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0. 변주 - 무료 마지막입니다 >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보내고.
유지은이 말한 소고기. 그것도 한우를 먹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하는 소고기집을 찾아갔다.
4인 이상은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길래 그렇게 했다. 오늘 같은 날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나 싶어서.
유지은이 퍽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히죽거렸다. 주문한 고기가 나왔을 땐, 그 웃음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많이들 먹···”
“잘 먹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명이 동시에 외쳤다.
어우, 내 고막.
귀를 찌르는 불협화음은 여전하고.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생각하자 뭉글뭉글한 기분이 들었다.
“···고생했어요.”
이병국이 ‘소고기, 소고기’ 거리면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나도 한 손 거들었지.
황홀한 표정으로 불판을 내려다보던 유지은에게 첫 번째로 익은 고기를 건넸다.
머지않아 미국 점령에 나설 아더 레이블의 원정군이신데. 드려야지, 드려야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오물거린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A&R 김지희.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며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네, 지희씨.”
-피디님!
깜짝이야. 여기도 목소리가 올라가 있네.
순간 무슨 일이 났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에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버스킹 소식 들었어요!
아, 난 또···.
전화 너머로 격앙된 목소리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버스킹을 하러 갔는데 갑자기 오프닝 무대라뇨!
“어떻게 알았어요? 소식 엄청 빠르시네요.”
-혹시 SNS에 버스킹 올라왔나 싶어 검색했는데 웬걸, 오프닝 무대 사진이 뜨는 거예요. 보고서 제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SNS란 말에 납득했다. 거기 있던 관객들 수를 생각하면 그럴만하다.
전화 끊으면 공연 후기란도 한 번 확인해봐야겠네.
-솔직히 제대로 무대 없이 무작정 버스킹을 한다고 하실 때, 아더 레이블인데 굳이? 했었거든요. 밴드라서 그러시나 보다 했는데, 그게 이렇게 될 줄이야.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네요.”
-근데 왜 바로 말씀 안 하셨어요. 제가 TKM에 요청해서 촬영팀도 보내고 그랬을 텐데···.
“그러면 앤 더글라스한테 방해가 되잖아요. 그리고 애초에 아더 레이블이 주최측하고 짜고 쳤다는 인상도 줄 수 있고요.”
게다가 브랜도 썩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고 말이지.
-아···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요. 그래도 홍보 영상 만들 때 유용했을 텐데···.
아쉬워하는 말투에 덧붙였다.
“안 그래도 핸드폰으로는 다 촬영했어요.”
-그래요? 그럼 그거라도 어떻게 잘 편집하면···.
지난번 학준이 형 앨범자켓 촬영 때도 느꼈지만 참 의욕이 넘친다. 서툰 면이 좀 있지만 가진 능력은 부족해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잘 뽑았단 생각을 하면서, 혹시나 해서 회사냐고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먹으러 올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사무실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좀 멀긴 한데···.
-아뇨? 퇴근했죠.
뒤에 지금 시간이 몇 신데요, 라는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건 또 확실해.
-아, 그런데 저 퇴근하기 직전에 정아씨가 왔었어요.
“정아가요? 오늘 스케줄 있었을 텐데···.”
가을로 접어들며 최정아의 활동도 완전히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한가해지나 했더니, 학교 축제 등의 공연으로 여전히 바쁜 그녀다.
-끝내고 왔다고 그랬어요. 바로 연습실로 들어가던데, 역시나 오늘도 표정이 별로 안 좋더라구요.
역시나? 오늘도?
어색하게 붙은 어두에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온다.
일단 대화를 마무리 짓고 내일 보자는 말을 서로 나누며, 전화를 끊었다.
최정아에게 연락해 봐야 하나. 김지희가 최정아를 본 게 몇 시간 전이니 아직도 회사에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내일 보이는 라디오 생방도 있다고 했었고.
가뜩이나 피곤할 애 괜히 깨우지 말자.
표정이 별로 안 좋았다는 말이 걸렸지만 잠시 밀어뒀다. 그리고 곧장 앤 더글라스 공연을 검색해 후기란을 들어가 봤다.
-첫 내한이라 기대 많이 했는데 역시나 앤 더글라스는 최고였습니다. 내년에도 와줄까요?
-떼창 맛을 본 이상, 다시 안 올 수 없지.
-넌 와서 돈을 받아가! 노래는 우리가 부를테니!
-앤도 앤인데, 오늘 오프닝 무대도 괜찮지 않았음?
-입장하자마자 시작하는 건 좀 신선했음.
-레드리시란 밴드, 노래도 되게 독특하게 잘 부르더라.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도는 중.
-이번 오프닝 무대의 전말) 레드리시가 공연장 앞에서 버스킹 중이었음. 그런데 갑자기 앤 더글라스가 와서 오프닝 무대 부탁함. 그래서 레드리시가 오프닝 무대 서게 된 거.
-뇌피셜 ㄴㄴ;; 말도 안 됨;;
-저거 ㄹㅇ임. 현장구매 한 관객들은 다 봤다던데.
-근데 음원이 하나도 없네? 공연 영상은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직접 레드리시한테 물어봤는데 다음 달에 음원 나온대요! 오늘 부른 자작곡도 거기에 수록된다고 했어요!
“피디님, 무슨 일 있어요?”
날 부르는 어눌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입안에 고기를 얼마나 넣은 거야.
양 볼이 빵빵해진 유지은이 날 보고 있었다.
피식 웃음 지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
“읽어봐요.”
유지은이 핸드폰을 가져가자 옆에 앉은 이병국이 머리를 기울였다.
이병국이 입을 쩍 벌린다. 유지은은 소고기가 도로 나올 참사를 막기 위해 입을 앙다물었고.
“헐.”
“뭐, 뭔데?”
내 옆에 있던 기성운이 궁금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둘은 후기들을 읽는데, 여념 없었다. 결국, 기성운이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반응 진짜 좋네···.”
“그니까. 어, 이 마지막 댓글은 아까 그 학생들인가보다.”
“흐흐, 그러네. 육성지원 돼.”
나는 유지은을 비롯한 레드리시 멤버들을 한 눈에 담았다. 그러다 접시로 시선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
아더 레이블의 성과를 한 번에 채울 만큼 성공할 밴드.
머지않아 미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게 될 레드리시가.
자신들의 공연도 아니었던 후기 글로 행복해하고 있다니.
새삼 신기하면서도, 친근하다.
‘이젠 진짜 친한 동생들 같네.’
비록 한 살 차이지만, 내 영혼의 나이가 액면가보다 10년이나 높은지라 더 어리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오늘의 공연, 관객들의 반응, 그리고 후기까지 주르륵 보고 나니 뭔가 꿈틀댄다. 이제 막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인데 말이지.
이제 일일 매니저를 때려치고, 내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음원 발매.’
원래대로라면 미국 진출 후에나 나왔을 음원이 이번엔 앞당겨졌다.
미래와 달라진 점이다.
하지만 불안하진 않았다. 확신이 있었다.
레드리시는 미래보다, 더 좋아진 곡을 들고 미국으로 갈 테니까.
#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밖으로 나오자 가을 공기가 전신을 훑었다.
레드리시 멤버들을 모두 데려다주고 차를 몰아 사무실로 향했다.
블루투스가 연결된 핸드폰이 재생되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작업했던 이현의 곡. 다음으로 최정아. 그리고 플로라 와 학준이 형···이제 한울이지. 아무튼, 형의 곡까지.
곧 이 리스트에 레드리시의 세곡이 포함될 거다. 내가 프로듀싱만 했을 뿐이지만, 꼭 내가 작곡한 것처럼 애정이 가는 곡들이다.
‘그러고 보니, 최 기사님이 1차 믹싱 끝났다고 하셨었지.’
···듣고 싶은데.
피곤해서 차만 주차하고 곧장 집으로 가려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의욕이 또 졸음을 걷어찼다. 궁금해 죽겠네.
재생 목록에 담긴 네 곡을 두 번씩 반복해서 듣자 딱 알맞게 사무실에 도착했다.
소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차 안에서 내려 잠시 고민했다. 몸은 피곤하고, 손은 두 개뿐.
‘장비는 내일 올리지 뭐.’
툭툭 털어버린 생각만큼 가벼운 두 손으로 계단을 올랐다.
3층에 불이 켜져 있었다.
비스트로겠지.
요새 언더 래퍼들과 음원 작업을 하는 것 같던데···.
“···어?”
막상 들어가니 라운지엔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다. 최정아의 매니저였다.
최정아가 아직도 있다고?
매니저가 내 기척에 일어나 인사를 해왔다.
“어···피디님.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마주 인사하며 슬쩍 보니 안색이 몹시 안 좋다.
저런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아, 한유하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지영환의 표정이 딱 저랬던 것 같네.
아까 김지희가 했던 얘기까지 합쳐져 미뤄뒀던 걱정이 굴러온다.
“정아가 와있나요?”
불 켜 진 녹음실을 보며 물었다.
“네. 정아가 내일 보이는 라디오 때문에 연습한다고 해서요.”
매니저의 표정에서 피곤함이 물씬 묻어난다.
그에게 뭔가를 물어보려다 입을 닫았다.
매니저는 내 걱정을 눈치챈 듯 말했다.
“들어가 보셔도 될 거예요.”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작게 목인사를 나누고 녹음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최정아의 대답을 듣고 신주 색의 문고리를 당겼다.
종이를 손에 쥔 최정아가 날 보더니 반색한다.
“피디님?”
걱정과 달리 최정아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날 보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괜히 걱정했나.
“연습 중이라길래 들어와 봤어. 얼굴도 볼 겸.”
“헤, 내일 라디오 때문에 연습하고 있었어요.”
“어 보이는 라디오 생방이지?”
“네. 들어보실래요?”
“그럴까? 오랜만에 듣네.”
의자에 앉자 최정아가 부리나케 녹음 부스로 향했다.
헤드셋까지 쓰는 걸 확인한 후, MR을 틀어주었다. 최정아가 마이크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입을 달싹였다.
간질거리는 기타 소리와 오늘따라 더욱 처연하게 들리는 첼로 라인.
그 위에 얹어지는 최정아의 담담한 목소리.
오랜만에 눈앞에서 들어서 그런가.
괜히 소름이 돋는다. 김지희와의 통화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걱정 따윈 진즉에 흩어져버렸다.
‘그새 더 잘 부르는 거 같은데?’
투명한 물에 최정아의 색이 물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색이 오늘따라 짙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곡을 이 이상으로 잘 부를 순 없지 않을까?’
앤 더글라스와 레드리시의 무대를 봐서 그런가.
고작 이런 녹음 부스에서 들을 만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나만 듣는다는 게.
노래의 마지막 후렴이 휩쓸고 지났을 때, 비로소 부스 안의 최정아가 보였다.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은 꽤 지쳐 보였다. 당연하겠지. 바쁜 스케줄에도 말도 안 되는 연습량을 소화해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눈만큼은···.
열망이 짙게 깔려있다. 더 잘 부르고 싶다는, 그런.
나는 느릿하게 끄덕였다.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게 미안할 정도로 굉장했던 ‘무대’였다.
녹음 부스를 나오는 최정아가 슬며시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저도 모르게 감정이 좀 실려서···.”
“······.”
“피디님?”
그리고, 머리가 쭈뼛 선다.
뭘까.
작은 입을 타고 넘어오는 목소리 뒤로 고작 4마디 정도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다.
카페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최정아의 멜로디.
달라진 건 없다. 근데 뭐지 이 위화감은?
그 순간이었다.
‘첫 음이 달라졌어···?’
바이올린 활이 피치를 바꾸듯이.
끊어지지 않고 늘어지듯 음이 잡아 끌어지며 바뀐다.
그걸 시작으로 모든 음들이 위로, 혹은 아래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멈춰야 할 음을 찾았는지 하나, 둘 멈춘다.
그렇게 수십 개의 음이 동시에 내 귓가에 바짝 붙어 울리고 있다.
그리고 조율을 마친 오케스트라처럼, 다시 연주를 시작했을 때.
이전과는 달라진···
또 다른 최정아의 멜로디가 내 귓가로 흘러들었다.
< 050. 변주 - 무료 마지막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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