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46화 (46/221)

< 046. 페스티벌의 제왕 (1) >

조명이 떨어져 내린다.

클린 톤의 기타 리프가 유지은의 손 끝에서 연주된다.

일정한 음과 크기가 계속 울릴 뿐인데, 반복을 거듭할수록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

이와 대조되게 직접적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드럼과, 낮게 깔린 저음을 연주하는 기성운의 신디사이저.

그렇게 완성된 배경에 유지은의 목소리가 똑 떨어진다.

원곡이 가진 멜로디가 유지은의 목을 거쳐 새롭게 불러진다.

앤 더글라스의 Dreamer.

그를 페스티벌의 제왕으로 만들어준, 대표곡.

그만큼 강렬한 곡이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하지만 어느새 원곡의 색은 옅어지고, 새로운 색이 그 위에 덮였다.

레드리시의 Dreamer였다.

이 작은 공연장에서 앤 더글라스는 본인이 절대 모를 굴욕을 당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날 소름 돋게 했다.

기타 이펙터의 잔상이 관객들을 훑으며 첫 곡이 끝나고.

작은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환호에 귀가 먹먹하다.

거친 숨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온다.

-아, 공연이 오랜만이라···너무 흥분했어요.

씩 웃는 유지은의 모습에 다시 한번 환호가 쏟아진다.

매력적이다 못해 매혹적인 웃음.

-첫 곡 마음에 드셨나요?

당연히 네! 라는 대답이 터져 나왔고, 유지은은 싱긋 웃는다.

천천히 관객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맨 뒤에 앉아있는 나에게서 잠시 멈췄다.

그 시선을 느끼고 빙긋이 웃어 주었다.

화사하게 웃어 보인 유지은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멘트를 이어갔다.

-자. 이제 다음 곡을 해볼 건데.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는 곡 순서를 정해두지 않아요. 올라와서 그때, 그때 반응을 보면서 결정하는 편이죠, 이번에는······.

“자작곡!”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또 다른 곳에서도 같은 요청이 들렸다.

저들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외쳤겠지.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던 유지은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동안, 저희 자작곡이 꽤 많이 바뀌었어요. 편곡을 했죠. 좀 짧게.”

느긋하게 말하는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유없이 보는 게 아니란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랄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으니.

-궁금하나요?

무대 위의 유지은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에도 능수능란했다.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기대하게끔 한다.

그리고 그 기대가 최고치에 달했을 때.

-그럼, 저희 자작곡 Free will. 불러볼게요.

탄산을 머금은 사운드를 퍼붓는다.

이에 한껏 들뜬 관객들이 발을 구른다.

훗날 1집 앨범의 타이틀이 될, 유지은의 곡.

그 멜로디가 공연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내게 보내줬던 편곡 버전과 비슷한 듯, 다르게.

레드리시는 지금 무대 위에서 새로운 편곡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무대에 맞게.

나는 얼른 테이블 위를 봤다.

생선 뼈 모양의 파형들이 쭉쭉 흘러가고 있다.

‘녹음은 제대로 되고 있고.’

그것만으론 부족할 것 같아,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명확히 들어야겠다.

어떻게 하면 저 날것에 가까운 느낌을 앨범에 녹여낼 수 있을지. 그걸 찾기 위해서.

#

폭풍 같았던 공연이 끝났다.

콜라로 헛배를 채웠지만, 머릿속은 든든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가득 차 출렁인다.

“오늘 공연 멋있었어요.”

가는 호를 그리는 유지은의 눈.

“정말요?”

“네, 최고였어요.”

“진짜죠?”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후···다행이다. 뭔가 오늘 살짝 긴장된다 싶었는데 이유를 알겠네요.”

“?”

“아, 피디님도 당연히 회식 갈 거죠?”

미안하게도, 그러지 못한다.

“아뇨. 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고개를 젓지는 않았다. 물을 머리에 얹고 있는 기분이라.

이걸 얼른 가져가서 오선지에 쏟아부어야 해.

“왜요?”

“다른 작업 마무리할 게 있어서요.”

삐죽거리는 유지은에게 카드를 줬다. 단번에 히죽거리네. 쩝.

세 사람에게 칭찬 한가득 안겨주고, 걸음을 돌려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선 곧장 매트리스에 걸터 앉았다.

샤워하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렸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게 먼저다.

한쪽 다리가 덜렁거리는 탁자를 끌어다 놓고, 방바닥을 뒹굴던 오선지들을 모은다.

그리고 핸드폰.

녹음 된 파일을 눌러 레드리시의 라이브를 듣고.

듣고.

계속 듣고···.

“흐음.”

입술을 지그시 물기도 하고, 펜을 휙휙 돌려가며 듣다가.

오선지에 검은 잉크를 콕콕 찍으며.

레드리시의 라이브가 좋은 건, 단순히 공연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즉흥적으로 편곡된 라이브 버전이 가진 힘을 확신하며, 펜을 움직였다.

예정된 미래의 완성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

단순화된 콩나물들을 툭툭 그려내고, 해당 부분에 필요한 느낌들을 메모했다.

그게 연주 스킬인 경우도 있었고, 이펙터의 톤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후반 작업에서 할 믹싱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었다.

음원이지만 라이브의 느낌을. 그러면서 과하지는 않도록.

가로지르는 다섯 개의 선. 오선지가 점점 빽빽해진다.

또 길을 만든다.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그래서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레드리시의 길.

#

미국, LA의 한 스튜디오.

잿빛의 삭막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브랜이 전화를 끊었다. 반대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누르고, 머리를 긁적였다.

“한국···?”

떨떠름한 표정이 유리에 언뜻 비친다.

“재미없을 거 같은데.”

몸을 돌려 카펫 위를 걸었다.

긴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문.

밀고 들어가자 LA에서 가장 큰 녹음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천장과 벽에 닿아 사방으로 울리는 기타 소리.

최첨단 장비들 앞에 쭈그린 널따란 등판에 대고 브랜이 입을 열었다.

“앤.”

안쪽에서 기타를 튕기던, 주황빛 도는 수염의 백인 남자.

그가 손가락을 멈추고 고갤 돌린다. 쾌활하게 웃는 얼굴로. 그게 꼭 보물찾기에 성공한 어린아이의 웃음 같다고 브랜은 생각했다.

“브랜, 방금 들었어?”

브랜이 으쓱거리며 물었다.

“새로운 리프야?”

“어.”

빠르게 다시 한번 연주한다.

“뭔가 굉장한 게 나올 것 같지 않아?”

“글쎄? 평범한 것 같은데?”

브랜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답하자, 앤이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매니저가 돼서 그렇게 듣는 귀가 없어서야.”

“사실 그래서 듣는 귀가 필요 없는 거야. 무려 앤 더글라스의 매니저니까.”

브랜이 위스키를 따르며 낄낄댔다. 한 잔은 앤에게 건네며, 좀전의 통화로 정해진 내용을 전달했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은 한국이야. 확정됐어.”

“오? 희소식이군.”

반색하는 앤과는 달리 브랜은 위스키로 혀를 축이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일본하고 별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론도 너랑 똑같은 생각이었다고 했어. 아시아는 지루하다면서, 근데 돌아와선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앤이 수염이 치켜 올라가도록 입꼬릴 올렸다.

“역대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그 말에 브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일본하고 그렇게 다르다고?”

“그래, 론이 ‘그 얌전한 나라’랑은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니까. 브라질보다 더 정열적인 나라라고까지 할 정도면 분명 괜찮을 거야.”

“흐음. 론 스미스의 말이면 난 그닥 신뢰가 가진 않는데.”

“과장은 잘 하지만 허풍은 안 떠는 친구야. 그 후로 트위터에 한국 칭찬 엄청 하더라고.”

“나도 봤어. 무슨 여자애들 단체로 춤추는, 댄스팀? 같은 것도 태그했던데.”

“플로라.”

“플로···뭐?”

“론이 그렇게 부르더라고. 한국의 아이돌이라던데.”

복잡한 얘기에 브랜이 대충 주억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뭐, 가보면 알겠지.”

기타 줄로 가져가려던 손을 멈추고, 다시 브랜을 돌아보는 앤. 뭔가 생각난 표정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국엔 길거리 음악에 특화된 도시도 있다는 것 같았는데.”

브랜의 구리빛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도시가 있어?”

“론이 그러더군. 시간 내서 거기도 한번 가보고 싶어.”

무명 시절에 음악을 놓지 않기 위해 꾸준히 길거리 음악을 했던 앤. 브랜도 그걸 알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어. 알아보지.”

고맙다고 말한 앤이 다시 자세를 잡고 리프를 반복한다.

브랜은 조용히 녹음실을 나섰다.

육중한 문을 닫고서 카펫 깔린 복도를 걸었다.

그는 7, 8년 전쯤에 갔었던 아시아 투어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참 별로였지.

그래서 이번에도 내키지 않았다. 앤 더글라스의 투어가 아니었다면 굳이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직원들만 보냈을 거다.

그런데 심지어 일정이 늘어버렸다.

한국.

딱히 중국이나 일본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곳.

브랜은 그냥 시칠리아나 가서 휴양을 즐기고 싶었다.

“유럽 투어를 추진할 걸 그랬나?”

#

그 시각, 아더 레이블 사무실.

“······.”

윤태영이 악보 뭉치를 훑는다.

나는 그런 윤태영의 얼굴을 훑었다.

저것만 보고 어떤 느낌인지 알려나?

휘갈겨 쓴 글씨체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다행히, 찬찬히 악보를 넘겨보던 윤태영의 표정이 꽤 익숙하게 변해간다.

요즘 자주 보이는 표정.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수사자가 떠올랐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어슬렁거리다 먹잇감을 보곤 눈빛이 돌변하는. 대충 그런 느낌.

머릿속에 야생 다큐멘터리를 그리는 동안, 악보를 전부 훑어본 윤태영이 날 보며 입꼬릴 올렸다.

“이걸 하루 만에 정리했다고요?”

“보다시피, 그렇죠.”

내 퀭한 눈을 봐라. 무엇보다 명확한 증거이니.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뭐, 실제로 녹음해봐야 알겠지만···.”

탁. 윤태영이 악보 뭉치를 내려놨다. 그러더니 베이스를 들고 오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봐선, 굉장한 게 나올 것 같아요. 기대되는데요?”

이번엔 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저도 기대되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어떤 완성본이 나올지.

윤태영이 악보 앞에 자리를 잡았다.

6현 베이스. 넓은 넥에 걸린 여섯 개의 현을 퉁퉁 튕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 악보에 대한 윤태영의 해석.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할 건 감탄뿐이었다.

척하면 척. 어젯밤의 아이디어 한 줄이 눈앞에서 실체화되어 튀어나오니 놀랄 수밖에. 근데 심지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다.

새삼 윤태영이란 천재가 옆에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완전히 몰입한 윤태영을 남겨두고, 슬쩍 3층 라운지로 나왔다.

웬만하면 끝까지 지켜보려 했는데, 옆에서 쩍쩍 하품하고 있자니 방해가 될 것만 같아서.

그래, 실신 직전이다. 바닥의 헤링본이 울렁거려.

잠깐이라도 자야겠다, 생각하며 휴게실로 향하는데 불쑥 핸드폰이 울렸다.

A&R팀 이민주의 메시지.

정 대리 닮은 곰돌이가 비명을 지르는 이모티콘과 함께 웬 링크가 딸려왔다.

반쯤 풀린 눈으로 눌렀다.

그리고 순간 잠이 확 깨버렸다.

화면에 떠오른 건 기사였다.

주황색 수염이 인상적인, 백인 남자의 사진이 걸려있는···.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온다.

레드리시를 미국으로 데려가 줄, 제왕이.

<페스티벌의 제왕, 앤 더글라스. 10월 19일 첫 내한 확정···!>

2달도 남지 않았다.

< 046. 페스티벌의 제왕 (1)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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