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71화 (71/221)

071. 재능들이 한자리에 (2)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유독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그만큼 나에게 강렬했던 기억들.

제인의 4집을 처음 들었을 때가 그랬다.

지금도 꽤나 또렷하게 기억이 날 정도다.

곡은 총 7개로 이루어져 있었고, 모든 곡이 제인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존 그녀의 곡들과 이질감이 들 지언정 노래는 정말 좋았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곡.

처음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이정명 피디의 제안으로 듣고 답했던 그 곡이 이번 앨범의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타이틀로 내 곡이 선택되었다.

곡 하나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남달랐는데, 이쯤 되니 감격스러울 정도다.

정해진 선로를 벗어난 두 번째 인생이,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거다.

사람이 간사하다고 해야 하나. 변덕이 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자연스러운 걸지도···.’

음악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내가. 지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상념을 이어가며 커피를 내리는데,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차량이 보인다.

연이은 녹음으로 피곤에 절어있던 눈이 크게 뜨였다.

곧장 다 내린 커피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섰다.

“왔어요?”

“네.”

빙그레 웃으며 다가오는 윤태영.

반가운 건 물론이고, 든든한 지원군이 당도했다는 생각에 기대가 차올랐다.

“대단하네요···.”

그의 눈이 스튜디오 내부를 훑으며 두 배쯤은 커진 것 같다.

나도 함께 둘러보며 끄덕였다.

멋지지. 나도 매일 아침 놀라는 중이다. 이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지가 보름이 되어가는데도 말이다.

“녹음실은 더 대단해요.”

윤태영의 눈이 반짝인다.

등에 멘 무기를 들고 곧장 녹음실로 돌진할 것만 같이.

그러나 윤태영은 이내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스튜디오 내부로 들어가자 확 쏟아지는 시선들 때문이었다.

그가 작게 말했다.

“다들 피디님을 쳐다보네요.”

“본인을 보는 거란 생각은 안 들어요?”

윤태영의 고개가 기울었다.

“저요? 절 왜···.”

“궁금한 거죠.”

내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 놀라운 연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지금까지의 일들을 설명했다. 톰 베젤에 대한 이야기까지, 전부.

모두 들은 윤태영의 표정이 괴이해진다.

“톰 베젤이면 요즘 가장 뜨는 베이시스트잖아요?”

“그렇다고는 하더라고요.”

“근데 제 연주가 그보다 나았다는 게 믿기질 않네요···.”

“여기 톰 베젤보다 더 유명한 연주자들이 한 트럭이에요.”

요즘 뜨는 놈보다 한참 전에 떠서 둥둥 떠다니는 정상급 연주자들.

“그들이 선택했어요. 형 연주를.”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적어도 여기에선, 형이 가장 떠오르는 베이시스트예요.”

#녹음 준비를 마치고, 윤태영에게 톤 메이킹 시간을 주었다.

이제 막 호텔에 짐 풀고 온 윤태영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이렇게 곧바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일정이 꽤 딜레이가 되었으니.

그나저나···.

‘바글바글하네.’

넓은 녹음실이 사람들도 가득 찼다.

총괄인 이정명 피디가 오는 것도, 앨범의 주인인 제인이 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왜 이 곡이랑 상관없는 연주자들까지···.’

“방해하지 않겠대.”

이정명 피디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다들 궁금한가 보다.

윤태영의 실연이.

“뭐, 저야 상관없지만···.”

하긴, 윤태영도 상관없을지도.

오히려 바글거리는 사람들보단 제인이 더 신경 쓰일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 보니 엄청난 팬이던데.

아니나 다를까, 제인이 들어오자 윤태영의 눈알이 데굴데굴 둘러 다니기 시작한다.

“톤은 다 잡았어요?”

-아, 네···네!

“긴장 충분히 풀고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그, 연습 한 번 만 할게요.

“네.”

-!

버징을 가득 머금은 베이스 소리가 울리자 각자 사담을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몰려든다.

“시작하려나 본데?”

“손 푸는 거잖아.”

“아, 그런 거였군. 근데 헬빈 그 친구는 왜 안 왔어?”

“어차피 투표 때 들었던 연주 그대로일 텐데 굳이 올 이유가 없다더군.”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그래도 난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이야.”

뒤편에서 넘어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악보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부스에서 윤태영이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해볼까요?”

-넵.

토크백에 얹었던 손을 떼자, 엔지니어가 녹음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네 번 울리고, 데모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8마디가 지나서, 베이스 연주가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니터엔 윤태영의 연주가 파형화 되어 그려진다.

그리고,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연주가···또 달라졌잖아?”

대답은 없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연주에 빠져들고 있었기에.

‘달라진 게 아냐.’

또 한 번 발전한 거지.

뼈대는 여전히 처음 보내줬던 데모, 그대로였다.

하지만 연주는 그때와 달리 더 담백하면서도 있어야 할 음들은 모두 존재했다.

같은 음들마저도 윤태영의 손에서 연주되니 전혀 달랐다.

별거 안치는데, 별거인 연주가 들려오고 있었다.

라인을 더 발전시켜 왔다는 얘긴 녹음 전에 들었다.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길래 얼마나 변했을까 싶었는데, 이 정도라니···.

내심 감탄하면서도 악보로 시선을 내렸다.

이번에도 빼곡히 정리해둔 길.

혹시라도 벗어나진 않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했다.

“원래는 브릿지 부분에만 808을 레이어할까 생각했었어요.”

“댐핑감을 주고 싶어서요?”

“네. 그런데 지금 만진 톤을 보니 굳이 레이어할 필요 없이 베이스 톤만으로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음···좀 더 만져볼까요?”

눈을 반짝인 윤태영이 곧장 피드백을 받아들인다.

자연스러웠다.

너무 편하다. 그리고 신이 난다.

항상 음악을 했지만, 이럴 때마다 음악을 한다는 기분이 더 가득 차오른다.

나는 아이디어를 던지고.

윤태영은 그걸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보여주고.

아더 레이블 사무실에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단순한 녹음이 아닌, 음악을 해나갔다.

#프로듀서와 연주자와의 소통이 특별할 건 아니었다.

특히나 녹음실이라면 더더욱 그런 것들이 일상처럼 취급되는 공간이지.

윤태영이 베이스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사람들 입에서 뒤늦은 감탄사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그 사이, 더 발전시켰잖아?”

“이미 두 번째 데모로도 톰 베젤을 이겼다고. 그런데 이건···뭐, 3대 베이시스트라도 데려와야 하는 거야?”

“역시 오길 잘했어.”

“헬빈 이 친구 후회하겠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장기로와 윤태영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눈엔 지금의 광경이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연주자인 자신들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을 바로바로 집어내는 장기로와, 이에 단순히 고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해답을 내놓는 윤태영. 그리도 또 다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장기로.

무한 루프였다.

더 놀라운 건 이 루프가 한 번씩 돌 때마다 연주의 완성도가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다는 거였다.

“이 부분에선 키보드가 절 조금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이번엔 윤태영이 역으로 제안을 한다.

그는 베이스가 가진 한계를 완벽히 꿰고 있었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다른 악기의 도움을 구했다.

역할이 뒤바뀌었다.

이번엔 장기로가 마스터 건반으로 다가가 해답을 내놓는다.

몇몇 건반 연주자들이 흥미로운 눈을 떴다.

‘건반 좀 치는데?’

연주 스킬에 대한 생각이었고.

‘완벽한 해결책이군.’

이건 장기로가 내놓은 해결책에 대한 판단이었다.

‘멋진걸···?’

‘무슨 음악 영화를 보는 것 같네.’

누군가는 살짝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경험했다.

저 둘의 곡을 향한 집착이 눈에 보이고.

그에 따른 발전이 확연히 드러났기에.

“조만간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정명 피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직원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에 이정명 피디가 반문했다.

“응 뭐가?”

“예전에 미국으로 올 때 저희끼리 그랬잖아요. 한국 사람은 언제 빌보드 상단에 올라보느냐고. 그게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젊은 뮤지션들이 저 정도라면···.”

그 말에 이정명 피디는 다시 장기로와 윤태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오자마자 녹음에 투입되었던 윤태영은 그 이후로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 녹음실 저 녹음실을 옮겨 다녀야 했다.

제인의 곡들 중 리얼 베이스 소리가 필요한 부분은 모두 윤태영의 베이스로 교체되었다.

그 사이, 내 곡도 제인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악기들이 녹음을 마쳤다.

드디어. 이제 확인할 차례였다.

제인의 목소리와 그녀의 멜로디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컨디션은 어때요?”

“좋아요.”

“혹시라도 목에 무리가 간다 싶으면 바로바로 얘기해요. 제가 좀···.”

“혹독하기로 유명하시죠.”

“개인적으론 좀 억울한 부분이에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닌 거 같은데. 저도 메이킹 필름 봤는데.”

“악마의 편집일 수도 있죠.”

“피디님도 확신 못 하시는 거 같은데?”

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녹음 준비나 했다. 쿡쿡대며 웃던 제인이 부스로 들어가 목을 풀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녹음실이 가득 찼다.

윤태영의 첫 녹음 때 이상으로.

거의 모든 연주자들이 모인 것 같았다.

“오, 헬빈. 오늘은 왔네? 지난번에 못 본 게 아쉬웠나 보지?”

“그것도 그건데, 이 곡의 완성본은 꼭 듣고 가고 싶어서.”

이 곡이 후반 작업에 들어갈 때쯤이면 연주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다. 할 일이 모두 끝났으니.

곡의 완성본에 가장 가까운 버전을 듣기 위해선 오늘 반드시 들어야 했다.

“나도 이 곡이 제일 맘에 들더라고. 트럼펫 연주가 없어 참여를 못 해 아쉬웠어.”

“동감이야. 들어보니 이 곡도 타이틀이 될 거라던데?”

“더블이야? 하긴, 수록곡으로는 좀 아깝지. 심지어 우린 가사를 못 알아듣잖아. 근데도 좋은데 한국인들은 더 좋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들의 극찬을 들으면서도 가사가 프린트 된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들이 말했듯이.

가사를 안다면, 더욱 좋아질 노래다. 이건.

팬송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시 읽어도 감탄만 나온다.

팬들을 향해 자신이 변화하려 한다는 걸 설명하는 제인이 이 프린트 한 장에 담겨있었다.

-준비됐어요. 전주부터 들으면서 들어갈게요.

“그럼 전주부터 1줄(가사의 첫 줄)까지만 하는걸로 하죠.”

차분히 말하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떨린다.

기대감 때문이리라.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 앞에 선다.

마이크 앞에 서는 행동이.

고작 그런 행동이 능숙해 보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나이를 잊게 한다. 수십 년은 마이크 앞에 선 것처럼 느껴져.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게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대체 어디가 녹음 부스인지 헷갈릴 정도로.

나조차도 연신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전주가 끝나간다.

이윽고.

제인의 입이 달싹이는 순간.

톡.

첫 소절이 떨어졌다.

마이크 위로.

그 작은 울림이 이내, 호수처럼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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