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55화 (55/221)

055. 타석에 선 타자들 (1)

“뽑아놓은 피아니스트 목록입니다.”

김지희가 패드를 건네며 말했다.

현중 필에는 피아니스트가 없다. 협연이나 가곡을 제외하고는 평소에 함께 연주할 일이 없으니 굳이 소속으로 두지 않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우리 쪽에서 직접 정해야 하는 상황이 온 거다.

화면을 넘기자 밀려 나오는 프로필.

사진과 학력, 그리고 이력 등이 주르륵 기재되어 있었다.

이걸 보니 참 막막하네···.

‘최연석 감독한테 조언을 구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넘겼다. 학력은 대부분 유학파에 이력도 화려하다.

어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어떤 무대에 올랐다.

‘영상을 따로 봐야 하냐···. 실연이 듣고 싶긴 한데, 다 불러놓고 오디션을 볼 수도 없고···.’

난감하다. 이래선 답이 없겠는데? 일단 몇 명 추려서 최연석 감독한테······어?

두어 번 더 넘기는 데, 손끝이 우뚝 멈췄다. 시선이 툭, 하고 걸려서.

“이분···.”

“네? 아, 그분은 실력 좋다는 평이 워낙 많아서 리스트업 해놓기는 했는데, 이력이 너무 없죠?”

학력은 영국 킹스 칼리지. 이력은 작은 페스티벌 무대에 선 것 딱 하나뿐인 프로필.

그런데 얼굴이···.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이 낯이 익었다. 시선을 올려 이름을 확인해 본다. 역시나 아는 이름.

백기우.

그치. 이런 얼굴의 백기우가 또 있을 리 없지.

나는 그에 대해 떠올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클래식 피아니스트지. 하지만 그가 앞으로 나아갈 분야는 전혀 당연하지 않고.

클래식보단 대중음악가에 걸맞은 행보. 그래서 독주회가 아닌 콘서트를 여는 피아니스트.

반가움보단 적절함이 떠오른다,

그가 이번 곡에 적절한 피아니스트일 것 같다는 생각.

기교보단 선율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연주자를 구하고 싶었거든.

“그쵸.”

“아, 네. 정말 이력이 너무 없긴···.”

“이분, 실력 좋죠.”

“···네?”

근데, 구한 것 같네.

#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

여기에 피아니스트 백기우와 최정아까지.

총 40여 개의 소리가 녹음 되어야 한다. 그것도 멀티트랙 레코딩으로 동시에.

그러려면 일반적인 녹음 부스로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해외라도 나가면 모를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우리는 고심 끝에 콘서트홀 녹음을 진행하기로 했다. 아예 대관해버려서 날 잡고 녹음을 뜨는 거지.

“와···.”

최정아가 입을 쩍 벌리며 무대로 나아간다.

내가 그 뒤를 따랐고, 내 뒤엔 최연석 감독과 유명 엔지니어들, 그리고 이곳 관계자가 함께 있었다.

“장비는 어떻게 쓰실 예정이세요?”

관계자의 물음에 엔지니어들이 답한다.

“메인이랑 스팟 전부 쓸 예정이고요. 마이크프리앰프는···.”

그들만의 대화다. 그래도 프로듀서이니, 오케스트라 녹음에 대해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별세상이었다.

귀를 슬며시 닫는데, 최연석 감독이 옆으로 다가와 주억거렸다.

“공간이 괜찮네요.”

아, 여기선 공연한 적이 없었댔지.

“오케스트라 앨범을 낼 일이 있다면, 여기가 좋겠어요.”

“제가 듣기로는 잠실에 짓고 있는 콘서트홀이 더 괜찮을 거라 하더라고요.”

“그 초고층 빌딩···?”

“네.”

미래에 대형 오케스트라들이 거기에서 녹음을 종종 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완공만 됐어도 최정아 녹음도 거기서 하려고 추진했을 거다. 물론 비용 등의 현실적인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나만의 생각이지만.

최연석 감독의 시선이 홀을 훑다가 무대 쪽에 서 있는 최정아를 향했다.

“정아 씨는 이번이 두 번째 곡이더군요.”

“아, 네.”

그가 턱을 쓸며 눈을 빛냈다.

“앞으로 세 곡 정도 더 내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세 곡이면, 미니 앨범 하나 정도인데, 그런데 왜요?”

“다섯 곡 정도면 협연 형식으로 해서···충분히 콘서트가 가능할 것 같더군요.”

“···아?”

그가 꽤 즐거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작곡가님의 작곡도. 저분의 목소리도 전 마음에 듭니다. 딱 듣자마자 알겠더군요. 작곡가님이 왜 저 가수분을 선택했는지.”

음. 사실 내가 선택한 건 아니고 저쪽 멜로디가 날 선택한 것 같긴 한데···.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궁합을 자랑하는 목소리라고 생각해요.”

이 양반, 데모를 처음 들었을 때 눈빛이 확 바뀌더니 가 녹음을 듣고 나서부턴 아주 초롱초롱하다.

뿌듯함이 차오른다.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지어 보일 수 있었다.

‘녹음 당일에 들으면 많이 놀라겠는걸.’

지금의 최정아는 또 다르니까.

처음 ‘기억애’를 통해 성장했던 것처럼, 다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멜로디의 역할이 점점 분명해진다고 느낀다. 언젠가 이 상승 곡선도 완만해지고 정점을 찍겠지.

그때가 되면 유심히 지켜볼 생각이다.

또 다른 성장통을 겪지는 않는지.

최연석 감독과 나란히 서서, 무대 쪽에 서 있는 최정아를 지켜봤다. 그때 엔지니어가 최연석 감독에게 말을 걸어왔다.

“감독님. 구성표를 받아보긴 했는데, 지금 바이올리니스트분들 자리가 자칫 잘못하면 비올라랑 섞여 믹싱 때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차라리 음역대가 확 차이 나는 콘트라베이스가···.”

그들의 대화에 최연석 감독이 동참하고.

나는 터벅터벅 앞으로 내려갔다.

최정아가 무대 바로 아래에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뒤로 넘어갈 것 같이 멍하니.

“왜?”

피식 웃으며 묻자 최정아가 날 돌아본다.

“소리 내 봐도 될까요?”

“당연하지. 점검하러 온 건데.”

끄덕이자 최정아가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이에 황당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천장에 닿겠냐. 무대 올라가서 제대로 질러봐.”

머뭇거리는 최정아를 보다가 그냥 내가 먼저 무대로 올라섰다. 그녀가 내 뒤를 따라온다.

그렇게 무대 중앙까지 걸어가 딱 서는데,

‘높다···.’

관객석이 내려다보이는 높이.

이곳에 선 가수들은 이런 시점으로 노래를 부르는구나···.

그 감정을 이해하려 상상해봤다. 곡을 쓸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앤 더글라스의 콘서트 때도 그랬듯이, 역시 쉽게 상상이 가질 않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감탄과 함께 숨이 차올랐다.

마천루에 오른다고 하늘이 낮아 보이진 않듯이 천장은 여전히 까마득했다.

졸졸졸 따라오던 최정아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옆에 선다.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 번 불러볼래?”

“여, 여기서요?”

“한 소절만. 제대로.”

“음···.”

고민하는 표정이던 최정아가 이윽고 코랄 빛 입술을 벌린다. 그 틈으로 흘러나오는 이번 곡의 후렴구.

나는 기분 좋게 그녀의 노래를 감상했다. 뼈대가 되어준 그녀의 멜로디를 함께 들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어? 내가 뭘 들은 거지?

방금 분명히······아닌가, 잘 못 들었나?

“에구. 마이크 없는 제 목소리는 역시 너무 작네요.”

“···방금 그거 다시 해볼래?”

“네?”

“방금 부른 부분.”

내 굳어진 표정에 의아해하던 최정아가 아까 그 부분을 다시 불렀다.

“이렇게요?”

아닌데···.

‘뭐지?’

#

“혹시 ‘턴투더 레이블’에서 연락 온 거 없죠?”

내 물음에 레이블 일정을 공유하던 여직원이 끄덕였다.

“네. 아직은요. 혹시 피디님 메일엔···.”

“하하, 전부 데모 파일 뿐이에요.”

“아이고.”

곡소린 내가 내야 할 판이다.

데모들도 다 들어봐야 하는데···.

나름 꾸준히 들어 왔는데도 줄지를 않는다. 오히려 더 늘었어. 하긴, 10개를 확인하면 20개가 와있으니···.

그렇다고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레드리시도 이 데모 속에 묻혀있었고. 미래를 알진 못해도 감탄을 자아내는 데모도 더러 있으니.

문제는 지금 나와 함께 가는 뮤지션들 신경 쓰기에도 몸이 모자란다는 거.

‘바쁜 거 끝나면, 한 번 날 잡고 확인해야겠네.’

“아, 그리고 한울 씨 출연한 프로그램 있잖아요. ‘누가 음치 소리를 내었는가?’, 그거 편성 일자 확정되었어요.”

“언제예요?”

시기 중요하지. 홍보에도 적기란 게 있으니.

“한울씨가 출연한 2회는 앨범 발매 딱 3일 전이에요.”

“오, 좋은데요?”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네. 이제 브랜한테 연락만 오면 딱 좋겠는데 말이지.

입맛을 다시며 여직원에게 물었다.

“끝인가요?”

“넵. 바로 고양시로 가시는 거죠? 으, 완전 기대돼요. 정아씨와 오케스트라라니···!”

여직원이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펌핑을 해대니 나도 덩달아 간질거리는 듯하다.

#

그러나 기대감도 잠시. 콘서트홀로 이동해 붉은 쿠션 박힌 문을 밀고 들어가자, 긴장감이 그 위로 덮였다.

이전과는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개의 마이크가 스탠드 위에, 또는 허공을 가로지르는 프레임에서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각자의 마이크 앞에 40여 명의 단원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마다 헤드셋을 낀 채로. 살짝 동떨어진 그랜드피아노에는 백기우가 앉아 있고.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인 광경처럼 느껴지는데···?

“아, 피디님 오셨군요.”

점검하러 내려온 엔지니어가 나를 붙잡고 물었다.

“최정아씨는 예정대로 오시나요?”

“네.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올라가셔서 사운드 체크 좀 해주세요.”

“내려가서 인사만 드리고 바로 올라갈게요.”

천천히 무대 쪽으로 내려간다.

다가갈수록 연주자들의 표정이 보이며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들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예민한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피아노 조율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백기우와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순회공연이라 해도 좋을 인사 퍼레이드를 마치니, 그 사이 최정아가 도착했다.

“목 괜찮아? 어제 또 연습한 거 아니지?”

“안 했어요! 어제 그래도 조금 낭낭하게 잤거든요. 푹 잔 건 아니지만.”

“얼마나 잤는데?”

내 말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계산하더니 배시시 웃는다.

“15시간?”

“···?”

*

얼마나 자야 푹 잔 건지 모를 최정아를 무대에 남겨두고, 나는 진행팀이 있는 부스로 들어갔다.

무지한 나를 도와줄 이 분야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녹음을 준비 중이었다.

스태프가 건네는 헤드셋을 들고 자리에 앉자 유리 너머로 무대가 내려다보인다.

“피디님, 사운드 체크 부탁드립니다.”

“네.”

들고 있던 헤드셋을 끼고 엔지니어들이 잡아놓은 소리를 좀 더 내 방향에 맞게 수정해 나갔다.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줄다리 같았다. 현실을 대변하는 엔지니어들과 이상을 그리는 내 의견 사이에 이따금 스파크가 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마침내. 긴장감의 농도가 부스 안을 가득 메워 숨이 간당간당하는 시점에서야 녹음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분주해졌고, 유리 너머의 공간은 고요해진다.

일제히 올라가는 활들.

내리그어지며 전주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최정아의 목소리가 헤드셋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또 간지럽다. 귀가 아닌, 가슴팍이.

‘기억애’와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들어맞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 곡도 역시나, 최정아를 위한 곡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그녀가 편하게 부르는 게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듣는 나조차도 편하게 들린다는 것.

최정아의 목소리를 받쳐주듯 맴도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서서히 그녀를 끌어올린다.

클라이막스.

어쩌면···.

비록 마이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부스 안에 있어 확실치도 않지만.

방금 그녀의 목소리가 천장에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가을과 겨울 경계선쯤에 와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안 나갔지. 탁월함이 묻어나는 주말 저녁.

나는 티비를 틀고 매트리스에 앉았다.

이사를 했어도 어째 이 그림은 항상 똑같네.

대신, 맥주 말고 차를 우렸다.

지난 콘서트홀 녹음 때, 최정아가 목에 좋은 차라며 내 주머니에 한 웅큼 쑤셔 넣은···이거 무슨 차야 대체?

‘생강···?’

알싸한 맛에 얼굴을 수축시키며 티비 화면에 집중했다.

스튜디오 안에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서 있는 학준이 형.

“푸흐.”

형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연신 웃어댔다.

태초부터 유쾌했을 형이다. 어디서 잘 빼지 않고, 유머 감각도 제법 있다.

패널 중 누군가는 개그맨이죠? 라고 물어볼 정도.

하나, 둘씩 음치와 실력자가 구분되어가는 가운데, 학준이 형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의 시간에서 음치로 지목받는다.

이미 형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그럼에도 흥미진진하다. 모르고 보는 사람들은 더 하겠지.

예상대로 인터넷 반응도 뜨겁다. 학준이 형을 백퍼 음치라며, 뭘 걸겠다는 둥 하는 네티즌들이 대거 속출하고 있었다.

‘하긴, 형이 노래를 잘 부를 상은 아니지.’

그래서 여기에 출현한 게 더 탁월한 선택인 거고.

결국, 마이크를 쥔 학준이 형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와잌씨!

-뭐, 뭐야! 대박!

-으어어어. 망했어요.

-그냥 실력자가 아니라 초절정 실력자였잖아!

스튜디오를 뒤집어 놓으셨다. 아, 인터넷도 함께. 느낌표가 몇 개가 올라오는 거야.

“잘했다, 형.”

입매를 올리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미칠 듯이 바빴던 시간. 이제 그 노력을 확인받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울, 레드리시, 최정아.

타자들이 타석으로 올라설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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