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두 번째 멜로디 (2)
윤태영의 커졌던 눈이 줄어든다.
입술이 반쯤 안 보이도록 음 다물고, 콧잔등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너무 불쑥 꺼냈나? 딱 봐도 조카의 영상을 보고 떠올렸을 법한 생각에 당황스러울 만도 하지. 사실 그게 맞고.
순간 이거다 싶어 자신감 넘치던 마음이 사그라든다.
그런데 침묵 뒤에 의외의 긍정이 들려왔다.
“맞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네?”
“그렇네요. 이 멜로디엔 그게 정말 맞을 수도 있겠어요.”
갑자기 뭐라는 거야.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해서 말하긴 했지.
단조로운, 하지만 힘 있는 멜로디에 오케스트라라니. 이거 되겠다 싶어서.
“독일 가곡···.”
“···?”
“절제된 멜로디가 그런 느낌이 나네요.”
주억거리는 윤태영을 보며 입술을 쓸었다.
독일 가곡이라면, 아마 아리아와 대조되는 그걸 말하는 거겠지. 이 멜로디를 듣고 그걸 떠올릴 줄이야.
도대체 이 천재 베이시스트는 모르는 장르가 뭐야?
내심 감탄하는 사이, 윤태영이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클래식과 독일 가곡은 애초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고요. 음, 최정아 씨의 목소리라면 정말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저 혼자의 생각을 정리하더니 날 보며 옅게 웃는다.
“역시 피디님.”
···모르겠다. 도랑 치다 가재를 잡았든, 어쨌든. 저 윤태영조차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더욱 하고 싶어진다.
돌아오기 전엔 절대 할 수 없었던 규모의 스케일.
그땐 가끔 광고 음악 의뢰가 들어와, 가상 악기로 뉴에이지풍을 따라 했던 게 전부였다.
나름 현악기의 느낌을 흉내 낸다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꽤 괜찮았던 것 같기도.
아무튼, 실제로 녹음을 하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로망 같은 거였어.
하지만 지금이라면, TKM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무명 뮤지션도 아닌 최정아니까.
“그런데 현악기 몇 명 불러서 할 게 아니라 정말 오케스트라를 생각하고 있는 거면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갸웃거리자 말이 추가로 들려왔다.
“클래식이잖아요.”
저것만으로도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세 글자만으로 묵직한 단어였으니까.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클래식 어법에 능통한 사람이 있다면요?”
“네?”
즉, 그런 조력자가 있다면 못 할 것도 없다는 소리지. 그런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고.
물론 그전에···.
아무래도 본사부터 다녀와야겠다.
#
미리 약속하고 본사로 향했다.
약속이라 함은 서재원 팀장과의 약속이었고. 이것 때문에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걸었다. 굉장히 어색한 통화였지.
곧장 5층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에이, 내려가는 거네.
근데 그 틈에 하필 박 팀장이 껴있었다. 눈이 마주쳐 버렸고, 슬쩍 피할까 했는데 날 빤히 보는 걸 봐선 인사를 피하기 어렵겠지.
“안녕하세요.”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이전 원룸, 앞집에 살던 불도그를 닮았다.
“오랜만이네. 장기로.”
의외로 웃는 낯이다. 불안하게.
“소식은 잘 듣고 있어. 누가 보면 1인 기획사인 줄 알 정도로 발로 뛰어다닌다며.”
“이번에 밴 지원 받아서 그거 타고 다닙니다.”
“···인마 그 얘기가 아니잖아.”
욱한 것 같던 박 팀장이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캐스팅 관련해서 지원 필요하면 얘기하고. 너 곡 잘 만드는 건 알겠는데, 사람 보는 눈은 좀 부족한 거 같더라. 될만한 앨 뽑아야 해. 될 만한 애.”
“그럼요. 될만해서 뽑았는걸요.”
최정아도 그랬고, 그 후로 모두다.
당연한 얘길 한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으쓱거렸다.
그러자 어정쩡한 서 있던 박 팀장이 볼을 오물거리며 주억거리더니 홱, 하고 지나가 버렸다. 두고 볼 일이지 라고 말하며.
그래, 두고 보자고.
소소한 통쾌함이 훑고 지나간다.
불과 몇 달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이다. 상황이, 혹은 내가.
마침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5층으로 향한다.
A&R팀에 들어서자마자 정 대리와 이민주가 반기면서.
“기로 씨, 저번에···.”
역시나 그 얘기부터 했다. 앤 더글라스.
특히 앤 더글라스 내한 공연에 대해 알아봐 준 이민주는 이걸 다 운이라고 할 수 있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나 결국 운으로 결론 날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알지 않고서야 의도한다고 될 법한 일들이 아니었으니까.
될 사람은 역시 뭘 해도 된다며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지고, 짧은(?) 인사도 했겠다, 약속 시간도 됐겠다.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서재원 팀장도 여전하고.
“한울 때문에 왔나?”
한울. 여전히 남의 입에서 들으면 학준이 형이 바로 떠 오르지를 않네.
그의 지레짐작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 데뷔가 미뤄진 것 때문에 오는 줄 알았는데.”
“그건 괜찮습니다. 회사에서 유사한 장르의 가수가 컴백을 한다는데, 굳이 겹쳐 나가 손해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방송도 나가게 됐고 오히려 잘 됐습니다.”
“방송? 아, 맞아. 그거 장 피디가 추천했다고 했지?”
“네.”
“뭐 음치 찾기라는 내용이 신선하긴 하던데. 그게 한울한테 도움이 될 정도일까?”
녹화 후기는 이미 형에게 들었다.
내 말을 기억해서 ‘연기’를 했고, 당연히 어색했을 그 연기는 형을 음치로 생각되게 했지. 적당한 타이밍에, 잘 떨어져 주었다.
“네. 전 그렇게 봤습니다.”
“그래?”
서재원 팀장이 느릿하게 끄덕이다 다시 시선을 나에게 고정했다.
“뭐···그건 그렇고. 그러면?”
본론을 꺼낼 시간인가.
이번 기회에 대형 기획사의 자본력을 좀 느껴보자.
“세션 섭외가 필요해서 왔습니다.”
“세션?”
의외라는 듯 기울어지는 머리.
“네, 정아 작업에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 이번에 최정아도 작업 중이었나?”
“천천히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서재원 팀장은 그러려니 끄덕였다. 최정아도 충분히 그럴 시점이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최정아가 바쁜 게 좀 괜찮아지면 슬쩍 불러 얘기해야겠다. 두 번째 곡, 작업 중이라고. 그러려면 그때까지 데모는 나와 있어야겠네.
생각이 잠시 샛길로 빠지는데, 다시 서재원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 정도면 정 대리에게 요청했어도 됐을 텐데.”
단순한 세션이라면 그랬겠지.
김지희를 이민주나, 정 대리와 연결했을 거다.
근데 이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사이즈가 아니라서요.”
“사이즈가 아니라고?”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네.”
“뭐, 빅 밴드라도 섭외해야 하나?”
나는 슬쩍 웃었다. 은연중에 그보다 더 큰 거라는 걸 비추기 위해.
그리고 당당히 요구하기로 했다.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한 건 TKM이었잖아.
그러니 주세요. 지원.
“오케스트라가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한 악단 통으로.
#
서재원 팀장은 딱 생각한 만큼 놀라 했다.
눈이 살짝 커지고 입이 살짝, 아주 살짝 벌어졌지. 그뿐이었다. 포커를 했으면 아주 잘 했을 양반.
대답은 일단 긍정적이었다. 알아봐 주겠다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아직까지 오케스트라 전체와 작업을 해본 프로듀서는 TKM에 없었으니, 당장의 확답은 어렵겠지.
오케스트라 측 입장이나, 비용적인 문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고.
아더 레이블이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것도 영향이 있으려나?
첫 타자라고 기사까지 뿌려진 내 곡이 미뤄진 통에 비스트로도 이성원도 줄줄이 미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걱정되진 않는다.
한 명은 천재 피디, 다른 한 명은 경험 많은 베테랑 피디. 든든하다.
‘사실 레드리시만 순조로이 미국에 진출한다면 TKM이 내건 프로젝트의 성과는 단번에 채우지.’
흐뭇한 생각에 입꼬릴 올리며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오는 중에 도넛 전문점에 들려 한 박스 업어 왔다. 딱 네온에 불이 들어왔을 때.
2층에 올라가선 이성원이 사용하는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이성원의 얼굴이 보인다. 잘생겼고, 초췌하고.
나는 도넛 박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넛 좀 같이 먹을까 해서요. 많이 사 왔는데.”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던 이성원이 슬며시 문을 열고 나온다. 꼭 동굴 속에 살던 남자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같네.
“비 피디님은요?”
“래퍼들 작업실에요.”
“······.”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학준이 형 때 조언을 받은 이후로도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이 어색함은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이번 기회에 이것도 좀 없애보자.
박스를 열며 내가 말했다.
“이거 사실 뇌물이에요.”
“···?”
하얀 얼굴이 날 보길래 덧붙였다.
“부탁할 게 있어서.”
“저한테요?”
의아한 얼굴이다. 다행히 귀찮은데 왜? 라는 표정이기보단 나한테 뭘 부탁하려고? 라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준비할까 싶은 게, 저한테 좀 생소한 장르라서.”
“일렉트로닉인가요?”
저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이성원이 최근 보여준 행보가 그쪽 성향이 짙으니까. 앞으로 그 정점을 찍을 ‘Daylight’ 앨범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난 아직 그쪽엔 관심이 없다고.
“아뇨.”
“그럼···.”
“클래식이요. 엄밀히는 오케스트레이션.”
검푸른 눈그늘 위로 놀란 빛이 번진다.
“어떻게 알았어요?”
“바이올린 전공인 거요?”
“네.”
“···예민함?”
웃으며 말꼬릴 올리자 이성원이 피식 웃는다.
“그거 편견이에요.”
“그런가요?”
“맞는 편견. 아, 이럼 편견이 아닌가.”
낮게 중얼거리던 이성원은 정말 어떻게 안 거냐고 물었고, 나는 잘 둘러댔다. 예전에 한 광고 음악 필모를 본 적 있다고.
“신기하네요. 숨긴 건 아니지만, 괜히 색안경 낄까 봐 굳이 말하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예전에 딱 한 번 인터뷰에서 말한 걸 볼 줄이야.”
“딱히 뒷조사를 한 건 아녜요.”
그냥 미래의 내가 당신이 만든 회사에 들어가려고 찾아봤을 뿐.
푸스스 웃던 이성원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날 본다.
달달하게 절여진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이성원의 대답이 들려왔다.
“도와드릴게요. 대신, 나중에 저도 한 번 도와줘요.”
내가? 천재 프로듀서 이성원을?
뭐, 그럴 게 있다면 당연히 돕지.
흔쾌히 끄덕였다.
부탁이, 아니 거래가 성사되었다.
#
최정아의 새로운 멜로디를 띄웠다. 독일 가곡을 닮았다는.
단순한 멜로디가 찍힌 8마디.
두어 번 들은 이성원이 끄덕인다. 저건 아까 봤던 표정이다. 윤태영의···.
왜 오케스트라여야 하는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
천재들의 표정이란 게 있는 건가.
“통론이나 화성학은 다 아실 테니까, 우선 가상 악기 틀고 직접적으로 설명할게요.”
이성원이 고저 없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LA 스트링, 세션 스트링···.
오케스트레이션과 관련된 가상 악기들을 모두 불러왔다.
모듈 레이션으로 얼추 느낌만 낼 줄 알았던, 보잉.
글리산도, 포르타멘토, 레가토, 비브라토···.
이성원의 속성 교육이 시작되었다.
나도 꽤 열성적이었다.
서재원 팀장의 연락이 왔을 때, 들고 갈만한 결과물은 있어야 하니까.
*
그리고 일주일 뒤, 서재원 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미팅을 잡았다고.
그냥 작은 예술 악단을 섭외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현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