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67화 (67/221)

067. 브릿지 (2)

제인이 만든 트랙들이 흘러나온다.

재즈 베이스에 팝적인 느낌을 가미한 노래들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새삼 또다시 감탄하는 이정명이었다.

제인이 원하는 앨범 컨셉에 대해 반대의 입장이긴 하지만, 이건 그것과 다른 얘기였다.

‘대단한 재능이지.’

제인은 가창자로서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다. 그러나 작곡가로선 초보나 마찬가지였지.

‘근데 이런 결과물이라니.’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그에게 제인은 제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녀의 성장이 반가웠다.

그 사이, 트랙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듣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할 것 같은 브라스가 쏘아진다.

경쾌한 호흡들이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끈다.

그러면서도 멜로디가 지나갈 길을 남기기 위해, 소리를 가득 채우진 않았다.

이것 또한 제인의 재능이 감탄스러운 부분이었다.

‘딱 적절히 비워뒀어.’

자신의 목소리가 들어갈 자리를.

그러나, 이 배킹 트랙을 들었을 때 가장 강렬히 떠오르는 건 제인이 아니었다.

배킹 트랙을 곱씹어 들을수록 아이러니하다.

‘이걸 듣고 컨셉을 맞춘다, 라······.’

한국에서 온 프로듀서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도.

돌이켜봐도, 정말 확신이 담긴 말투였다.

확신하지 않는다면 제인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가 보여준 확신이 이정명의 판단을 부추겼다.

‘정말 천재 일지도.’

매스컴이 만든 허상 같은 천재들 말고. 진짜 천재. 말마따나 하늘이 내렸다고 할 만큼 엄청난 재능을 보여주는 이들.

UC 버클리에서 퍼포먼스 전공 교수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친 이정명. 그가 가진 ‘천재’란 단어의 벽은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아득히 높은 그 벽을 한국에서 온 프로듀서가 뛰어넘을 것만 같았다.

그게 지금 이정명을 설레게 했다.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천재가 맞다면···,

‘탐난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스튜디오로 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우연일 수도 있다. 배킹 트랙만으로 곡의 컨셉을 맞추는 게 우연으로 될 일이 아니란 걸 내심 알면서도 그는 의심을 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그는 오늘부터 곡 작업에 돌입할 거다.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에는 보이겠지.

가진 바 재능의 크기를.

#

‘점심 같이 드실래요?’

회의가 꽤 오래 이어지고.

뱃고동 소리에 민망하게 웃던 제인이 물어왔다. 나는 승낙했고.

‘스튜디오 내에 구내식당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아니면 이 구불진 언덕 어딘가에 음식점이 있거나.

그런데 눈앞에 아스팔트가 요동치고 있다.

‘의외···를 넘어서네, 이건.’

지난 앨범까지만 해도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소녀스런 이미지를 찰떡으로 소화해내던 그녀가 차고에서 차를 꺼내왔다.

새빨간 스포츠카를.

엉겁결에 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낮은 진동이 심장을 갉아 먹는 느낌이랄까. 생전 처음 타보는 차에 내심 감탄하는 사이, 금문교를 건너 항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으로 향한다.

외국인들의 시선들이 훅훅 꽂힌다.

슬쩍 돌아보니 제인은 눈이 꽤 잘 들여다보이는 선글라스를 끼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이 신기하기도 해서 빤히 바라보는데, 차가 길가에 멈춰섰다.

푸른 바다와 배. 줄줄이 늘어서 있는 식당들.

나는 제인에게 이끌려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해산물 괜찮으세요?”

끄덕이자 메뉴판을 훑을 것도 없이 주문을 줄줄 읊는 제인.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점원에게 감사하단 얘길 하고선, 나를 보았다.

몇 초 정도 지나고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스포츠카 좋아해요.”

“···?”

“술 마시고 노는 것도 좋아하고.”

“···.”

“근데 제인은 그러면 안 되죠?”

싱긋 웃는 제인의 표정이 화사하면서도 처연했다.

게살 스프와 게살 샌드위치가 식탁 위로 올라온다.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허기가 어느 정도 찰 때쯤, 제인이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였더라···암튼,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아파서요?”

“아뇨. 뭔가 콱 막힌 느낌이었어요. 노래든, 가사든···앞에서 신이 나서 내 노랠 들어주는 관객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거 나 아닌데, 이런.”

“그래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거네요.”

“네.”

끄덕이는 제인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이 잘게 떨리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툭 말했다.

“가사는 제인씨가 써줬으면 좋겠어요.”

“···제가요?”

천천히 끄덕였다.

눈을 굴리던 제인 이내 날 보며 물어온다.

“어떤···얘길 해야 할까요?”

“스포츠카?”

“으에···?”

“술?”

벙찐 제인의 표정이 보인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아아.”

“그냥 자기에 대해 말해요. 솔직하게. 말 안 하면 모릅니다. 그냥 변한 줄 알지.”

제인은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눈꼬리가 휘도록 웃었다.

“제가 하고 싶은 게 그거였어요.”

제인의 작사 실력이야 완전 믿을만하지.

나도 내 나름대로 곡의 방향을 떠올리며 퍼즐을 맞춰나갔다.

“사실 A&R 팀장님이 피디님을 제안하기 전부터 저 피디님 노래 정말 많이 들었어요. 들으면서 항상 감탄했거든요. 이 곡들을 전부 한 사람이 작곡했다니! 하면서.”

접시에 코를 박다가 순간 게살이 코로 나오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로 민망했다. 무려 제인이 하는 칭찬이었으니까.

“그래서 제안이 들어왔을 때, 얼른 바로 알겠다고 했죠. 피디님이면 저에게 어울리는 노래를 잘 만들어 주시겠다 싶어서.”

배시시 웃던 그녀가 덧붙였다.

“전담팀도 긍정적이더라고요. 요즘 가장 화제성 있는 프로듀서라면서.”

끙.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화제라 문제지. 한국에 있을 땐 사람들 시선에 자연 발화를 해버릴 것 같았거든. 어디까지나 일반인인 내 기준에서지만.

“그 정돈 아니고요.”

“그 정도던데?”

“그 정도 아닙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며 게살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맛있네.

이후로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은 계속되었다.

작곡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녀가 얼마나 작곡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능력도 있다는 걸.

‘다음 앨범부턴 대부분의 곡을 자신의 곡으로 채웠지.’

이번 앨범에서 제인은 변화를 보여줬고.

다음 앨범에선 거의 모든 곡을 자신이 작사, 작곡하여 선보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입지를 높이게 된다.

어느새 식사가 끝나간다.

배가 부르고, 기분도 꽤 산뜻했다.

이제···.

스튜디오로 돌아가, 이정명 피디를 설득할 일만 남았네.

#

그런 줄 알았는데.

“대박, 대박! 어떡해, 진짜 제인이야. 여행 와서 제인을 만나다니!”

차로 향하다 딱 마주쳤다. 여행객들을.

제인이 주황빛 도는 선글라스까지 썼음에도 그녀들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너무 투명하긴 했어.

“그니까! 짱이다. 언니도 여행 오신 거예요?”

소리 지르는 여행객 옆에 있던 여자가 제인에게 물었다.

둘 다 땡이다. 여행도 아니고, 언니도 아닐 듯.

“하하, 저는 음악 작업하러 왔어요.”

“정말요? 곧 앨범 나오겠네요!? 아 근데, 진짜 너무 예쁘세요. 실제로 보니 완전 여신!”

“혹시 사진 같이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저, 저도요!”

제인이 살포시 웃으며 그녀들과 작은 팬미팅을 열었다. 사진도 찍고, 싸인도 해주고.

“야, 나 완전 못 생기게 나왔네. 이 정도면 자동 얼굴 몰아주기 아니냐···?”

“풉. 그러니까 저 미모에 대들지 말고 나처럼 요래 입을 가려야지.”

“다시 찍어달라 할···어? 이 사람···.”

여행객이 핸드폰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누구? 매니저?”

여긴 매니저가 없다. 옆에서 제인은 빵 터졌다. 그렇담 나인가. 난 또 매니저인가···.

“기로 프로듀서 아니야!?”

아니네?

“어, 어! 그 오디셔닝에 나왔던?”

2차 소음이 터져 나온다.

제인이 진짜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피디님, 그 정도 맞잖아요. 엄청 유명하시구만.”

“······.”

어쨌든, 매니저라는 누명은 벗었다. 시끌벅적했던 팬미팅도 끝났다.

여행객들이 떠나고, 제인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속 웃어댔다. 그러다 차 앞에 멈춰 서서 빤히 날 바라보았다.

“···?”

“죠기 앞까지만 운전해주세요.”

“내가요? 이걸요?”

제인이 턱짓한다. 건너편 카페. 거기엔 아까 그 여행객들이 자리를 잡고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솔직해지겠다면서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가 봐요.”

나는 어처구니없어하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혹시나 사고 나도 내 탓 아니에요.”

“당연하죠.”

제인이 싱긋 웃는다.

나도 입매가 올라갔다.

#

딱 3분 정도 몰다가 제인과 선수교체를 했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는지 양팔이 쑤시다. 어디 갖다 박을까 봐 노심초사했네···.

덕분에 스튜디오로 가는 내내 겁 많다는 놀림을 받아야 했다. 생전 처음 스포츠카를. 그것도 남의 차를. 당연한 거 아닌가?

도착하자마자 제인이 나를 녹음실로 이끌었다. 이정명 피디가 주로 음악 작업을 하는 곳.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커다란 녹음실에 앉아 믹서를 만지고 있었다.

“···?”

그가 의문 어린 표정을 보내온다. 제인도 날 보길래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곡 스케치를 가져왔습니다.”

“벌써?”

그의 고개가 기운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와서 한 거예요?”

“어제 호텔방에서 썼습니다.”

“허? 하룻밤 사이에? 뭐···일단 들어봅시다. 너는 들었어?”

“네.”

“마음에 든 눈치네?”

제인이 배시시 웃었고, 이정명 피디도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와서 들려줘요.”

재빨리 다가가 파일을 넘겼다.

이윽고 트랙이 재생되었다.

이정명 피디는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노랠 들었다. 미동도 없이.

노래가 끝나자 그가 눈을 떴다.

덤덤한 얼굴로 제인을 본다.

그리고 이번엔 날 본다.

“곡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나는 제인에게 했던 그대로 말했다.

이 곡이 두 컨셉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줄 거라는 것. 그러니 이번 앨범은 제인의 뜻대로 가도 되지 않겠냐는 것.

이정명 피디는 설명을 듣는 내내,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듯하네. 근데···그럼에도 감수할 리스크가 크다는 건 알고 있죠? ‘제인’이라는 뮤지션에게 굳어진 색깔이 있고 그 색 때문에 생긴 팬층이 있는데,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예요. 이건.”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그녀에게 딱 맞는 멜로디.

그리고 그녀가 만들 솔직한 가사.

이걸로 안 된다면, 어떤 곡을 가져다줘도 안 될 거다.

내가 확신에 찬 얼굴로 바라보자 이정명 피디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요. 일단 이렇게 해보도록 하죠. 진행 상황을 보면서 정말 이게 브릿지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이질감을 줄여 줄 수 있을지 확인해봅시다.”

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제인이 보인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뒤꿈치를 잡았다.

“그런데, 장 피디.”

이정명 피디가 날 보고 있었다.

내가 서기영을 보았을 때, 저런 표정이지 않았을까? 싶은 얼굴로.

“TKM 계약, 얼마나 남았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