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1. 차트전쟁 (5) >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
내가 이른 아침부터 작업실에서 나오자 정 대리와 여직원이 놀란 눈을 했다.
“어젯밤에 출근했거든요.”
힘없이 대답하며 정수기에서 얼음물을 받아 쭉 들이켰다. 후, 살 것 같네.
“너 어제 홍대라며?”
“그랬죠. 바로 작업하러 돌아왔지만.”
“허어···.”
저건 감탄하는 표정일까, 질린 표정일까?
“성원이가 매일 다크서클 이만치 내려와 다니는 거 보면서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여기 만만찮은 놈이 또 있네.”
“그래도 성원 피디님은 꼬박꼬박 집에는 들어가세요.”
“여자 친구가 없어서 저러는 거 아닐까?”
“어머, 성원 피디님은 여자친구 있으세요?”
“좀 초췌해 보여도 잘생기긴 했으니까. 있지 않을까?”
저기요? 뭔가 되게 이상한 방향으로 빠진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 나쁘기도 하고.
나는 정 대리에게 오후에 윤태영이 올 거란 얘길 했다. 정 대리는 별말 없이 알겠다며 끄덕였고, 옆에 있던 여직원이 녹음실 예약을 잡아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대충 얘기가 끝나고.
정 대리가 불쑥 물어왔다.
“맞다. 곧 하서윤 컴백 하는 건 알아?”
모를 리가.
“아 네. 들었어요.”
“누구한테? 아, 당연히 비 피디님···.”
“본인한테요.”
정 대리 눈이 휘둥그레진다.
“본인? 하서윤을 만났어?”
“잠깐 스치듯 두 번 보고, 홍보팀 내려갔다가 제대로 봤어요. 거기서 직원들 들들 볶고 있던데요.”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했는지 정 대리가 낄낄대며 웃는다.
“컴백 전이라 홍보팀이지, 곡 필요할 땐 여기 와서 그러고 있어.”
“무슨 순회공연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여직원은 몸서릴 치고 있다. 홍보팀에서 보니 그럴 만하겠더라.
손에 들린 얼음물에 얼음만 남았을 때쯤, 정 대리가 몸을 돌렸다.
“암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숙직실 가서 눈 좀 붙여.”
“그렇지 않아도 지금 가려고요. 조금이라도 자야겠어요.”
“그래, 쉬엄쉬엄하고. 혹시라도 차트 1위의 부담감 따윈 아예 만들지도 말고.”
“넵.”
그게 안 만든다고 만들어지지 않는 건진 모르겠지만. 거기다 이미 생긴 것도 같지만. 어쨌든.
숙직실로 내려가며 핸드폰을 뒤적였다.
음원 차트는 여전히 최정아가 1위였다. 그렇다고 경쟁자들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인기 보이그룹이 어제 컴백을 했는데도 아직까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거에 대한 기사도 있다. 댓글은 몇몇 화가 난 팬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당연하단 반응. 노래가 좋으니까.
좀 더 살펴보니 하서윤 컴백에 대한 기사도 있었다. 호기심에 눌러보니 왼쪽 옆모습으로 찍힌 하서윤의 사진이 떡하니 떠오른다. 아래엔 유명 프로듀서와 함께 미국까지 가서 녹음을 해왔다는 내용들이 한가득하였다.
-3주나 기다리라고?
-얼른 듣고 싶은데···.
-엄청 기대된다. 나오자마자 1위 찍고 시작할 듯.
-솔직히 하서윤이면 1위는 당연하고, 거기에 몇 주 동안 있냐가 더 궁금함.
-근데 제인은 언제 컴백함?
-여기서 제인을 왜 찾아.
어쩐지 곧 전쟁터가 될 것 같은 댓글 창을 빠져나왔다. 마침 숙직실에 도착하기도 했고.
텅 빈 숙직실에 들어가 맨 끝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러다 회사 복도에서 잠든 채로 발견되면 어떡하지? 싶을 정도로 졸렸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잡생각들이 떠오른다.
최정아는 언제까지 1위를 하려나.
하서윤이 컴백하면 바로 뺏기려나.
정 대리 말로는 플로라에 대한 회사의 기대가 딱 차트 인정도라던데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꾸역꾸역 밀어내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징이이잉.
핸드폰이 울린다. 손을 뻗어 베개 속에서 꺼내어 확인해보니 윤태영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여보세요.”
목소리가 갈라지길래 얼른 헛기침했다.
곧바로 윤태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피디님. 저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진짜 이렇게 살다간 10년 돌려받은 젊음을 5년 만에 다 까먹을 판인데···? 근데 어쩌겠나. 일하는 게 즐거운걸.
곧장 로비로 향했다. 입구 쪽에 베이스를 등에 멘 윤태영이 덩그러니 있었다. 주변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 뭔가 내가 처음 여길 왔을 때 생각이 나네.
“안녕하세요!”
윤태영이 날 발견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고갤 숙였다. 나도 걸음을 재촉하며 다가가 인사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먹고 왔습니다.”
“그럼 바로 녹음실로 가시죠.”
윤태영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꾸덕꾸덕하게 얹어져 있던 졸음이 확 가신다. 윤태영의 베이스 연주를 볼 생각에.
그 독특한 느낌이 플로라의 곡과 어우러졌을 때 어떤 시너지를 가져올지 기대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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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정 대리의 보고에 서재원 팀장이 반문했다.
“벌써 플로라 보컬 녹음이 들어간 건 아닐 테고, MR에 필요한 녹음은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이에 정 대리가 설명했다.
“그랬는데, 베이스가 좀 부족한 것 같다면서 실연자 한 명을 데려왔습니다.”
“본인이 데려왔어? 친구?”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무슨 클럽에서 연주를 보고 데려왔다던데···.”
“뭐? 하핫.”
서재원 팀장이 털털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 1위 작곡가가 밖에서 누구 데려오는 거에 재미가 붙었나 본데?”
“하하, 네. 실연자 선택이야 프로듀서의 권한이니 일단 오케이 했습니다. 이젠 장 피디 안목을 좀 믿어도 될 것 같아서요.”
“잘했어. 최정아 때 장 작가 안목이 한몫하긴 했지. 꽂히면 옆을 너무 안 보는 것 같긴 하지만.”
외부인에게 곡을 준 사건(?)임을 알아챈 정 대리가 허허 웃었다.
“···근데, 난 지금 버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정 대린 어땠어?”
서재원 팀장의 물음에 정 대리도 끄덕이며 동조했다.
“저도 좋았습니다. 솔직히 그대로 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는데, 장 피디는 성에 안 차는 눈치더라고요.”
“그래? 어디가 그랬는지 궁금하네. 뭐, 녹음에 들어갔다니 결과물이 나오면 알 수 있겠지. 장 작가가 뭘 바꾸고 싶어 했는지.”
서재원 팀장이 꽤 재밌어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걸려있던 자켓을 팔에 걸치며 삼각 별이 그려진 차 키를 꺼낸다.
“어디 가세요?”
“점심 약속.”
서재원 팀장이 덤덤하게 답하며 팀장실을 빠져나갔다.
"지금 3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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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친구는 처음 보는데?”
머리가 반쯤 벗어진 엔지니어가 내 쪽으로 의자를 끌고 와 물었다.
“제가 특별히 모셔왔죠.”
“엥? A&R팀에서 섭외한 세션이 아니라?”
“네. 지금 저한테 딱 필요한 분이라서 제가 발로 뛰었습니다.”
“그래? 근데 저 친구 머리가 참···.”
엔지니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부스 안에 있는 윤태영을 바라본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윤태영을 보았다.
그러게. 여전히 더벅머리다. 솔직히 회사를 오면서 저 머리 그대로 올 줄은 몰랐지.
“부럽네. 숱이 많아.”
“···?”
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 눈을 끔뻑였다.
“근데 저 친구 뭘 저렇게 달달 외우고 있어?”
엔지니어의 말처럼 윤태영은 부스 안에 서서 이어폰을 낀 채로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내가 대답했다.
“곡 가사요.”
“베이시스트가 가사를 왜 외워?”
“글쎄요. 속으로 부르면서 치고 싶다더라고요. 그래야 보컬이 느끼는 그루브도 확인할 수 있다고.”
엔지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이한 친구네.”
맞다. 특이하지. 그래서 그 밤에 홍대까지 가서 모셔왔고.
그때 스피커에서 윤태영의 소리가 들려왔다.
-피디님, 일단 그냥 노래 부르면서 쳐 볼게요. 느낌 좀 확인하려고요.
나는 오케이 사인을 주고 윤태영이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모니터를 주었다.
그러자 흥겹게 노랠 부르며 베이스를 치기 시작한다. 노래는 몰라도 베이스는 기가 막힌다.
긴장 따위는 전혀 안 한 듯 흐느적거리며 편안하게 치는데, 힘이 실려있다. 어제 함께 공연하며 느꼈던 거지만 또 봐도 신기하다.
저거 진짜 어려울 텐데. 편안하게 강한 소리로 일정하게 치는 거.
“오, 독특한데? 뭔가···리듬감이 오묘한걸?”
앞으로 저 리듬감에 반하는 해외 가수가 한 둘이 아니게 되지.
흠. 이번 곡 작업이 끝나고 나면, 저 재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사실 TKM의 느낌과는 거리가 좀 먼데···.
그때 옆에서 감탄하던 엔지니어가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아이돌 곡에 넣기엔 너무 튀지 않아?”
“섞어야죠. 기존에 찍혀있는 베이스와 레이어를 할 생각이에요.”
“그래?”
엔지니어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니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머릿속에 한 번 그려봤나 보다.
“어떤 소리가 나올지 기대되는데?”
그 사이, 윤태영이 노래를 부르며 한 곡을 완주했다. 이번엔 악보에 뭔가를 막 적는다. 그러더니 베이스를 들고 자리에 척, 하고 앉았다.
-피디님, 준비 끝났습니다.
윤태영이 자세를 고쳐 앉는 동안, 나와 엔지니어는 녹음 준비를 마쳤다.
서로 오케이 사인이 오가고, 나는 기대감 어린 손끝으로 녹음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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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청담동의 한 한식집.
서재원 팀장이 미닫이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 남자가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TKM 엔터테인먼트의 본부장, 최영준.
서재원 팀장은 깍듯이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갑자기 불렀는데 뭘.”
서재원 팀장이 자리에 앉자 중년 남자는 느긋한 미소로 그를 응시했다.
“이런 거 저런 거 묻고 싶은 게 생겼는데, 본부장실로 부르자니 내가 좀 답답해서.”
“전 좋습니다.”
“다행이네. 일단 좀 먹자고.”
곧바로 식사가 이어졌다.
최영준 본부장은 밥 먹을 때만큼은 일 얘길 꺼내지 않았다. 요즘 내 몸은 이런데, 너는 어떻냐는 둥, 최근에 어떤 음식점을 갔는데 맛있었다는 등의 굉장히 일상적인 얘기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딱 젓가락을 놓자마자, 대화의 주제가 확 바뀌었다.
“퍼블리싱 팀을 만들려고.”
최영준 본부장이 화두를 던져놓고는 물로 입가심을 했다. 서재원 팀장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겸사겸사 독립적인 레이블도 하나 만들까 하는데···.”
이번엔 서재원 팀장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두 눈이 살짝 커진다.
최영준 본부장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서 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서재원 팀장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미 솔라톤이나 ENB는 독립 레이블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를 찾는다면 많겠지만 우선 사업성으로 따진다면···거대 기획사라는 이미지를 벗고, 시장을 부분 점령할 수 있다는 이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최영준 본부장이 가만히 듣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자네보고 사업 설명회 하랬나?”
“예?”
“A&R 팀장이면 음악 얘길 해야지.”
순간 서재원 팀장은 놀란 눈으로 최영준 본부장을 보았다.
최영준 본부장은 미소를 띤 채로 고갤 끄덕였다. 말 해보라고.
이윽고 서재원 팀장의 입이 열렸다.
“기존의 TKM과 다른 색을 표현하기에 용이하단 장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작곡가들도 자율성이 보장될 것이고, 그게 개성 있는 음악으로 이어질 겁니다. 그만큼 새로운 아티스트 발굴도 발 빨라 질 거고요.”
“그래?”
턱을 쓸어 올리는 최영준 본부장.
“역시 하는 게 좋겠네.”
결정을 내린 듯 웃었다. 그리곤 서재원 팀장을 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일단, 괜찮은 프로듀서 몇 명 추려 놔봐.”
< 031. 차트전쟁 (5)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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