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4. 미래를 따라서 (2) >
시간의 흐름을 못 느낄 정도로 하루하루가 빠르게 가고 있다.
학준이 형에게 ‘한울’이란 예명이 생겼고, 이에 대한 것도 보도자료들이 곧 뿌려질 예정이며. 앨범 발매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레드리시는 계속 곡들을 다듬고 있고. 의외로 밴드라는 것에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내 유도대로 잘 따라와 주고 있다.
곡 작업을 하다가 잘 안 풀리면 앤 더글라스의 곡을 합주하라는 얘길 덧붙였더니, 유지은이 수시로 영상을 찍어서 보낸다.
‘확실히, 왜 앤 더글라스가 레드리시를 미국으로 불렀는지 알 것 같네.’
유지은의 목소리가 앤 더글라스의 노래와 묘하게 어울린다. 완벽하게 어울리진 않는데, 그래서 더 묘한 느낌이랄까.
지금도 그런 묘함을 느끼고 있다.
영상을 보면서 가고 있거든. 사무실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로.
“피디님!”
새하얀 공간에 들어서자, 마침 그 앞에 나와 있던 아담한 여자가 날 반겼다. 꽤나 과하게.
이번에 아더 레이블의 A&R 담당으로 들어온 신입, 김지희였다.
“지희씨, 촬영은 잘 돼 가나요?”
양손에 들린 빵과 커피를 슬쩍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런데 반응이 어딘가 이상하다. 덜 익은 감을 삼킨 사람처럼 표정이 떨떠름했다.
“어, 아. 네.”
의아해하며 뒤편을 봤다. 이름있는 스튜디오라 스태프들도 많았다.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데 정작 학준이 형은 보이지 않았다.
“형은 어디 갔어요? 쉬고 있나.”
“아···지금 대기실에 있어요.”
그녀의 뒤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멜로디와 함께.
“어? 기로야!”
김밥을 입에 물고 있던 형이 활짝 웃었다.
흰 셔츠. 크게 열린 앞섬 사이로 더 이상 앙상함이 아닌 잔 근육들이 보였다. 그동안 운동 열심히 했나 본데?
바리바리 사 들고 온 것들을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 놓자 학준이 형이 관심을 보인다.
“오, 밀가루. 요즘 계속 김밥만 먹어서 물렸는데, 잘됐다.”
김밥이 물리다니. 벌써 연예인 다 됐네.
학준이 형이 비닐 안을 뒤적이며 물어왔다.
“잘 하고 있나 보러 온 거야?”
“어, 오늘 늦게 출근하기로 해서 잠깐 들렸어. 근데···.”
옆에 있는 김지희를 보았다.
“지금 한창 촬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저. 그게, 촬영이 좀 일찍 끝났어요.”
벌써 끝났다고? 나는 손목을 확인하고 되물었다.
“40분이나요?”
“네. A컷 다 나왔다고···.”
“아.”
정해놓은 컨셉들의 A컷 사진이 빨리 나오면 이렇게 촬영을 일찍 끝내기도 한댔지.
그런데 김지희의 표정이 영 안 좋다. 뭔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무슨 문제 있어요?”
“···그게.”
“문제 있으면 빨리 얘기해줘요. 그래야 대처가 가능하니까.”
“네, 네. 사실 원랜 이런 컷도 구상했었거든요.”
김지희가 어지럽혀진 테이블에서 사진 한 장을 들고 왔다.
“빨리 끝났겠다, 시간도 남았으니 이 컨셉도 한 컷 찍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절대 안 된다고 하시네요. 사전 미팅 때 이것도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사진을 받아들고 유심히 살폈다.
옷은 갈아입으면 되고, 크게 어려울 것 같진 않은데?
“사진작가님이 안 된다고 하셨나요?”
“아뇨, 실장님이요.”
실장이?
나는 다시 한번 사진을 보았다. 이 컨셉 괜찮을 거 같은데···.
“실장님은 어디 계시는데요?”
#
“무슨 일이시죠?”
촬영장 쪽으로 다가가자 한 남자 스태프가 날 보곤 다가왔다. 경호원이야 뭐야.
남자의 시선이 날 빠르게 훑는다. 그 시선이 내 양손에 들린 빵과 커피에서 잠시 멈췄다. 뒤이어 옅게 흐르는 미소.
“아, 좀 전에 촬영하신 분, 회사 직원이신가 보네. 잘 먹을게요. 저기 테이블에 두시면 돼요.”
그가 가리킨 곳에 전부 내려놓고, 이번엔 양손 가볍게 다가갔다.
다시 마주한 스태프의 표정은 왠지 삐딱해져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또 왜요?”
“실장님 좀 뵈려고요.”
“실장님이요?”
눈을 깜빡인다. 실장님을 왜 찾냐는 눈치길래 설명을 이어갔다.
“저희 직원이 시간이 남았으니 한 컷 더 찍어달라고 요청했는데, 안 된다고 하셨다 해서요.”
그러자 삐딱한 자세만큼이나 삐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까 여자직원도 와서 똑같은 소리 하더니. 그거야 어련히 바쁘니······.”
“장 피디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다.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스튜디오 실장이 담배라도 태우고 왔는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옆에 서서 작게 중얼거리는 스태프.
“피디······.”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전 피디님이신 줄 모르고···.”
“빵 사 들고 오는 피디가 많이 없었나 봐요. 피디가 할 일이 아닌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너무 젊으셔서.”
삐질 거리는 스태프를 뒤로하고 실장을 보았다. 눈치 빠른 실장이 스태프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내 시선을 느끼곤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변검 마냥 가면 바꾸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긋하게 물으며 악수를 건네는 실장.
“저희 가수 응원차 왔죠.”
“하하, 그러셨어요?”
“네. 근데 응원하기도 전에 끝나 있더라고요.”
“······아. 그랬죠. 우리 사진작가님이 워낙 실력이 좋으셔서.”
“근데 아직 다 안 찍으셨던데요?”
“네? 에이, 아니에요. 그, 지희씬가 그 여자분이 그렇게 얘기했나 본데, 사실 그 컨셉은 보류 중이었거든요.”
“시간이 남았으니 찍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A컷도 충분히 나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그 컨셉, 사실 너무 별로라서···.”
“전 괜찮던데요?”
비니지스 미소 뒤로 불편함이 스친다.
내가 사회생활을 해본 36살의 눈이 아니었다면 결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재차 강조했다.
“전 좋더라고요. 그 컨셉.”
“······.”
대답은 없었다. 바라지도 않았고.
그냥,
“시간도 남았는데, 찍어주시죠.”
#
학준이 형과 직원이 눈치를 보고 있었을 생각에 조금 흥분해서 그랬다.
막상 강하게 요구하고 나니, 조금 과했나 싶었다. 그래서 살짝 후회도 할 뻔했는데···.
‘하길 잘했지.’
모니터에 떠오르는 사진을 볼 때마다 흐뭇했다.
흰 셔츠에 일탈적인 요소를 강조한 이미지보단,
저렇게 통 넓은 양복 차림으로 뿔테까지 쓴 학준이 형의 모습이 더욱 ‘한울’ 같았다.
회사원이란 제대로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던 형의 모습을 더욱 직관적으로 대변한달까.
‘괜찮네.’
A&R 김지희를 슬쩍 보며 웃어줬다. 그녀도 자신이 끝까지 민 컨셉이 좋게 나오자 뿌듯한 듯 활짝 웃고 있었다.
‘한가지 배웠네.’
프로듀서로서의 역할.
작곡과 기획뿐만 아니라 그 후에 이뤄지는 다른 것들에도 꾸준히 신경 써야 한다는 걸.
그리고,
‘내 이름이 갖는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상황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는 것.’
그래야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잡음 없이 뽑아낼 수 있으니까.
최정아를 보며 캐스팅보트를 쥐고 싶단 생각을 했을 때처럼, 스멀스멀 의욕이 솟았다. 이것도 출세욕이라 쳐야 할까?
“와.”
근데, 방금 꺼 진짜 잘 찍혔네.
#
촬영이 마무리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 곧장 사무실로 출근했다.
1층에서 프라프치노 두 잔을 테이크아웃해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불 켜진 녹음실로 들어가니 역시나 윤태영이 베이스를 튕기고 있었다.
“남는 방 많으니까 작업실로 하나 쓰는 거 어때요? 유목민도 아니고 매일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 연습하지 말고요.”
책상 앞에 프라프치노 한 잔을 탁 올려놨다. 윤태영이 감사하다 말하며 말을 이었다.
“장소가 바뀌면 나름 환기 효과도 있고 좋아요. 가끔 연습 안 될 땐 아예 바다로 쏘고 그러는 걸요.”
어째 서재원 팀장이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나도 진짜 일 안 풀릴 땐 호텔이나 한 번 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근데 이제 말 놓는 게 어때요?”
지난번에도 이런 얘길 했었는데, 윤태영은 여전히 말을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물었는데,
“전 이게 편해요. 저 레슨생 한테도 존댓말 쓰는데요 뭘.”
이런 답변이 왔다.
뭐, 강요할 순 없으니까.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AUX 선과 연결했다.
“아, 저번에 들었던 세 곡 기억하죠?”
“그, 레드리시라는 밴드 노래요?”
“네, 맞아요.”
윤태영이 흥미를 느꼈는지 베이스를 내려놨다.
“이번에 다시 편곡해서 보냈더라고요.”
“오, 들어볼래요.”
윤태영이 눈을 빛냈다. 요새 윤태영의 저 욕심 가득한 눈빛을 자주 보는 것 같네.
윤태영은 말없이 세 곡을 연이어 들었다.
그리고 음악이 멈춘다. 더 이상 재생될 게 없어서.
그제야 윤태영이 까끌해 보이는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꽤 많이 대중적여졌네요? 그런데도 밴드의 색은 전혀 잃지 않았고요.”
역시 정확하다.
곡들이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미래에 그들이 발매할 곡과 거의 유사해지고 있다는 뜻.
기억이 그린 노선을 따라 순항 중이었다.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윤태영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진짜 기대되네요. 얼마나 더 좋아질지.”
그 말이 묘하게 덜커덩거렸다.
“···?”
대체 저 말의 어떤 게 걸렸던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 한 단어를 떠올렸다.
‘기대···?’
그러게. 난 왜 기대가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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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잘 그려놓은 그림에 거름종이를 대고 잘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된다.
큰 오차만 없다면 골인 지점에 분명히 닿을 거다. 그런 점이 나를 편하게 해줬다.
레드리시의 성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것도 앞으로 레이블이 성과를 의식하며 움직이지 않아도 될 만큼 크게.
순탄했다.
아주 잘 그리고 있었다. 기억에 아주 근접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부담 없이 해도 되겠구나. 힘을 좀 빼도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완성될 곡에 대해 기대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미 알고 있는 곡을 만드는데, 어떻게 기대가 되겠어.
“······.”
이 곡에 맞춰 베이스 라인을 구상해보겠다는 윤태영을 뒤로하고, 녹음실을 나왔다. 찜찜한 마음으로.
핸드폰 꺼내 이병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피디님.
“네, 병국씨. 연습은 잘 하고 있어요?”
주변이 꽤 시끄러운데.
이병국이 잠시 흐물거리더니 대답했다.
-어···보컬이 없다 보니 좀 쉬고 있었어요.
보컬이 왜 없지?
“지은씨 어디 가셨어요?”
내 물음에 오히려 이병국이 되묻는다.
-네? 아직도 도착 안 했어요?
“어딜요?”
-지은이 사무실로 갔어요. 피디님 만난다고.
“······.”
전화를 끊고 머리를 긁적였다. 유지은한테 따로 전화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2층으로 내려왔는데 안쪽에 언뜻 긴 생머리가 보였다. 유지은으로 추정···아니 확실시되는.
“언제 왔어요?”
유지은이 테이블에 앉아서 비스트로가 사놓은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몹시 여유롭게.
“한···30분 된 거 같아요.”
“왜 연락 안 하고요?”
유지은의 눈매가 휘었다.
“에이, 피디님 일하실 수도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죠.”
그러면서 캔 맥주를 홀짝인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며, 다가가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근데 갑자기 왜 사무실로 온 거예요?”
“그냥 심심해서요. 애들 피씨방 간다길래 전 이리로 왔죠.”
“아···.”
어쩐지 통화할 때 시끄럽더라니.
딱히 할 말이 없어 유지은을 봤다. 맥주를 마시던 유지은도 날 멀뚱멀뚱 본다. 이러다 눈싸움이라도 해야 할 판.
“아, 온 김에 지은씨 곡 얘기 좀 해볼까요?”
“그것두 좋죠.”
씨익 웃는다.
그러려니 하며 핸드폰을 뒤적인다. 해줄 얘기를 정리해 뒀지. 일단···.
“브릿지를 가성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싶어요.”
“오, 찌찌뽕.”
“네?”
“저도 그 생각 어제 잠깐 했었거든요.”
“그렇군요.”
“참 신기하죠? 다른 멤버들도 신기하대요. 뭔가 피디님이 정답을 알려주는 것 같다고. 그래서 자존심도 못 부리겠다고.”
“······.”
“피디님만 따라가면 다 잘 될 거 같은 기분이랄까?”
“······.”
“아, 물론 저희도 열심히 해야겠죠. 이번에 애들 다 칼을 갈며 편곡하고 있어요.”
피씨방에서? 라는 생각을 하는데, 유지은이 맥주캔으로 책상을 탁 치며 말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기대···.
“네. 기대할게요.”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때, 문소리가 났다. 그다음 또각거리는 소리.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어? 정아야.”
머리를 회색으로 염색한 최정아가 걸어오다 우뚝 멈춰섰다.
날 보던 눈이 옆으로 슥 돌아간다.
맥주 탓에 발그레해진 유지은에게로.
“누구예요?”
< 044. 미래를 따라서 (2)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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