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7. 독립레이블 (2) >
“한창 바쁠 텐데, 여긴 어쩐 일이야?”
내 물음에 최정아가 살며시 웃었다. 먼저 이성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다가온다.
안 본 사이,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도 같고. 확실히 눈빛을 보면 자신감이란 게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만하지. 이젠 무려 최정아인데.
“틈내서 왔어요. 사무실이 어떤지 보고 싶어서요.”
궁금할 순 있지. 근데, 틈내서까지 올 정도인가? 여기가?
의아해하는데 최정아가 말을 이었다.
“이번 활동 끝나면 저도 여기 소속이거든요.”
벙벙해졌다. 자연스레 같이 온 비스트로에게 시선이 옮겨졌고. 그러자 어깨를 으쓱 해 보이는 비스트로.
“회사에서 결정된 것 같던데? 뭐, 얘가 조른 것 같긴 하다만.”
“헤에, 졸랐다기보단, 제 음악 색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 장 피디님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죠.”
확신까지?
뭐, 저렇게 얘기하지만, 최정아의 의지만으로 결정될 사항은 아니었다. 회사 쪽에서도 최정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구석이 있다는 거겠지.
“우리야 뭐 인력난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네.”
비스트로가 웃으며 말했고, 나도 일정 부분 동의했다. 신인 발굴만으로 다른 레이블과 경쟁하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정아를 보낸 건 의왼데. 당연히 정규를 준비시킬 줄 알았거든요.”
“요즘 정규 내는 게 쉽나.”
하긴, 싱글과 정규는 들어가는 액수의 단위부터가 다르니까. 하지만 최정아인데? 내가 너무 팔이 안으로 굽는 건가. 그런거야?
그때 최정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했다.
“반짝 스타라고 생각하는 거죠. 절.”
#
최정아는 스케줄 때문에 금세 나갔다. 이번엔 매니저가 데리러 왔더라.
나는 이성원과 비스트로를 남겨두고 홀로 사무실을 나섰다. A&R팀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독립레이블이 이런 건 좋긴 좋아.
하지만 이런 것도 별 게 아닐 정도로 큰 장점이 있다.
바로 내 팀을 꾸릴 수 있다는 것.
캐스팅보트가 손에 쥐어진 거다. 드디어.
‘물론 그만큼 책임이 따르겠지.’
내가 벽 타는 거미 인간이 아니라 살짝 걱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그에 못지않은 특이점이 있다는 거다.
시간 여행자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팀을 꾸리는데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 거다. 될성부를 떡잎을 먼저 확보하는, 아주 확실한 방법으로.
후덥지근한 날씨를 뚫고 걷다 보니 낡은 빌딩이 보인다. 최근에 내가 꽤 자주 들락날락했던 곳. 여기 3층이 윤태영의 작업실이다.
"흐음."
오늘은 올라가지 않고 밑에서 기다렸다. 기분이 묘하네. 평소처럼 음악 관련 얘기를 하거나, 기타를 배우기 위해 온 게 아니라서 그런가.
‘명함을 건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전화를 걸자, 윤태영이 얼른 내려가겠다며 서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간편한 차림으로 내려오는 윤태영. 근데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드디어 더벅머리를 드디어 청산했네. 잔소리를 한 보람이 있어. 물론 아예 잘라버린 건 아니지만..
곧 코까지 가리겠다 싶었던 머리를 뒤로 넘기고 한 갈래로 묶어버렸다. 이마와 함께 미남형 얼굴이 비로소 드러났다. 훨씬 낫잖아?
“스타일 바꿨네요?”
“네. 그, 좀 별론가요?”
“아뇨. 깔끔하고 좋은데요?”
엄지까지 보이며 칭찬하자 윤태영이 민망한 듯 허허거렸다. 나도 따라 웃다가 허기진 배를 부여잡았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거르고 나왔더라고, 내가.
“뭐 먹을까요?”
“음, 여긴 뭐가 맛있냐면···.”
작업실이 있는 동네이니만큼 메뉴도 윤태영이 정했다.
길 건너에 있는 작은 음식점.
누런 양푼에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빨간 국물. 통으로 들어간 김치를 가위로 성둥성둥 잘라 낸다.
그사이 나는 김 가루를 조달했다. 김 가루 수북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자, 윤태영이 물어왔다.
“일은 잘 돼 가세요?”
“일이요?”
“레이블이요. 기사도 나고 그랬던데.”
“아. 아직 사무실이 공사 중이라, 아마 며칠 더 있어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에 윤태영이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 완성되면 한 번 놀러 갈게요. 화환도 하나 맞춰서.”
“화환?”
갑자기?
윤태영이 고개를 돌린다. 음식점 앞에 놓인 화환 쪽으로. 아까 들어올 때도 유심히 보더니···설마, 사무실로 보내려고?
“저 정도 크기면 되겠죠? 문구는···.”
윤태영은 진짜 하나 맞출 기세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환은 괜찮고, 몸만 오세요.”
“에이, 그래도 뭐라도 사서 가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 피디님 사무실인데.”
“이상하잖아요.”
“···?”
“계약서 쓰러 오시는 분이 화환을 맞추는 건.”
풀풀 웃던 윤태영이 멈칫했다. 국물을 뜨던 국자를 툭 내려놓으며 커진 눈으로 날 보고 있다. 나도 참 유치하지. 이런 상황에 재미가 들린 것 같다. 은근히 짜릿하네.
웃음을 흘리며 확인 차 물었다.
“그 새 다른 소속사가 생긴 건 아니죠?”
윤태영의 고개가 좌우로 펄럭였다.
#
윤태영과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앉아 음악 얘기도 한참을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미 해가 어둑어둑해진 후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비스트로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며.
“비 피디님.”
“어? 어, 어.”
공들여 쓰던 노트를 탁 덮는다. 저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굳이 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회사로 안 가셨었어요?”
포텐업 작업이 남아 있지 않나?
“갔다가 다시 왔지.”
굳이? 라는 얼굴로 쳐다보자 비스트로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커다란 손이 벌컥 냉장고 문을 열자 아침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곳에 통통한 캔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다.
“크흐.”
저 혼자 감탄하며 캔 두 개를 꺼내며 물어왔다.
“한잔할래?”
“허······.”
결국 유혹에 넘어갔다.
여름이니만큼 밖이 너무 더워서랄까. 그런 걸로 하자.
캔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비스트로와 마주 앉았다.
치익,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살짝 올라오길래 얼른 입을 가져다 댔다. 그때 비스트로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갑자기 물었다.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게 언제였어?”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고개를 기울이자 비스트로가 덧붙였다.
“왜 이쪽 분야 사람들은 대부분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사람들이잖냐.”
그렇긴 하지.
끄덕이며,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친구 집에서 난생처음으로 fl studio를 만졌을 때요.”
“흔한 이유구만.”
비스트로가 피식 웃으며 맥주를 마저 삼켰다. 그러더니 탁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그 흔한 이유로 성공하는 사람이 드문 거고.”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럴까.
절대 맥주 한 잔 마셨다고 이럴 리 없는데.
나 오기 전에 더 마셨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비스트로가 특기를 발휘했다. ‘사람 표정만으로 생각을 읽고 답하기’라고. 이따금 나오는 능력이다. 내 능력 마냥.
“흐흐, 갑자기 왜 이러나 싶냐? 너 얼굴이 성공한 사람답지 않게 너무 칙칙해서 그런다. 요새 보면 성원이보다 네가 더 초췌해 보여.”
“아···.”
괜히 눈 아래를 만지작거렸다. 다크 서클이 너무 짙게 내려왔나 싶어서.
그렇게 눈 주변을 조몰락거리다 손을 내리고 비스트로를 보았다.
한동안 머릿속에 콱 박혀 날 괴롭히는 생각에 대한 의견이나 들어볼까 해서.
“그···확신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하세요?”
“무슨 확신? 곡? 가창자?”
“음···가창자요.”
“그거야 뭐···.”
말이 흐려진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나 싶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간단하지.”
“···?”
“가창자 목소리를 전부 해부해.”
해부···? 그 동물 막, 그러는 그거?
“아주 잘게 쪼개서도 들어보고, 다 붙여서도 들어보고, 뭐 하나 빼서 또 들어보고.”
“······.”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다른 라인 위에도 얹어보고, 별짓을 다 해봐. 그럼 감이 올 때가 있어. 얜 가수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
“뭐, 난 그렇다고.”
한 10여 분쯤 지나서, 비스트로는 맥주 한 캔을 다 마시고는 자기 작업실로 들어갔다.
나도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작업실로 향했다.
세 배쯤 넓어진 작업실.
컴퓨터를 켜놓고 업그레이드된 장비들을 훑어보니 흐뭇해진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연결음이 길어진다. 야근 중인가? 싶어 끊을까 망설이는데 학준이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작곡가님!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통화 가능해?”
-음, 길게는 힘들 거 같아. 지금 내가 회식 중이라서.
“아, 아. 짧아. 내일 저녁에 볼 수 있나 해서.”
-내일? 음 그건 내일 되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긴 한데···아마 가능할 거야. 바쁜 일도 얼추 끝나서.
“그래? 그럼 내일···회사 앞으로 갈까?”
-아니, 거기 가자.
“어?”
-너 옛날 작업실 앞에 치킨집. 그 집 치킨 땡긴다.
“푸흐, 오케이. 알겠어.”
전화가 뚝 끊어지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받아온 얼음물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으, 으···.”
골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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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 어디 갔다 와?”
한껏 취한 거래처 부장이 조심스레 문을 닫는 김 대리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김 대리, 전공이 음악이라면서? 어쩐지, 일 처리가 빠릿빠릿하지 못 하다 했더니. 딴따라 하다 왔구만? 어디, 노래나 한번 들어보자고!”
낄낄대는 웃음소릴 들으며 김학준은 주변을 살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이미 뺄 상황이 아니란 걸 깨닫고 어색하게 웃으며 마이크를 받았다.
“하하, 그럼 제가 또 한 곡 제대로 뽑아 보겠습니다.”
애써 웃으며 휙휙 돌아보지만 리모콘은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가 번호를 눌렀다.
“어, 번호도 외웠어? 이야 음악 전공 맞네, 맞아.”
술에 취해 한껏 걸걸해진 웃음소릴 들으며 전주를 기다렸다. 이윽고 뽕삘 가득한 반주가 흘러나오자, 거래처 부장이 흥겨운지 잔을 들었다. 그걸 과장이 얼른 일어나 채웠고.
김학준이 마이크를 꽉 쥔 채로 웃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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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프로그램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게 필요한 건 확신이었던 것 같다고. 내가 학준이 형을 끌어들여도 될 확신 말이다.
단지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아파서, 그런 동정 때문이 아니라.
당장에 형과 완벽하게 맞는 곡을 줄 수는 있지. 애초에 그런 능력으로 만든 곡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은···?’
나는 주머니에 있던 USB를 꺼내 파일을 컴퓨터로 옮겼다.
TKM에 오기 전 작업했던 프로젝트들.
그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프로젝트를 열었다.
색 구분 없이 빼곡한 트랙들이 떠오른다.
‘이때도 역시나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
휠을 드륵드륵 거리며 찬찬히 살폈다.
일단 한 번 쭉 들었다. 휴가 때 기차에서 계속 들었지만, 그래도 또.
그러다 한 부분을 반복재생해보기도 하고, 건반 트랙만 켜놓고 듣다가, 베이스 트랙만 뮤트 시켜 들었다.
나아가 다른 가상 악기를 불러와서 전혀 다른 라인으로 덧입히기도 했다.
그 과정 끝에서 결국 학준이 형 목소리만 남았고, 마침내 나는 확신을 가졌다.
이제 이 확신을, 형에게도 심어줘야 할 차례였다.
< 037. 독립레이블 (2)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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