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5. 미래를 따라서 (3) >
최정아의 물음에 내가 입을 떼려는 찰나,
목소리를 낸 건 유지은이었다.
“대박.”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서 최정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 팬이에요!”
특유의 비음 섞인 고음이 울렸다.
최정아는 당황한 듯 나를 보며 뒷걸음질 쳤고.
저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냥 독특한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되지.
“누, 누구세요?”
“유지은이요!”
그렇게 말하면 아나.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이번에 레이블로 영입한 밴드의 보컬이셔.”
“아.”
스케줄이 바쁜 최정아가 레드리시를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알기 쉽게 설명한 건데···.
“레드리시···맞죠?”
알고 있잖아?
“헛, 절 아세요?”
유지은이 놀라며 묻자 최정아가 끄덕거렸다. 덩달아 놀란 나를 보며 최정아가 설명한다.
“매니저 오빠한테 레이블 소식 계속 들었거든요.”
그래서였구나.
의문이 풀려 끄덕거리는데, 유지은이 이럴 게 아니라며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가사나 아이디어 같은 게 적혀있는 앞부분을 휙휙 넘겨 깨끗한 부분을 펼치더니 다시 가방을 뒤져···.
‘립스틱?’
설마 저걸로?
“펜 가져다줄까요?”
“아뇨! 제 걸로 써주셨음, 좋겠는걸요.”
“······.”
대체 왜? 라는 의문은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지. 그냥 받아들이는 게 편할 듯해.
이 와중에 최정아는 익숙한 듯 싸인을 해준다. 연예인 다 됐어.
“히.”
유지은이 씩 웃어 보이며 노트를 신줏단지 모시듯 가방에 고이 넣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최정아에게 물었다.
“잠깐 들린 거야?”
“네. 또 스케줄이 있어서···.”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은 돼?”
끄덕이길래 커피를 내리러 일어났다.
마침 나도 카페인이 당기는 시점이라.
잠깐이란 시간을 허투루 쓸 생각이 없는 듯, 아예 최정아를 옆에 앉히는 유지은.
그리고 칭찬만 한다. 최정아를 향해서. 칭찬으로 사람을 구타할 수 있는지 실험하듯이.
‘기억애’에 대한 얘기부터, 심혜경과의 듀엣. 다른 방송에서 나왔던 모습들, 등등.
커피를 내려왔을 땐, 최정아의 얼굴도 유지은처럼 벌게져 있었다. 계속 민망한 웃음을 흘리면서.
구해줘야 하나?
그래도 주제가 음악 얘기로 좁혀지면서, 최정아의 표정도 점점 편해졌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눈앞의 요상한 투샷을 가만히 지켜봤다.
한 명은 신예로 확 떠오른 여자 가수.
다른 한 명은 한국보단 미국에서 더 유명해질 밴드의 보컬.
여기에 학준이 형까지 생각하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나도 참···.’
입이 떡 벌어질 외모의 여자 둘을 보며 든든하단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헛헛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악 얘기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거니까. 첫 번째는 음악을 하는 거고.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최정아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자리를 일어났다.
아쉽다며 징징거리던 유지은에게 ‘너도 이만 가지?’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으나, 그런다고 갈 유지은이 아니지.
“아참, 피디님. 저희가 옛날부터 꾸준히 공연했던 작은 공연장이 있는데요.”
“네.”
“거기 사장님이 이번 주 공연자가 부족하다면서, 혹시 공연해줄 수 있냐고 그러시는데···저희가 가서 도와드려도 될까요?”
딱히 계약서상에 문제 될 건 없었다. 밴드가 공연하겠다는데, 그걸 막을 생각도 없고.
끄덕이자 유지은이 신나 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레드리시의 공연?’
나는 유지은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디서 하는데요?”
#
유지은까지 돌아가자 완벽하게 조용해진 사무실.
슬슬 퇴근할까 하다가 얼음물 한잔을 받아 작업실로 들어왔다.
머리 한구석에 남아 있는 위화감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하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명확하지가 않아서.
나는 왜 기대가 안 되지? 완성본을 이미 알기 때문에? 그치. 그렇긴 한데···.
그들이 결국 만들 곡이잖아.
그대로 하는 게 이상적인 거 아닌가?
그래, 답안지잖아.
답안···.
순간, 근본적인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답안지가 맞나?’
아니, 애초에 곡에 답안지란 게 있나?
성공했다는 결과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운이 크게 작용했다. 앤 더글라스의 눈에 들었던 것부터가 운이었으니. 부정할 수 없지.
그러면.
‘앤 더글라스를 만나는 미래만 지킨다면···.’
그러면 곡이 달라져도 될까?
알고 있는 답 말고, 다른 선택지를 열어도 될까?
그래도 성공할 수 있을까?
위험한 생각이다.
오차를 만드는 거니까.
근데, 그래서 끌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레드리시한테 락스피릿이라도 옮은 건지, 청개구리가 된 기분이야.
‘이 기분이 썩 나쁘지도 않고.’
마음속에서 번진 결심이 머리까지 올라오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결정했다.
한계를 정하기 않기로.
기대하기로.
#
결정은 했지. 그걸 어떻게 지킬지는 아직 못 정했고.
내가 어떤 피드백을 해야, 미래의 완성본보다 더 나은 곡이 나올 수 있는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답안지를 다시 꺼내서 펼치고 싶어질 무렵.
주말이 다가왔다. 쉬는 날. 그리고 레드리시가 소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날.
어둑어둑해져 가는 대학로를 지나, 구석에 작은 소공연장에 도착했다.
나무 냄새가 은근히 난다. 걸음을 뗄 때마다 끼릭 거리는 바닥.
오래되었단 느낌이 물씬 나는 소공연장에는 아직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곧장 중년 남자가 입구로 달려온다.
“안녕하세요. 근데 저희가 아직 오픈 준비 중입니다. 오픈은 20분 뒤고요. 공연 시간은 40분 정도 남았습니다.”
친절한 설명에 얼른 눈알을 굴려 아는 얼굴들을 찾았다. 안 보인다. 무대 뒤에 있으려나.
“아, 저 레드리시라는 밴드 지인이라서요. 그분들이 얘기해두겠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중년 남자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럼 혹시 애들 소속사 피디님···?”
“네 맞습니다.”
“아고, 내 정신 좀 봐. 오신다는 얘기 들었는데···죄송합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중년 남자는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오늘 공연해도 된다고 허락해주신 것도 피디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아, 예.”
“오늘 공연 예정이던 팀이 갑자기 못 하게 돼서···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됨직한 중년 남자의 감사 인사에 나도 허리가 절로 굽어졌다. 민망한 웃음은 덤이었다.
“애들은 저 뒤에 있어요. 가서 인사 나누시죠.”
중년 남자와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각종 앰프들과 스피커. 검은 커튼을 지나 뒤편으로 돌아가자 레드리시 멤버들이 눈에 걸린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까지 만진 이병국과 기성운. 그 뒤로는 살짝 노출 있는 의상을 입은 유지은이 있었다. 민망함에 가장 가까운 기성운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네, 근데 여기 꽤 잘 되어있네요?”
작긴 하지만 앰프며 무대 구조 등이 음향에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여기 사장님이 예전에 음향 관련된 일을 하셨었대요.”
역시 다르네.
“여기선 얼마나 공연했었어요?”
“한 2, 3년? 그 정도 했었죠. 거의 매주.”
“오래 했네요?”
“그렇죠. 그래서 이번에 연락 왔을 때 거절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공연할 곳 없어서 버스킹만 할 때, 저희 도와주신 분이라.”
“잘하셨어요. 밴드는 공연을 해야죠. 저도 한 번쯤 보고 싶었고요.”
“저희 합주 보시잖아요?”
“공연은 또 다르니까요. 그리고···.”
목구멍으로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순간, 레드리시는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밴드잖아요, 라고 말할 뻔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미래를 스포할 뻔했다.
“잘 구경할게요.”
이병국한테만 아니라 기성운에게도, 그 뒤에 유지은에게도 응원을 건넸다.
무대 앞으로 돌아 나오니,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픈 시간이 됐구나.
무대 앞쪽은 서서 듣는 스탠딩 존이라 얼른 맨 뒤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맘 같아선 앞에 나가 손 흔들며 뛰고 싶은데···좀 그래. 피디고. 서른여섯이고.
쑥스럽다,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시간이 좀 있네.’
메모장을 켜놓고 멍하니 무대를 봤다. 그러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아이디어들을 적어두며 레드리시의 공연을 기다렸다.
잠시 후, 무대 아래로 사람들이 가득 차고, 공연이 시작되려는지 조명이 어둡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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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은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뭔가 신경 쓰이는지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확인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병국이 다가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
“나 오늘 노출 좀 심해?”
“···아니? 전혀? 너 평소 공연 땐 더 심했어.”
“그래? 근데 왜 오늘따라 심해 보이지.”
“뭐라는 거야. 지난번엔 이 옷 밋밋해서 싫다더니. 아!”
이병국이 갸웃거리다 뭔가 깨달았는지 드럼 스틱을 손뼉 대신 쳤다.
“너 살쪘···.”
랙케이스 더미 위에 걸터앉아 있던 기성운은 이병국의 낮은 비명을 들으며 악보를 넘겼다.
그때 신호가 들어왔다. 공연을 시작해도 된다는.
레드리시 멤버들의 표정에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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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오는 세 사람.
레드리시였다.
여기서 보니 색다르다.
익숙한 얼굴들이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로 서 있다.
내가 손을 내민 소속 밴드가 아닌,
거대 공연장 위에 오른 레드리시가 떠오른다.
세 사람이 자신들을 소개하는 동안, 콜라로 목을 축이며 기다렸다.
이제는 세 가지로 구분해서 들을 수 있게 된 불협(-사실 불협도 아니지만)이 귓가를 간질인다.
앞으로 나서는 유지은.
멀어서 자세히 볼 순 없지만, 그녀가 지은 표정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공연장에서만 볼 수 있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지.
자신감이 녹아든 특유의 표정.
안면근육을 재정비하면서 짓는 이를 드러내는 미소.
저거다.
내가 뮤튜브를 통해 수없이 봤던, 무대 위에서의 레드리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 번째 환호와 함께 레드리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묵직한 킥이 일정하게 울리며.
그 위에 간드러진 기타 리프가 얹어진다.
환호는 더욱 커졌다. 모두가 이 곡의 정체를 알아챈 거다.
고개를 기울였다.
‘앤 더글라스?’
최근에 버스킹 준비로 계속 연습했으니 선곡했겠구나 싶었는데.
‘다르잖아?’
유지은이 내게 보내왔던 연습 영상과는 묘한 차이를 보였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이게 곡 전체를 바꿀 만큼 강렬한···.
‘뭐지?’
이유를 알기 위해 곡에 집중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레드리시의 호흡을 따라갔다. 관객 중 한 명이 되어.
그리고.
“아.”
그들의 호흡에 동화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앞에서 뛰노는 관객들.
그들을 보며 신이 난 건반과 흥이 난 드럼이.
그리고 모두를 압도하는 보컬이.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앤 더글라스의 저 곡도 분명 완성본이지. 엄연히 음원이 등록되어있는.
그런데 지금 레드리시의 버전이 그보다 못하나?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좋게 느껴진다.
머리가 개운해졌다.
미래의 완성본을 뛰어넘을 방법을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레드리시는 밴드다.
라이브에 특화된 형태의.
라이브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녹음 어플을 켜서 다시 테이블에 올리며 생각했다.
오늘 반드시 들어야겠다고.
레드리시의 곡을.
< 045. 미래를 따라서 (3)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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