“카페인이 들어간 건 뭐든 괜찮죠. 생명순데.”

“하하.”

얼음장 같던 첫 만남에 비하면 사뭇 달라진 온도 차다.

이제는 어엿한 사업 파트너로 대우를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장 프로듀서를 궁금해하는 직원들이 꽤 돼요.”

그가 나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는 브랜.

“절요?”

“특히 엔지니어들이요. 레드리시의 이번 앨범에 대해 놀랍다고 표현하더군요. 전 듣는 귀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심혈을 기울였던 작업인 만큼.

이런 얘길 들으니 기분이 좋다.

그 사이, 직원이 블랙티를 가져다주었다. 홀짝이자 쌉싸름한 홍차의 맛이 혀끝에 남아 맴돌았다.

“이번 코첼라 라인업도 대단하던데요.”

브랜이 끄덕이며 웃음을 흘렸다.

“장 프로듀서가 그때 코첼라를 언급하지 않았으면 일이 어려워질 뻔했죠. 가장 작은 공연장에서 가장 안 좋은 시간대에 공연을 할 뻔했어요.”

미래에선 뻔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 악조건 속에서도 빛을 발한 레드리시인데.

더 큰 판을 깔았으니, 더 환하게 빛나겠지.

“그건 그렇고···.”

브랜이 핸드폰을 갑자기 뒤지기 시작했다.

“레드리시에 베이스가 없단 말이죠.”

“아. 그렇죠.”

“그래서 베이시스트를 한 명 섭외해놨어요. 코첼라에서 앤의 세션을 맡고 싶다고 먼저 러브콜을 보내온 연주자인데 이 친구한테 레드리시까지 같이 하라고 시킬 생각이에요. 연주자들 사이에선 요즘 꽤 유명한 친구라더군요.”

그가 핸드폰에서 프로필을 찾아 내게 건넸다.

”톰이라고.”

“···톰 베젤이요?”

맙소사.

“아시는 것 같네요?”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이 이름을 또 듣네.

알긴 알지. 좋지 않은 것들 위주로.

“확정된 건가요?”

“아뇨. 아직. 앤이 최근에 좀 바빠서 결정은 안 났어요. 그쪽 매니지먼트에서 계속 러브콜은 오는데 이런 건 또 아더 레이블 쪽 하고도 얘기를 하고 결정해야 하니까.”

순간 이 연주자와는 별로 좋지 못했던 일이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걸 이르는 꼴이 우스워 삼켰다.

하긴, 굳이 그럴 필요 없지.

내가 뭐 성인군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톰 베젤보다 훨씬 나은 베이시스트가 있다면요?”

실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이 윤···윤테이···아 씨.”

브랜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아무튼, 어땠어?”

그는 자신의 귀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믿을 만한 귀들을 여러 명 밑에 두었다.

꼭 자신이 모든 걸 능통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의 자문위원에 가까운 직원들이 입을 열었다.

“연주가 안정되어 있어요. 박자를 밀고 당기는 게 아예 몸이 배어 있더군요.”

“어떤 장르도 연주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주법이 완벽하게 체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했어요.”

“톤은···어후, 이건 뭐 말할 게 없어요. 처음 봤습니다. 톤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베이시스트는.”

가만히 듣던 브랜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좋다는 거지?”

여직원이 단언했다.

“개쩐다는 거죠.”

“그 정도야?”

“앤한테 영상 보내봐요. 아마 10분 안에 뛰어 내려올걸요?”

“······.”

브랜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여직원이 덧붙였다.

“그 작은 나라에 이런 인재들이 널려있을 리는 없고···이쯤 되면 그 한국인 프로듀서라는 사람이 궁금해지네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브랜.

“그러게. 코첼라를 떠올린 것도 그렇고···감이 좋나보네.”

그는 묘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 영상을 보낸 지 정확히 8분 만에 앤이 브랜의 사무실로 뛰어 내려왔다. 황금빛 가운을 펄럭이며.

“이 브로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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