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47화 (47/221)

< 047. 페스티벌의 제왕 (2) >

“그래서 대기 중이야?”

내 물음에 늘어지는 학준이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어, 매우 지루하다.

“언젠 연예인 구경한다고 신나 하더니?”

-그것도 한, 두 시간이지. 대기실도 여러 명이라 숨 막히고···지금 아예 밖으로 나와서 전화하는 거다. 뭐, 아직 데뷔도 못 했으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곧이잖아. 우선 이번 녹화 잘해. 분명히 형한테 도움 될 방송이니까. 아, 그리고 이왕이면 꼭 지목당하고.”

-지목? 음치로? 그러면 일찍 탈락하는 거라던데···?

현관문을 나서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게 더 화제성 있을 거야.”

이제 2회 녹화 중인, 기성 가수들이 나와 음치를 찾는 프로그램.

여기서 임팩트 있게 떨어진다면 분명히 곧 나갈 앨범에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래야 데뷔를 미룬 보람도 있을 테고.

나만이 알고 있는 팁을 전수하고, 수고하란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또 오네.”

토독토독 빗줄기가 굵어진다.

여름에도 보기 힘들던 빗방울이 가을에 몰아서 쏟아졌다.

한 3일 됐지. 비가 오기 시작한 것도, 내가 청담동으로 이사를 온 것도.

버스 막차 시간을 체크할 필요도, 택시를 탈 이유도 없어졌다. 휴게실에 들어가 몸을 구겨 넣을 필요도 없지. 이제는 충분히 걸어다닐 거리가 되었으니까.

‘얼른 가자.’

청담동 뒤쪽 작은 빌라를 나서며 푸르게 어두운 거리를 맞이한다.

우산을 펼쳤다.

뿌옇게 물든 거리. 낙엽이 찰박하게 밟힌다. 그렇게 10여 분을 걸어 사무실에 도착했다.

회사에서 지원해준 밴을 지나, 곧장 3층으로 향한다.

라운지에서 가장 가까운 녹음실로 들어가자 숱이 없어 슬픈 엔지니어, 최 기사가 한창 믹싱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곤 주름지게 웃는다.

“좀 더 쉬지 않고?”

“충분히 잤어요.”

“이틀 밤새고 고작 3시간 잔 게?”

“그래도 집에서 자서 그런지, 개운하네요.”

푸흐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어때요?”

레드리시의 자작곡 트랙들과 VST들이 세 개나 되는 모니터에 가득했다.

“한 번 들어봐.”

히죽 웃으며 트랙을 재생하는 최 기사.

이병국의 자작곡. 다른 두 곡에 비하면 확실히 락킹한 느낌이 짙은 곡이다.

키보드가 16분음표로 사운드을 가득 채우면 유지은의 목소리가 그걸 뚫고 나온다.

체형을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 성량과 특유의 비음 섞인 발성이 녹음실을 훑었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걸 경험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됐다.”

“그래? 이 느낌이 확실해?”

빠르게 끄덕였다.

“역시, 최 기사님.”

“흐흐, 무슨. 장 피디의 아이디어가 만든 사운드지 이건. 어떻게 공간계를 이런 식으로 만질 생각을 했어?”

돌아오기 전, 콘서트 앨범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이번에 톡톡히 해냈지.

멋쩍게 웃으며(-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최 기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장 피디가 원하는 느낌 확실히 알겠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이제 가봐. 오늘 일정 있다며?”

“그럼 기사님만 믿고 가볼게요.”

곧장 녹음실을 나섰다.

잠시 2층에 들러 여직원에게 업데이트된 정보들을 들은 후,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비는 그쳤다.

걱정도 안 했다. 오늘이 레드리시가 버스킹을 했던 날인데, 설마 비가 계속 내렸을까.

건물 앞 주차공간에 세워진 검은색 밴으로 다가가 마지막으로 장비들을 점검했다.

액티브 스피커. 아날로그 믹서. 드럼.

꼼꼼히 확인한 후, 핸드폰을 들었다. 이윽고 분주한 이병국의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시동을 걸며 물었다.

“지금 출발하려고 하는데, 준비 다 됐어요?”

#

“샘기엽.”

“삼겹.”

“샘겨업.”

“삽겸살.”

“······뭐가 됐든.”

브랜이 미간을 팍 구겼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영국 억양이 한국어에 도움이 되나?”

한국 과자를 집어 먹던 앤이 단호하게 답한다.

“그럴 리가.”

“근데 왜 넌 잘만 발음하는걸, 나는 못 하는 거지?”

“글쎄. 그건 네가 여길 못마땅해해서 아닐까?”

“놉.”

브랜은 손을 휘저으며 다리를 꼬았다.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린다. 작은 투덜거림이 흘러나온다.

“뭐가 이렇게 쪼만쪼만해? 하늘도 너무 좁잖아.”

앤은 그런 브랜을 보며 낄낄 웃었다.

곱지 않은 눈으로 밖을 훑어보던 브랜이 다시 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제 거기 간 건 어땠어?”

“어디?”

“길거리 음악의 도신가 뭔가.”

“아, 홍대?”

“호옹···쉣. 어쨌든.”

“흐음.”

앤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생각보단 별로였어. 춤추는 친구들만 많더라고. 정작 노래하는 친구들은 구석에 있고···그냥 그랬어.”

조금 실망한 얼굴.

브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뭘 기대한 거야. 이 작은 나라에서.”

그때 조수석에 타 있던 직원이 입을 열었다.

“저기에요. 공연장.”

차량이 올림픽공원을 끼고돌았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옆으로 보이는 광장.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커다란 원형 지붕.

앤이 파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기대에 찬 눈으로 밖을 보던 앤의 시야에 다른 것이 걸렸다.

둥그렇게 몰린 사람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분명히 악기들이었다.

“저기서 노래하나 본데?”

그 말에 브랜도 고갤 돌렸지만, 이내 관심 없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메일이나 확인할 생각으로.

그때 앤이 불쑥 말했다.

“내려서 구경하다 갈게.”

#

밴은 예정된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장 중요한 앤을 내려두고서.

브랜은 주최 측과 못다 한 이야기가 있어 공연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사실 보고픈 마음도 없었고.

후드에 마스크까지 쓴 앤이 웃으며 걸음을 옮긴다. 12인치나 되는 발을 가볍게 구르며, 야외에서 이뤄지는 작은 공연 앞으로 다가갔다.

함께 밴에서 내린 직원에게 슬쩍 묻는다.

“내가 여기서 마스크 벗으면 난리 나겠지?”

“그거 말리라고 제가 함께 내렸는걸요.”

“낭만이 없구만. 누가 브랜의 직원 아니랄까 봐.”

직원은 피식 웃으며 뒤를 따랐다.

버스킹이 한창인 광장 다 달아 앤 더글라스가 반색했다.

밴드가 연주하는 전주가 자신의 노래였기에.

“오, ‘As it flows’?”

재지한 스윙 리듬을 기반으로 한 그의 곡이 광장 한복판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관객들도 이에 맞춰 들썩였다. 오늘 공연을 보러 온 사람, 그저 산책이나 할까 하고 나온 사람 상관없이.

앤이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먼 나라에서 내 노래를 하는 뮤지션이 있다니.”

“앤 더글라스니까요.”

“너도 네 상사 닮아가냐.”

“사실인걸요.”

너털웃음을 흘리던 앤이 버스킹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이거 내가 lala라는 바에서 작곡한 곡이야. 가봤어?”

“lala···거기 스트립···.”

“말고. 재즈바.”

“그럼 아직 못 가봤네요.”

직원의 대답에 피식 웃어 보인 앤.

큰 키 덕에 밴드 멤버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어지는 중얼거림.

“연주 잘하네.”

“그런 것 같네요.”

“정직하게.”

“···?”

“보컬은 어떤지 볼까?”

앤이 묘한 눈으로 기다렸다. 전주가 끝나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가성에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옆에 있던 직원은 낮게 감탄했다. 앤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그러다 슬쩍 앤을 봤다. 앤은 주억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묘한 눈빛으로.

“보컬도 괜찮네.”

“그런 것 같아요. 꽤···.”

“흉내를 잘 내네.”

온화하게 웃고는 있지만, 밴에서 내릴 때의 기대감은 짜게 식어 있었다.

“그냥 날 따라 할뿐.”

파란 눈이 열창하는 밴드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까움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더 잘 할 수 있는 밴드인데. 아쉽네.”

그러면서 직원을 보았다.

“한국어 좀 할 줄 안다고 했지?”

“조금은요.”

“통역 좀 부탁할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어서.”

#

나는 아차 싶었다.

광장에 몰린 사람들을 보면서.

“저기 지금···버스킹하는 거?”

유지은이 눈을 네모나게 뜨고 말했다. 핸드폰을 하던 이병국과 자는 듯했던 기성운도 벌떡 일어나 차 창밖을 확인했다.

“···진짜네, 그것도 완전 풀세션으로.”

“저 광장이 딱이었는데. 아니, 애초에 저기 아니면 할 데 없지 않나?”

누군가의 공연이 있을 때, 항상 레드리시가 해왔던 자리.

거기엔 이미 다른 팀이 자리를 잡고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어, 눈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공원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이 차를 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자리를 맡아두려고 했는데, 저 밴드가 그럼 옆에서 하겠다고···.”

애초에 사유지도 아닌 공원.

사실 자리를 맡는 것 자체에 어떤 효력도 없을 뿐더러, 바로 옆에서 하겠다고 하면 대책도 없었다.

“아더 레이블이라고 말하면 혹시라도 더 문제가 생길까 봐···.”

“잘하셨어요.”

그때, 옆에서 고민하던 유지은이 물어온다.

“피디님, 안으로 차 못 들어가나요? 아예 안쪽으로 들어가면 공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애초에 가장 가까운 주차장은 관계자들만 들어갈 수 있고. 관객용 주차장으로 가면···거리가 너무 멀어요.”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카트로 이동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거리.

‘그래서 이 광장밖에 없는 거였는데.’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팀이 있을 줄은.

내가 아는 건, 레드리시가 앤 더글라스 내한공연장 앞에서 버스킹을 했다는 정도.

레드리시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버스킹을 한 건지. 그런 것들은 애초에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레드리시가 평소 하던 대로 하려 했다. 그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안일했다.

“어쩌죠?”

방법이 없지. 일단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버스킹을 하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언제까지 할까?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까진 분명히 할 텐데. 아니지, 어떤 일이 있어서 중단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저기도 앤 더글라스 곡을 하고 있나 본데.”

기성운이 차분히 말했다. 그러자 이병국이 끄덕인다.

“그러네. As it flows인 것 같은데? 리듬이.”

“꽤 잘하는······.”

그때였다. 버스킹이 진행되는 곳에서 갑자기 환호가 터져 나왔다.

“뭐지?”

“노래가 멈췄는데? 무슨 일 있나?”

“···어 잠깐만, 저 키 큰 사람···.”

유지은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창밖을 가리켰다.

키 큰 외국인이 버스킹을 구경하던 사람들 틈으로 들어간다. 마스크를 벗고 활짝 웃으며. 그러더니 밴드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머릿속이 방지턱을 넘은 것처럼 덜컹거렸다.

“앤 더글라스···.”

기성운의 목소리가 설마 하던 내 마음을 멀리 후려쳤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지?

원래의 레드리시는 이것보다 더 빨리 왔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설마 레드리시가 아닌, 저 밴드에게 오프닝 무대를 부탁하게 되는 건···?

젠장. 안 되지.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레드리시 멤버들이 앤 더글라스를 보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반갑고, 신기하고, 근데 이 상황은 미치겠고. 딱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 너머에 쌓인 장비들을 봤다.

하나 같이 크고, 무거운···.

다시 광장 쪽을 본다.

앤 더글라스가 보인다.

그가 공연할 올림픽홀과 함께.

아예 저 매표소 앞까지 들어가서 공연을 하는 건······.

불가능하지.

못 옮겨.

그럼 어떻게 해야. 무슨 수를 써야 앤 더글라스가 레드리시의 공연을 보는 미래가 올까.

그 사이, 앤 더글라스는 자리를 선점한 밴드와 악수를 하고 웃는 낯으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미래가 어그러지는 듯하다.

곧장 시동을 끄고 뒤를 돌아봤다.

“···?”

그리고 의문 서린 표정의 세 사람에게 말했다.

“매표소 앞에서 하죠.”

“그게 가능한···아니, 그보다 이 장비들을 어떻게 거기까지 가져가요?”

“안 가져가요.”

“네?”

뭐가 달라졌는지 모른다.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움직여야 한다.

내 방식대로.

“들고 뛸 수 있는 것만 챙겨요.”

“어쿠스틱으로 하면 되니까.”

< 047. 페스티벌의 제왕 (2)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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