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68화 (68/221)

068.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준비가 한창이던 작업들이 이제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정명 피디는 대학교 수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제인의 곡들을 뽑아내기 시작했고,

제인도 녹음만 하면 될 정도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전담팀은 수시로 TKM 부서들과 연락하여 마케팅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스튜디오 직원들은 이번 앨범을 구성할 연주자들을 리스트업 했다.

김 실장 말로는 그들 한명 한명이 모두 입이 떡 벌어질 뮤지션들이라고. 나도 슬쩍 들어봤는데···이건 뭐.

‘정 대리가 했던 우스갯소리가 더 이상 농담으로 안 들리네.’

제인 전담팀이 이번 앨범에서 TKM 기둥 하나는 뽑으려는 것 같다고 했었지.

회사에서도 기꺼이 내줄 기세고.

“제인이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았나···?”

중얼거리다 며칠 전 이정명 피디가 물어본 게 떠오른다.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냐고 그랬었다.

1년 정도가 지나왔고.

딱 그만치 남았지.

그 뒤에 어떡할 거냐는 질문엔 마땅히 할 대답이 없었다. 음악 하느라, 내 사람 만드느라, 레이블을 꾸리느라. 그런 걸 계획할 정신도, 마음도 부족했다.

‘그 다음이라···.’

그나저나 테라스 경치가 죽여준다.

한국과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엄청 넓은 하늘이 온통 불그스름하다. 그걸 비추는 바다도 마찬가지.

손에 든 머그컵이 꽤 묵직하단 것도 잊고 한참을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예전과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진 현재와, 그에 따라 바뀔 미래를 곱씹으며.

상념을 깬 건 진동이었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깜짝이야. 이건 내 얼굴이다. 내 눈언저리를 가리고 있는 글씨는 유지은이고.

영상통화잖아?

-어, 받았다!

작은 화면에 옹기종기 네 사람이 모여있다.

어? 왜 세 명이 아니라, 네 명······.

“거기서 뭐 해요?”

머리를 뒤로 묶은 윤태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합주 하는데 베이스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래서 납치당하신 거예요?”

-피디님, 납치라뇨!

유지은이 발끈한다.

-감금이죠.

그거나, 그거나.

-전 괜찮아요. 클럽 빌스의 잼 데이 제외하면 합주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잘 됐죠.

-아니, 오빠 그렇게 얘기하면 뭔가 엄청 피해자 같잖아요!

-저 즐거워요.

-대사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없잖아요. 대답에.

대체 이건 무슨 조합이지.

-아, 기영씨 회사에 왔었어요.

“그래요?”

-네. 계약도 했고, 매일 출근 도장 찍고 있어요. 아마 지금도 공용 작업실에 있을 거예요.

계산해보니 한국은 지금 점심쯤이었다.

-피디님, 피디님.

“네?”

-주변 구경 좀 시켜주세요!

후면 카메라로 바꾸자 ‘오오오!’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뭐야, 완전 영화 속 한 장면! 어, 저기 저 빨간 다리! 영화 속에서 엄청 부서지는!

금문교를 저렇게 기억할 줄이야.

-너무 예쁘다···!

-저기가 헐리우드인가?

이병국의 질문에 유지은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치 미국이니까!

-아니지 바보들아. 우리가 가는 곳이 헐리우드가 있는 곳이고, 저긴 샌프란시스코잖아.

기성운의 핀잔에 유지은이 도끼눈을 뜬다.

-재수 없어. 지도 안 가봤으면서.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어머머’하며 예쁘다고 감탄한다.

가만히 화면을 지켜보던 윤태영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참, 어제 부탁하신 거 메일로 보냈습니다. 근데 좀 아쉬웠어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훨씬 좋게 뽑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녜요. 데모 녹음인데요 뭘. 제가 들어가면 바로 확인할게요.”

그때 유지은이 끼어든다.

-이 오빠 어제 그거 듣고 잠도 못 잤대요.

당황하는 윤태영을 보며 어쩐지 씁쓸해졌다.

“미안해요.”

-아뇨, 곡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못 잔 거예요. 미치겠더라고요.

“그거 말고요. 데모 녹음이라서요.”

아쉽다.

윤태영이 내 곡의 베이스를 해줬다면 훨씬 든든했을 텐데.

내가 그의 재능을 썪히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물론 예정된 미래에서도 윤태영은 수년이 지나야 유명해지긴 하지만···. 아더 레이블까지 데려왔다면, 더 빨라야 하지 않나.

-무슨 소리세요. 데모 녹음이 어때서요. 그리고 무려 제인씨한테 갈 데모예요. 미안하실 게 아니죠.

“······.”

입맛을 다시며 화면을 보는데, 옆에서 뜨악한 표정의 유지은이 보인다.

-두, 둘이 뭐해요 지금!? 노을 배경으로 영화 찍어요? 전 반대예요!

“뭘요?”

-이···이···이 결혼이요!

쿨럭. 이건 또 무슨···.

어느새 각자의 악기로 돌아간 이병국과 기성운이 혀를 찬다.

-야, 야 방해 말고 얼른 이리로 와.

-내가···방해물이야?

-응, 것도 시끄러운.

끊어야겠다. 더 못들어주겠어.

그때였다.

“피디님. 가사 다 썼는데-.”

나긋한 소리가 들려왔고.

화면 속 이병국과 기성운이 순식간에 화면으로 달려온다. 뚫고 나올 기세로.

-제, 제제제···!

근데 의외로 이 목소린 둘의 것이 아니다. 윤태영이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어?

마치 경이로운 무언가를 본 듯한 얼굴.

그제야 윤태영과 나를 번갈아 보던 유지은이 생글생글 웃는다.

-와, 제인님이다아.

#

모니터에 제인이 적어온 가사를 켜두고.

귀로는 그녀가 부르는 노랠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다리를 떨고 있나?

내려다보니 그건 아니다.

근데 몸이 떨린다.

“······.”

윤태영의 베이스를 얹은 데모에 제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따끈따끈한 가사를 얹어서.

장르는 어쿠스틱 팝.

리드미컬한 연주 위로 제인이 말을 한다. 정말 말하듯이. 아니, 읊조리듯이.

그럼에도 가사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들린다. 모니터에 가사를 띄울 필요가 없었네.

눈을 감았다. 들리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가사가 그려진다. 제인의 자작곡들이 자신의 이야기라면. 이건···좀 더 과거의 이야기다. 변화를 결심했을 때의 감정들.

팬이라면. 진짜 팬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겠네.’

가사는 완벽했다. 그녀의 작사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또 감탄한다.

노래가 끝나고. 동시에 녹음도 끝났다.

마이크에서 제인이 분홍빛 입술을 뗐다.

“얼른 보내죠.”

내 말에 제인이 환하게 웃었다. 내가 엄지를 치켜들었거든.

그녀는 곧바로 대학교에 있을 이정명 피디에게 음원을 보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스튜디오로 돌아온 이정명 피디가 꽤나 들뜬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강의 시간이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고.

#

“누구?”

“제인.”

“···그게 누군데?”

짧은 머리에 광대가 도드라진 백인 남자가 갸우뚱한다. 머릿속에서 명함을 찾듯이.

유명 베이시스트로서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뮤지션들과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톰 베젤이 바로 그였다.

그의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사람일 거야. 당연히.”

“당연히?”

“한국 뮤지션이거든.”

“한국···?”

그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내가 거기까지 가서 녹음해야 하는 거야?”

“물론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거기 LOOK STUDIO에서 녹음이 진행 될 거래.”

“아, 거긴 알지. 거기 프로듀서가 꽤 유명하잖아. 그 사람 한국인이었나 보지?”

“그럼 뭔 줄 알았는데?”

“뭐, 중국인이나 일본인일 줄 알았지.”

끄덕이던 매니저가 별로 탐탁치 않는 얼굴을 마주했다.

“근데 거기까지 갈만한 일이야? 대충 여기서 녹음해서 보낸다고 하면 안 돼?”

“LOOK STUDIO야. 그게 될 리 없지.”

“하긴, 깐깐하기로 유명한 곳이니까···그래도 썩 내키진 않네. 무명 뮤지션이라니.”

“한국에선 탑급이래.”

남자가 취향에 맞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낄낄 웃는다. 명백한 조소.

“그건 거기 얘기고.”

“그리고 금액이 쎄.”

“얼마나?”

매니저의 이어지는 대답에 남자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한참을 웃던 그가 말을 이어간다.

“호우, 탑급 맞네! 세상에 웬만한 빌보드 뮤지션꺼 해주는 것보다 더 받잖아? 그 정도면 가야지!”

남자가 헤죽거리며 자신의 베이스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가서 간 좀 봐야겠네. 대충 할 수 있으면 그게 좋잖아? 어차피 빌보드에 오를 곡도 아니고.”

#

각 곡의 구성에 맞춰 녹음 일정이 잡혔다.

그 일정에 따라 연주자들이 스튜디오로 도착했다.

음악인들의 연예인이라 불러도 좋을만큼 유명한 연주자들. 그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피디님.”

작업실에서 녹음에 대한 아이디어와 데모를 다듬고 있는데 김 실장이 찾아왔다.

그가 온 이유를 알고 있다.

오늘 제인의 자작곡 중 하나가 녹음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과정을 보길 원했고, 그는 녹음이 시작되면 알려주러 온 거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앞서 나간 김 실장이 커다란 녹음실 문을 열어젖혔다.

디렉을 준비 중인 이정명 피디와 제인이 보인다. 그리고 몰려드는 여러 색의 눈들.

녹음 직전의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침전물과 부유물의 조화랄까.

착 가라앉아 있는 듯 하면서도 어딘가 붕 뜬 그 느낌.

이정명 피디가 그들에게 날 소개했다.

“아까 말했던 또 다른 프로듀서예요.”

여러 종류의 눈빛들이 비쳤지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호기심. 혹은 무관심.

아무래도 후자 쪽이 더 많은 것 같지만···.

녹음이 시작되었다.

연주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저들 중 몇몇은 나와도 작업하게 될 것이기에 그런 것들을 시뮬레이션해 보기 위해서 왔다.

녹음실의 시스템이나 부스의 상태. 그리고 연주자들의 성격 등.

원활한 녹음을 위해선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문화가 다른 이들과 작업을 같이 하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니까.

“방금 그 부분에서요. 하이엣이 좀 더 타카타카- 하는 느낌이었으면 좋겠고, 스네어 조율을······.”

자신의 자작곡이니만큼, 디렉을 맡은 제인이 조곤조곤 설명한다.

이정명 피디는 중간중간 아빠 미소 비스무리한 것을 지으며 녹음을 총괄했다.

나는 빠르게 필요한 부분들을 캐치해 냈다.

저 드러머의 스타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러니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땐 어떤 방식이어야 할지.

그러는 와중에도 연신 감탄했다.

‘확실히···다르구나.’

시스템도 시스템이지만. 연주자가 대단했다. 디렉을 보는 입장에서 상대를 파악하듯, 연주자도 디렉을 보는 제인을 재빠르게 캐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제인이 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쓸데없는 말이 필요 없어지는 거다.

그걸 보고 있자니 흥분됐다.

서서히 맞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감탄은 다음 녹음에서 물에 젖은 것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베이스 차례였다.

마찬가지로 내 곡 작업도 함께 하게 될 뮤지션이었고.

업계에서 떠오르는 신예.

몇 년 사이 빌보드 상위권 곡들과 숱하게 작업을 해왔다는 톰 베젤이란 연주자.

나도 언젠가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게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술을 적셨다.

잘 친다. 뛰어난 베이시스트라는 건 알겠다.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윤태영이 더 나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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