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3. 미래를 따라서 (1) >
“아주, 물 만난 고기 마냥 멋대로 던 데?”
회의가 끝나고.
몇몇 팀장급들만 남았을 때, 캐스팅팀 박 팀장이 말꼬리를 올렸다. 동시에 미묘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이를 지켜보던 다른 팀장들은 생각했다. 박 팀장이 웃는 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고.
길성혁이 벌인 일로 자신의 자리까지 날아갈까, 항상 전전긍긍하던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반대편에 앉은 서재원 팀장의 눈치도 보았다. 박 팀장의 웃음이 서재원 팀장을 향해있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작 느긋한 표정의 서재원 팀장.
“장 작가 말인가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박 팀장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 장 작가. 연이은 성공에 젖어 든 건지 요새 방향을 단단히 잘못 든 것 같더라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러다 사고 하나 칠까 봐, 하는 말이야.”
서재원 팀장의 얼굴이 기울었다.
“글쎄요. 어떤 방향을 말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친구, 무슨 학교 동아리인 양 이상한 놈들로 팀을 꾸리고 있더구만. 인지도와 스타성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있잖아.”
박 팀장은 실소를 머금고서 말을 이어갔다.
“공모전이나 가이드 뜨던 보컬을 데려오지 않나, 이번엔 무슨 밴드?”
그의 고개가 옆에 있던 계약 팀장에게로 돌아간다. 계약 팀장이 마지못해 말했다.
“레드리시.”
“이름하고는. 걔네들 세션이 아니라 진짜 밴드로 활동시키려고 데려온 거라며. TKM이 밴드라니. 한 여러 번 시도했다가 다 말아 먹었잖아? 심지어 그나마 가능성 있다는 보이 밴드로도 망했었지, 아마?”
타격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점점 더 노골적 여지는 박 팀장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까진 아니었겠지만, 장기로가 웬 밴드를 영입하며 구실이 생긴 거다.
“TKM에선 도전해볼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있는 거죠. 레이블이니까.”
“뭐 정식 레이블인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 판별하기 위한 프로젝트지. 그리고 레이블이 다양한 색을 내기 위해서니 어쩌니 해도, 결국 사업성이 밑받침되어야 하지 않겠어?”
박 팀장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여유로워도 되나 모르겠네? 자네가 추천해서 꾸린 팀이나 마찬가지라 만약에라도 성과가 안 좋으면 자네한테 별로 좋지 않을 텐데.”
은근히 압박하듯이.
“항상 네 편일 것 같은 본부장님도 꽤 실망하시지 않겠어?”
박 팀장이 자잘한 돌을 계속 던져댔다.
하지만 서재원 팀장의 표정은 잔잔하기만 했다. 속은 어떤지 몰라도, 심지어 고개까지 끄덕인다.
“그럴 수도 있겠죠. 성과가 안 나오면. 그런데···.”
서재원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 팀장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장 작가가 절 실망 시킨 적이 없네요. 아직은.”
목인사를 한 서재원 팀장이 그길로 회의실을 나갔다.
쿵.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박 팀장은 올라가 있던 입매를 확 비틀었다.
“재수 없는 놈.”
#
레드리시는 한국에선 흔한 인디밴드 중 하나였다.
홍대 인근에서 활동하고. 버스킹과 소규모 클럽 공연을 일삼는.
소위 말하는 딴따라.
소속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벌이를 레슨에서 충당하던 그들이, 별 생각 없이 했던 버스킹 하나로 미국까지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미래를 자세히 몰랐다면, 불가능했을지도···.
소속이 생긴 레드리시가 버스킹을 예전처럼 치열하게 할 리 없고,
해외 유명 뮤지션의 내한에 찾아가 그 앞에서 버스킹을 할 일도 당연히 없을 테니까.
자연스레 그 뮤지션의 눈에 들 일도 없어지는 거고.
‘우선 이민주에게 내한 날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으니, 전화를 기다리면···.’
생각을 이어가다, 뜨거운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유지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멤버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 빤히 보고 있다는 것엔.
“···피디님? 첫 번째 곡 끝났는데요.”
“아, 예···.”
요즘 여러 생각을 동시에 해 버릇해서 그런가.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자연스레 딴 생각으로 넘어가서 앞사람이 날 부르는 경우 말이다.
“어떠셨어요?”
유지은의 눈이 더욱 가늘어진다. ‘딴 생각했지?’라고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우선···.”
머리를 긁적이며 손목시계를 슥 보았다. 4분 정도인가? 딱 좋다.
“많이 줄이셨네요.”
“흐음, 그렇죠?”
유지은이 팔짱을 끼고선 나를 은근하게 바라봤다.
나도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딴생각을 한 건 맞지만, 제대로 안 들은 건 또 아니란 말이지.
“8번, 16번 마디 빼셨네요. 아무래도 이 노래에서 좀 튀는 부분이죠. 기타 솔로도 하나로 줄이신 거 좋아요. 17번 마디도 아예 새로운 라인 대신 이전 마디와 유사하게 간 것도 좋고요. 프리 코러스 자체를 다 빼신 것도 좋네요. 전체적으로 잘 줄여주셨어요.”
주르륵 읊자 유지은의 표정이 멍해졌다.
“헐.”
유지은의 감탄사(?)를 듣고 피식 웃으며 시선을 살짝 틀었다.
줄줄이 얘기한 피드백.
이거 사실 유지은한테 얘기한 게 아니거든.
드럼 앞에 앉은 이병국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병국씨.”
“예?”
“좋았다고요. 본인 곡.”
“···!”
유지은이 놀라서 묻는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가 얘기했었나. 이 곡, 얘가 만들었다고?”
“미팅 때 그런 얘기한 기억은 없는데···.”
“그치?”
기성운의 대답에 유지은이 휙 날 돌아본다. 해명해, 를 외칠 것 같은 얼굴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지.
이 곡의 후렴과 유사한 멜로디 라인이 이병국씨가 입을 열 때마다 제 귀에만 들립니다. 어때요, 이해가 되세요?
-이렇게 말할 순 없잖아.
“우선 멜로디 라인이 단순해요. 대체로 리듬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작곡을 하면 이런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죠.”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지 않게 하고선,
유지은을 보며 덧붙였다.
“저 열심히 들었어요.”
“···넴.”
“그럼 두 번째 곡도 들어볼까요?”
#
연달아 세곡을 모두 들었다.
확실히 나아졌다. 일단 길이가 전부 짧아졌지. 세 곡 다 합쳐서 단편 영화 러닝타임이 나오는 건 솔직히 너무했어.
쓸데없이 긴 기타 솔로와 지나치게 반복되는 마디들과 프리 코러스도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레드리시 앨범의 세 곡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부족하거나 다른 점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내가 그 음원을 갖고 있지 않으니 미세한 사운드까지 완벽히 똑같게 만들 순 없겠지만 최대한 비슷하긴 해야하지 않을까?
‘이걸 직접 적으로 말해야 하나?’
밴드이기 이전에 멤버들 모두 작곡가나 마찬가지이다 보니 곡 수정을 얘기하는 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살살 달래는 수밖에.
“이건 제 의견일 뿐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까지 억지로 뜯어고칠 필요 없어요.”
밑밥을 깔고선, 다시 첫 번째 곡부터 합주를 부탁했다. 모두 나를 보며 합주를 이어갔다. 무슨 지휘자라도 된 기분이네.
“아, 이 부분.”
내 신호에 따라 합주가 뚝 멈췄다.
“27번 마디 멜로디가···이런 식이면 어떨까요?”
기성운의 건반을 빌어 라인을 쳤다. 슬쩍 세 사람의 표정을 확인해본다.
어때? 좋지? 그치?
얼떨떨하지만, 절대 떨떠름하진 않은 세 사람의 면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좋을 수밖에.’
결국, 미래에 이렇게 편곡한 건 내가 아닌, 이 세 사람, 본인들이니까.
“괜찮나요?”
확인하듯 물었고.
“네···.”
“아, 예.”
“넴···.”
답을 들었다.
“넵. 그럼 다시 이어서 해볼게요.”
#
합주가 끝나고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합주실 앞 호프집.
치킨과 마른 안주들을 사이에 두고 레드리시의 세 멤버는 호프집 밖을 힐끔거렸다.
그렇다고 안주를 안 먹는 것도 아니었다.
술을 안 마시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형 기획사 프로듀서들은 다 저러나?”
맥주를 쭉 들이킨 이병국이 질렸다는 듯이 물었다. 이에 기성운은 구부정한 자세로 어깨만 으쓱거린다.
이병국이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제 우리끼리 그랬잖아. 그래도 밴드인데 너무 무리한 수정 사항은 받아들이지 말자고.”
“그랬지.”
“근데 아까 피디님이 그냥 의견일 뿐이니까 들어봐요, 라면서 콕콕 찝는데···의견은 무슨. 꼭 정답을 들이미는 것 같더라.”
기성운이 턱을 괸 채로 끄덕였다.
“만들면서도 뭔가 아쉽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전부 고치더라고. 근데 또 그게 딱이다 싶더라.”
“다르긴 다르네. 우리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먹태를 우물거리던 유지은. 시선은 여전히 호프집 밖에서 전화 통화 중인 장기로를 향해있었다.
그때 전화를 마친 장기로가 호프집 안으로 들어왔다.
“저 때문에 못 먹고 있었던 건······아니구나.”
횅한 접시들을 보며 장기로가 피식 웃었다.
“뭐 더 먹을래요? 마음껏 시켜도 돼요.”
“그러면···.”
이병국과 기성운이 메뉴판을 끌어와 머리를 맞댄다.
“지은씨도 더 시키고 싶으신 거 시켜요.”
“아뇨, 전 배불러요. 그보단, 피디님.”
“네.”
“여자친구 있어요?”
“풉!”
맥주로 목을 축이던 장기로가 컥컥대며 괴로워했다. 닭똥집인가, 알탕인가를 두고 고심하던 이병국과 기성운도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유지은을 보았다. 이에 유지은이 싱긋 웃는다.
“장난이에요.”
“크흡. 아, 네.”
사레가 들려 벌겋게 됐던 장기로의 얼굴이 차츰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럼 저희는 앞으로 계속 곡 수정만 하면 되나요?”
“지금 당장은요.”
“앨범은 언제 내게 될까요? 가족들이 계약했다니까 궁금해하더라고요.”
“저는 3개월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겠지만.”
“흐음, 생각보다 늦네요?”
“네, 그 전에 해야 할 것도 있어서.”
“해야 할 거요?”
유지은이 갸웃거리며 묻자 장기로가 끄덕였다.
“일단, 두 분 주문 끝나면 말씀드릴게요.”
건너편 둘을 흘겨보는 유지은.
“그냥 아무거나 주문해.”
결국, 둘 다 주문하고서 장기로가 다시 입을 뗐다.
“원래 버스킹 엄청 자주 했었다고 그랬죠?”
“네.”
“혹시 다른 뮤지션의 공연장 앞에서도 해본 적 있어요?”
“······.”
셋 다 우물쭈물했다. 창피한 일을 들킨 사람처럼.
“누가 제보했나요?”
“그게 사실은 저희가 너무 인지도가 없으니까 어떻게든 이름을 알려보려고···.”
늘어지는 말들에 장기로가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뇨, 좋은 방법이었단 말을 하려고 얘길 꺼낸 거예요.”
“···?”
“앨범 준비는 앨범 준비대로 진행하고, 남는 시간에 그걸 더 해보죠.”
“그거라면···공연장 앞에서 버스킹하는 거 말이에요?”
유지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이블에 들어가도 버스킹을 할 순 있지. 하지만 굳이 남의 공연장에 가서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장기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그거라는 듯이.
이번엔 기성운이 묻는다.
“누구 공연인데요···?”
잠시 후, 장기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세 사람 중 누구도 생각지 못한 사람이었다.
누가 알았겠나. 전 세계, 각종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의 이름을 얘기할 거라고.
“앤 더글라스요.”
< 043. 미래를 따라서 (1)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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