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41화 (41/221)

< 041. 스위치 (2) >

적당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프로젝트 레이블의 일원으로서,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그래서 윤태영처럼 미래를 든든하게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 거다. 하지만 미래를 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진 않더라.

내가 훗날 성공할 이들의 신상을 줄줄 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시기쯤, 어디에 있다. 이런 게 명확하지도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몇 명을 떠올리고, 이리저리 다녀봤지만, 윤태영 때처럼 운이 맞아 떨어진 경우는 전무 했지.

그래서 더 꼼꼼히 듣고 있다.

TKM의 레이블쯤 되면, 이렇게 수많은 뮤지션들이 러브레터를 보내니까.

이 중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될성부를 떡잎.

“하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마우스를 달깍거렸다. 그래도 두 귀만큼은 집중해서 노래를 들었다. 어쩐지 한 곡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네.

이메일이 하나씩 줄어든다. 그 중엔 꽤 괜찮은 뮤지션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 이름에 일일이 체크 해가며, 마침내 오늘 보내온 음원들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고갤 돌리며 봐버렸다. 각양각색의 봉투들과 작은 박스를.

“하아.”

당 충전이나 하자.

과자가 담겨있을 것으로 확실시되는 박스부터 집었다.

손톱으로 테이핑을 뜯어내자 내부가 보인다. 예상대로 완충재인 양 가득 들어있는 초콜렛과 과자들.

새벽이 출출한 작곡가답게 과자를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딸려 나온 CD 케이스를 열면서.

곡은 총 세 개.

일반적이었다. 보통 가장 자신 있는 곡 2, 3개를 보내는 편이지. 애초에 처음 들은 곡이 별로면 나머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

이메일로 온 거에 비교하면 봉투는 몇 개 안 된다. 그래서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파일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가장 위에 있는 첫 곡부터 재생시켰다.

꽤 거칠고 풍부한 사운드.

전주부터 엄청 락킹한데?

밴드란 사실에 흥미로워하다가, 이내 이상함을 느끼고 입가를 매만졌다.

드럼, 건반, 기타···베이스가 없네?

음원에 베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대신 리얼이 아닐 뿐.

트릴로지(Trilogy)로 그냥 건반을 눌러 찍기만 했는지 티가 좀 났다.

‘그래도···.’

느낌은 괜찮은데?

수준급인 실력에 놀랐다. 어느 악기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네.

감탄하며 계속 듣는데, 조금씩 고개가 기울기 시작했다.

뭐 이렇게 길어?

세션을 지원하는 밴드인가 싶을 정도로 연주만 주구장창 이어진다.

뭐지? 라고 생각하며 마우스에 손을 가져가는데, 그제야 봤다. 이 노래가 18분이 넘는다는 걸.

설마 18분 동안 합주만 하는 건가?

마우스를 뒤쪽으로 옮겨 미래를 엿볼까 싶었다. 그런데 마침, 꽉 찬 악기들의 연주를 뚫고 깜짝 놀랄 고음이 귀에 박혔다.

“···!”

놀란 것과 별개로 귀가 기울여진다.

미묘하게 섞인 비음.

그렇다고 절대 답답하진 않은, 속 시원히 터져 나오는 발성.

벙벙해진 얼굴로 모니터를 보며 곧바로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대신 박스를 집어 들었지.

후두둑. 과자들이 쏟아지며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져 내린다.

얼른 확인했다. 큼직하게 적힌 숫자들. 이건 연락처고.

분명히 밴드 이름이 있을······.

연락처 바로 아래에 적힌 영문자가 보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다.

막상 이 이름을 보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이게 그 ‘레드리시’라고?

#

목소릴 듣자마자 의심할 수 있었다.

너무 독특한 음색과 창법이라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 심지어 이어지는 노래는 분명히 내가 아는 노래였고.

훗날 그들을 있게 하는 대표곡.

지금은 그 곡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느낌이 완전히 다르지만, 보컬 라인만큼은 매우 흡사했다.

레드리시라···.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애꿎은 스크롤만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했다.

대박을 터트릴 인재가 진짜 튀어나올 줄이야.

윤태영을 처음 봤을 때보다도, 이건 더 신선하다.

그땐 내가 직접 만나러 간 거고,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넝쿨째 굴러들어 왔으니까.

소름도 돋고, 신기하고, 벌컥거리고.

오만가지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그러는 동안, 피아노를 칠 때 박자를 세듯. 왼발로 바닥을 툭툭 밟았다. 오금을 간지럽히는 기분. 지금 당장이라도 연락을 하고 싶었다.

‘오늘은 아침이 길겠구나.’

그 생각은 정확했다. 시계를 볼 때마다 터무니없이 느린 분침이 꽤나 고역이었다.

적어도 10시는 넘어야지, 라고 생각하다 결국 9시가 조금 넘어 핸드폰을 낚아챘다.

누가 뺏으려는 것도 아닌데.

-여보세요?

레드리시의 보컬 유지은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넘어왔다. 알고 들으니 이렇게 유지은의 목소리일 수가 없네.

문득, 어제 봤던 모습이 떠오른다. 붉은 원피스와 등에 멘 기타. 선글라스. 등등.

“안녕하세요. 아더 레이블입니다.”

-어···디요?

“아더 레이블이라고, 이번에···.”

-아, 알아요. 아더 레이블.

그러고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멍하니 기다렸다.

옆에 비스트로가 있었다면, 그 멍청한 표정은 뭐냐며 비웃었을 것 같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요? 연락 주신 이유는요?

“보내주신 데모 듣고서 연락드렸습니다.”

-······.

유지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보다 감이 좀 먼 목소리가 통화에 끼어들었다.

-설마, 연락 온 거야?

-어디래?

-야, 빨리 말해라.

두 명의 굵은 목소리들 틈에서 유지은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아더.

-아더···누가 걸었는데?

-우왓!

-너였냐?

걸어? 뭘?

이윽고 유지은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이, 야, 여기 만원···이 아니라, 잠깐. 아직 이유를 못 들었어.

“······.”

-여보세요?

“아, 네.”

-혹시 저희한테 연락 주신 이유가?

“데모가 마음에 들어서요.”

-윽, 야, 가져 가져.

유지은이 명치를 맞은 것처럼 짧은 신음을 내고, 뒤에선 환호성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알 것 같지만 믿겨 지지가 않는달까.

레이블의 연락을 받고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니.

세간에 떠돌았던 레드리시의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인디 여신, 유지은의 경우엔 아는 사람들만 아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똘끼 여신.

-우선 연락 주셔서 감사드려요. 비록 소중한 만원이 제 곁을 떠났지만.

“아, 예···.”

정말 어디서 연락 오느냐를 두고 내기를 했나 본데.

-그럼, 저희가 방문하면 될까요?

“네, 오시면 됩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순간, 나도 모르게 급한 마음이 나와버렸다. 딱 보니 다른 곳에도 데모를 돌린 것 같은데. 선수를 뺏기면 안 되잖아.

“······지금?”

#

레드리시의 드러머.

이병국의 뽀글뽀글 파마머리가 흔들거린다. 갓 딴 브로콜리 마냥.

손에는 만 원짜리를 부채처럼 펼쳐 부채질하고 있다.

밤샌 합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입꼬리만큼은 승천 중이었다.

그를 흘겨보던 유지은이 키보디스트인 기성운 쪽으로 고갤 돌려버렸다.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있던 기성운이 궁금한 듯 묻는다.

“우리 합격이래?”

“무슨 입사 지원했어? 데모는 마음에 드니까, 일단 한 번 와보라는 거 같더라.”

유지은의 대답에 기성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양반도 특이하네. 우리 데모가 마음에 들다니···.”

“얜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유지은이 도끼눈을 뜨고 나무랐지만, 기성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세 곡 다 합치면 30분이 훌쩍 넘을 텐데, 설마 다 들었으려나···.’ 라고.

“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유지은은 긴 생머릴 찰랑이며 벌떡 일어났다. 빨간 원피스가 너풀거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지금 우리 아더 레이블에서 연락 온 거야. TKM에서 연락 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제 우리 막 차트에도 오르고, 콘서트도 하고···.”

어느새 돈 잃은 건 잊고, 히죽대는 유지은에게 부채질을 마친 이병국이 물었다.

“그래서. 전화 준 사람은 누군데?”

“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유지은이 벙쪘다.

“모르지. 그냥 직원 아닐까?”

당당한 유지은을 보며 이병국이 끄덕였다.

“아. 그렇겠네. TKM씩이나 되는 프로듀서가 일일이 노랠 들어봤을 리도 없고.”

그러자 이번엔 기성운이 끼어든다.

“그럼 곡 더 가져가야 하는 거 아냐? 다른 것도 들려달라고 할 것 같은데···?”

“없잖아.”

“그니까.”

“얼른 만들어야겠네. 준비 좀 해서 가야 계약이든 뭐든 할 확률이 높아질 거 아냐.”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유지은이 무슨 소리냐는 듯 툭 내뱉었다.

“못 만들어.”

“왜?”

“시간이 얼마 없거든.”

“어···?”

유지은은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 지금 보재.”

#

“이제 본사 가실 일 없는 거예요?”

내 물음에 비스트로가 호탕하게 웃는다. 긍정의 웃음이었다.

포텐업의 음원 작업이 모두 끝난 그는 홀가분한 얼굴로 녹음실을 둘러보았다. 연신 감탄하며.

“이거 TKM보다 나은데? 옆 방도 구조는 같고?”

“네. 장비들이 자잘하게 다르긴 한데, 차라리 그게 더 나은 것 같고요.”

“그치. 손에 익는 게 각자 다르니까.”

장비 얘기를 이어가다 궁금해져 물었다.

“다음 작업 계획은 있으세요?”

“나 이제 작업 끝났는데?”

몹시 억울한 표정인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요.”

“뭐, 일단···아이돌은 안 해.”

“아직 그럴 여력도 안 되죠.”

우선 인력부터 턱없이 부족하지.

고갤 끄덕이던 비스트로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은근히 말한다.

“요새 힙합이 하고 싶네.”

“하고 계셨잖아요?”

“살랑살랑한 힙합 말고.”

살랑살랑? 아,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그간 TKM에서 아이돌 위주의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그가 만드는 곡도 그에 따라 변하긴 했지. 지금은 랩이 있는 댄스곡 느낌이랄까.

나는 끄덕이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불쑥 물었다. 언젠가 한번은 말해야지 싶었던 것.

“언더에서 데려와 작업해보시는 건 어때요?”

“언더?”

비스트로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날 향했다.

“그게 될까? 레이블 인식에도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아직까진 그렇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거고.

나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전 괜찮은 것 같은데요?”

“흐음···.”

고민하는 듯한 비스트로에게 솔깃할 만한 얘길 넌지시 꺼냈다.

“이건 제가 얼핏 들은 얘긴데요.”

“···?”

“방송국에서 래퍼들끼리 경쟁하는 프로를 기획하고 있다더라고요.”

비스트로가 살짝 커진 눈으로 날 보며 되물었다.

“그래?”

“네,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구라 꽤 신빙성 있는 얘기일 거예요.”

비스트로가 주억거리며 더욱 고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 방송이 만들어진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작게 중얼거리길래 옅게 웃었다.

물론 지어낸 얘기였다. 내 주변에 방송국은커녕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도 없다. 하지만 그런 방송이 만들어지는 건 사실이고.

그때 이번에 새로 온 여직원이 녹음실 문을 두드렸다.

나와 비스트로가 쳐다보자, 조심스레 말한다.

“저···밑에 손님들이 오셔서요.”

“손님?”

“아, 제 손님인가 본데요.”

갸웃거리는 비스트로에게 말하며,

조금은 긴장한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2층 안쪽 테이블로 다가가니 세 사람이 쪼르륵 앉아있는 게 보였다.

윤태영과는 달리 미래와 싱크로율이 거의 근사치에 가까운 얼굴들.

이 밴드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살짝 팬심이 머금고서.

웃으며 그들 앞에 섰을 때,

“······.”

“······?”

나는 멜로디를 마주하게 되었다.

온갖 불협이 섞인.

< 041. 스위치 (2)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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