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48화 (48/221)

< 048. 페스티벌의 제왕 (3) >

모든 게 레드리시에 맞춰져 있었다.

평소 버스킹을 가던 시간.

버스킹을 항상 했던 장소.

예정된 미래가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하는 게 중요했고. 그래서 일을 크게 벌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뭔가를 더 해보려는 순간, 미래는 바뀔 수 있으니까.

그랬는데. 그렇게 조심했는데.

그럼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럼 원래의 레드리시는 어디서 버스킹을 했던 거지?

뭔가 달라졌나?

그걸 알아내기엔 시간이 없었다.

앤 더글라스는 턱 밑이고.

머리는 윤활유가 떨어진 모터처럼 삐걱댄다.

서둘러 계획을 바꿔야 했다.

가벼운 장비들만 챙기고, 매표소까지 깊숙이 들어가서 하면 충분히···.

“찌찌뽕.”

급박한 상황에 유지은이 화사하게 웃었다.

덕분에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도 방금 그 생각했는데.”

“···들고 뛰는 거?”

“자주 그랬거든요. 저흰 원래 저런 무거운 장비 없잖아요.”

유지은이 가리킨 손끝엔 회사에서 지원받은 육중한 음향장비가 있었다.

“······.”

“너무 비싸.”

화사하게 웃는 유지은.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얼굴 근육이 땡긴다. 살얼음이 꼈던 얼굴이 깨지고, 웃음이 튀어나온다.

“야, 뛰자. 또 자리 뺏길라.”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옛날은 무슨. 몇 달 전에도 경리단길에서 이런 식으로 돌아다녔잖아.”

왁자지껄 내닫는 레드리시를 보며 생각했다.

달라진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유지은은 한쪽 다리를 쭉 뻗어 벤치에 올렸다. 그리곤 통기타를 허벅지에 받혀 조율을 시작했다. 처음 카페에서 봤을 때의 붉은 원피스가 나부낀다.

그 모습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다.

뭐, 그런 상황이긴 하지.

이병국은 스네어만 세팅했다. 차라리 카혼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럴 줄 알았나.

기성운은 모니터용으로 쓰려고 했던 앰프를 건반과 연결했다.

여기까지가 버스킹 준비의 전부였다.

“어? 저기 버스킹할 건가 봐.”

“잘됐다. 줄 서느라 지루했는데.”

현장구매를 위해 길게 늘어선 행렬.

그 눈들이 전부 우릴 향했다.

기성운과 이병국이 준비를 마무리하며 말을 주고받는다.

“아까 거기보다 여기가 더 나은데? 사람도 훨씬 많고.”

“앤 더글라스가 올라오다 여기도 들르려나?”

“피디님도 지금 그거 기대하고 있죠?”

무슨 소리. 지금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걸 기대하고 있었지.

긍정의 웃음을 흘리며 아래쪽을 훑었다.

그 사이, 준비가 끝난 듯한 레드리시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된 거. 완전히 레드리시의 색깔대로 해봐요.”

그럴 때 가장 빛나는 밴드니까.

마침내, 기성운의 E.P(Electric piano)를 시작으로 앤 더글라스 메들리가 연주되었다.

레드리시의 색이 짙게 묻은 메들리였다.

“오, 잘하는데?”

“대박, 나 방금까지 앤 노래인 줄도 몰랐어.”

“어쿠스틱 버전이라 그런가, 꼭 다른 노래 같다. 그리고 여자 목소리 완전 특이해.”

현장구매를 성공한 사람들이 기분 좋은 얼굴로 하나, 둘 몰려들었다.

혹시나 싶어 나도 핸드폰을 들어 영상에 담았다. 10년 전의 핸드폰이어도 꽤 선명하다. 오히려 이게 현장감도 있고, 기획된 영상 같지 않아 좋네.

앤 더글라스의 곡 4개를 이어붙인 메들리가 이어지는 사이, 핸드폰이 그걸 모두 찍고 있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버스킹을 보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 뒤로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외국인을 보며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다!’

#

“아쉽네.”

광장에서 멀어지며, 앤이 입맛을 다셨다.

“뭐가요?”

“저 밴드가 조금만 더 자신들만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프닝 무대를 부탁할까 했거든.”

“오프닝 무대를요···?”

앤이 끄덕였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거든.”

그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나저나, 여기 정말 좋군. 날씨도 적당하고, 나무들도 많고.”

피톤치드를 마셔야 한다며 코를 벌름거리던 앤이 우뚝 멈춰섰다. 뒤따르던 직원도 따라 멈췄다.

“왜요?”

“저기도 버스킹을 하는 걸?”

앤의 시선이 멈춘 곳을 확인한 직원이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리고 아차 싶어 서둘러 덧붙인다.

“매표소 쪽이에요. 저긴 사람이 너무 많으니 돌아서 가죠.”

그러거나 말거나, 앤은 턱밑을 매만지며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어쿠스틱?”

흥미롭게 지켜보던 앤의 표정이 급변한 건, 리드미컬한 연주 사이로 익숙한 기타 리프가 연주되었을 때였다.

“내 곡이잖아?”

“네?”

어리둥절해 하던 직원이 가사를 듣고서야 앤의 노래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 정말이네.”

순간 놀란 직원이 앤을 돌아봤다. 광장에서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신기한데···.”

앤의 파란 눈동자가 호기심에 번뜩였다.

“내 곡을 완벽하게 밴드의 색깔로 바꾼 건가?”

“앤, 저긴 사람이 너무 많···.”

직원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앤은 이미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

술렁임이 환호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그 중심엔 앤 더글라스가 있었다.

그는 팬들에게 가볍게 인사하더니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람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앤 더글라스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레드리시의 공연에 집중했다.

반면, 뜨악한 표정의 레드리시 멤버들은 이내 침착하게 노래를 이어갔다.

앤 더글라스의 곡을, 앤 더글라스 앞에서. 자신들의 색으로.

이윽고 메들리가 끝났다. 환호와 셔터소리 속에서 앤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구경거리에 기꺼이 자리를 비켰다.

갈라진 틈으로 앤과 레드리시가 마주했다.

나는 그제야 뻑뻑했던 숨을 조금씩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공연이 완전히 끝날 때까진 못 기다릴 것 같아서 끼어들었어요. 내 매니저가 좀 노파심이 많거든요.”

땀을 삐질 거리며 앤을 뒤따라온 남자가 한숨을 쉬더니 마지 못 해 통역을 한다.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요.”

나는 그가 할 부탁을 지레짐작하면서도, 심장이 요동치는 걸 참기 힘들었다.

끄덕이는 유지은에게 앤 더글라스가 묻는다.

“내 공연 오프닝 무대에 서줄 수 있나요?”

#

앤은 공연의 오프닝 무대를 레드리시가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해왔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을 애써 숨기며 적당한 톤으로 받아들였다.

표정관리, 표정관리···.

마침내 공연장으로 향하면서, 버스킹을 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듯했다.

“오프닝 무대···?”

공연장 내부 상황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피던 외국인이 말꼬리를 올린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눈썹. 나는 단번에 그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브랜이겠지.

“응. 입장 시간이 꽤 기니까, 괜찮지 않겠어?”

앤이 히죽 웃었다. 반대로 브랜의 짙은 눈썹이 구깃구깃해졌다.

슬쩍 나와 내 뒤에 있는 레드리시를 훑는데 상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어떻게 앤을 구워삶았지? 이런 표정이랄까.

“실력만 검증된다면 우리야 상관없지만···.”

“실력은 내가 검증했어. 최근 들어 내가 본 밴드 중에 최고였으니까.”

“그 정도···아니, 내 말은, 주최 측도 설득을 해야 한다는 거야.”

“어디로 가면 돼? 내가 얘기해보지.”

그게 대수냐는 듯 태평하게 답하는 앤을 보며 브랜의 표정은 더욱 복잡스러워졌다.

그걸 좀 덜어줄 수 있을까 싶어 내가 물었다.

“주최 측이 프리츠모인가요?”

프리츠모는 이런 큰 공연을 주로 맡는 기획사다. 그리고 TKM과는 꽤 인연이 깊다. 얼마 전 최정아의 공연도 여기서 기획했었지.

내 어리숙한 영어를 감사하게도 알아들어 준 브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요?”

나는 짐짓 능청맞게 대답했다.

“그럼 제가 설득에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

사실 앤이 나섰어도 해결되었을 일이다.

물론 그랬다면, 관객들이 입장할 때 앤 더글라스의 노래 3곡 정도를 부르고 퇴장할 운명이었겠지.

명함은 이럴 때 쓰는 거라고 배웠다.

프리츠모 측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붕 뜨는 시간이기도 했고, TKM의 아더 레이블이 준비 중인 밴드를 데뷔도 전에 무대 위에 올리는 일이니까.

프리츠모 측 팀장은 오히려 미리 알았다면 홍보도 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어쨌든, 그 덕에 자작곡을 추가로 부를 시간까지 얻어낼 수 있었지.

‘이 정도면 일일 매니저 역할은 톡톡히 해낸 건가?’

그제야 머릿속의 번민을 내려놓고, 무대 옆에 기대 레드리시의 리허설을 지켜본다.

‘잘하고 있네. 실제 공연에선 더 잘하겠지만.’

슬쩍 고개를 돌리니 브랜이 시선 끝에 걸렸다.

그도 레드리시의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서, 매의 눈으로. 요만큼의 흠이라도 보인다면 내려오라고 할 기세였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오히려 리허설이 진행될수록 레드리시를 보는 브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나는 학예회를 지켜보는 아빠가 된 기분으로 짧은 리허설을 감상했다.

무대 뒤쪽으로 돌아오는 레드리시를 웃는 낯으로 반겼다.

“수고했어요.”

이병국과 기성운은 바짝 얼어있다. 관객 수를 들은 이후로 내내 저런 표정들이다.

그래서 살짝 걱정했지만, 막상 리허설은 실수없이 해내는 걸 보니 걱정도 사라졌다.

리허설보다 본 공연에 몇 배의 출력을 보여주는 게 레드리시니까.

물론 이 와중에도 유지은은 해맑다.

“어땠어요?”

“최고였어요.”

“피, 어쩜 그렇게 맨날 반응이 똑같으실까.”

“똑같이 최고니까요.”

유지은이 히히 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태프들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시간을 보니 입장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오프닝 공연 팀, 무대로 올라갈게요.”

스태프의 지시에 레드리시가 종종걸음으로 움직인다.

문이 열리기 전에 무대 위에 딱 서 있어야 했다. 무슨 토이스토리 인형들처럼.

이 깜짝 등장을 계획한 앤 더글라스는 대기실에서 지켜보고 있겠지.

피식 웃으며 레드리시의 움직임을 촬영했다.

이게 모두 합쳐지면 기가 막힌 다큐멘터리 한 편이 나올 것 같았다.

잠시 후 무대에 불들이 모두 들어오고.

누군가가 입장을 시작한다고 외치며.

관객 석에 은은한 조명들이 차례대로 켜졌다.

스태프들은 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댐 열리듯 우르르 입장하는 사람들.

나는 얼른 무대와 관객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상황을 관조했다.

그리고 그때, 하이엣이 박자를 잘게 쪼개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관객들 앞으로 스포트라이트들이 떨어져 내린다.

선명한 빛 위에 레드리시가 서 있었다.

“깜짝이야.”

“뭐, 뭐야. 설마 앤 더글라스야?”

“아니, 여잔데?”

웅성거림이 커지기도 전에 유지은이 피크를 휘갈겼다.

디스토션 걸린 거친 사운드가 당황한 관객들을 휩쓸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20분 남짓.

하지만 그거면 충분할 것 같다.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서 있는.

하지만 표정만큼은 이전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있는, 브랜.

‘저 사람을 설득하기에도 충분하겠지.’

벌써부터 어느 정도 설득한 것처럼 보였다.

레드리시의 미국 진출에 교두보가 되어줄, 턴투더레이블의 CEO를 말이다.

< 048. 페스티벌의 제왕 (3)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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