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26화 (26/221)

< 026. 앞으로 >

최정아 싱글 준비로 바빠지니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났다.

그래, 한동안 여유롭긴 했었지. 지금보다 스트레스는 훨씬 많이 받았던 것 같지만.

피곤함에 하품이 나오는 걸 꾸역꾸역 참았다. 가죽 소파가 너무 편해서 자라고 하면 바로 기대서 곯아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만.

사락-.

서재원 팀장이 느긋하게 종이뭉치를 넘기고 있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괜히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잠이 좀 깬다.

그때 서재원 팀장이 입을 열었다.

“최정아 앨범 진행 상황이 궁금해서.”

“MR 작업은 끝났습니다. 정아 녹음만 따서 바로 후반 작업으로 넘길 생각이에요.”

“음. 촉박하진 않았나?”

“할만했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2주면 양반이다. 무명 작곡가로 활동할 때 비하면야···. 그땐 3일 만에 내놓으란 적도 있었는데 뭘.

“그런가.”

천천히 고갤 끄덕이던 서재원 팀장이 종이뭉치를 내려놓으며 나를 본다.

“장 작가도 할 얘기 있다며. 또 막아줘야 할 게 생긴 거야?”

덤덤하게 말하며 날 보는데, 순간 뜨끔했다. 꼭 사고치고 들어온 아일 보는 듯한 눈빛 같았기에.

“아뇨. 그게 아니라, 이현 때 하신 얘길 돌려받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선물 말하는 거군.”

이현 곡이 TOP10에 들면 받기로 했던 선물. 슬슬 그걸 요구해도 될 것 같아서.

“플로라와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래. 해봐.”

“네?”

그게 끝?

너무 빠른 대답에 내가 당황했다.

혹시 몰라 그럴듯한 이유 몇 가지를 머리 굴려 생각해 왔는데.

서재원 팀장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대신 옅게 웃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내 머릴 세게 두드렸다.

“이미 그쪽 동의도 다 받아놓고 물어보는 거 아니었나? 난 장 작가가 그럴 줄 알았는데.”

머리가 띵해진다. 얘기를 마무리 지으면서도, 팀장실을 나와서도 얼얼함이 남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는데, 손바닥 안이었던 원숭이의 마음이 이해가 간달까.

설마 길성혁 문제까지 알고 있던 건······아냐, 이건 너무 갔다.

“······.”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다. 서재원 팀장에 대해.

복도를 걷는데, 문득 얼마 전에 했던 고민이 떠오른다.

내가 만일 한유하 일도 서재원 팀장을 찾아갔다면, 서재원 팀장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회사를 위해 길성혁을 조용히 자르고, 이 일은 묻었을까? 아니면 공론화시키고 뿌리를 뽑았을까?

해결될 고민이 아니란 걸 알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가···.

“길 피디님, 솔라톤 엔터랑 계약했다던데.”

멈칫.

이야, 내 청각이 멜로디를 듣기 시작한 이후로 훨씬 좋아진 것 같다. 저런 것만 쏙쏙 들리는 걸 보면.

자판기 앞에 서서 캔커피를 홀짝이는 프로듀서들. 얼른 걸음을 늘어트렸다.

“뭐야, 더 큰 데로 갔잖아?”

“딱 보니까, 애초에 솔라톤이랑 다 얘기 끝내놓고 사표 던지고 움직인 거네···. 얼마 받고 갔을까?”

“그건 알아서 뭐하게? 괜히 부럽기만 하지.”

“아무튼, 사표 낸 이유가 장 피디랑 이현 가지고 한 내기 때문이란 소리도 있었고, 최정아 때문이란 얘기도 있었는데 다 아닌 거네.”

“하긴, 아무리 그래도 15년 가까이 되는 짬이 있는데···기껏해야 새끼 작곡가 정도 되는 장 피디한테 자존심 상했다고 관둘까. 더 좋은 조건이 있으니까 옮긴 거지.”

“그건 그렇······.”

가까이 다가가자 오디오가 뚝 끊어진다. 민망한 듯 흩어지는 시선들을 보며 목인사를 했다.

‘어쩐지 순순히 관뒀다 했지.’

오히려 잘 됐지 싶다. 밍밍한 사이다를 마시게 될까, 걱정했는데 말이지.

뒤에서 웃음 짓고 있을 길성혁을 떠올리며 걷던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백색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이 진동한다. 한참을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이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분명히 모르는 번호인데, 어쩐지 알 것 같다. 새로운 능력······은 아니겠지.

통화 버튼을 누르자 걸걸한 목소리가 꽂혔다.

-야.

아, 볼륨 줄여야지.

“제 번호를 아시네요?”

-······헛소리 집어치우고, 이제 녹음 파일 지워.

“왜요?”

-왜···하아. 나도 더이상 너 같은 미친놈이랑 엮이기 싫으니까 빨리 끝내자.

“지웠어요.”

-진짜냐?

“아니요.”

-이, 이 새끼가···!

이제 저 소리가 정다울 지경이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듯한 깊은 한숨.

나는 지금까지와 같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며 말했다.

“솔라톤 가셨다던데.”

핸드폰 너머로 비웃음 가득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내가 나가면 아무 데도 못 갈 줄 알았냐? 니깟놈이 아무리 날뛰어도 변하는 건 없어.

개소리에 개소리가 중첩되네.

애초에 변할 걸 기대한 사람도 아니지만.

까면 깔수록 안하무인에 쓰레기인 것도 신기할 정도다.

“그러네요.”

-그니까 좋은 말 할 때 녹음 파일 지워. 뭐, 너도 나 안 보니 후련할 거 아냐. 이제 끝내자.

“그렇긴 한데···또 안 그렇기도 해서.”

-니가 당최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고···.

길성혁이 지쳤다는 듯 말하더니,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은근히 말했다.

-솔라톤 법무팀이 이 업계 최고로 통해. 어차피 그 녹음 파일 제대로 쓰지도 못한다고 너. 이렇게 질질 끌어봤자 네깟놈이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

글쎄··· 저렇게 말하면서 왜 지우라는지 모르겠다니까?

“저도 얘긴 들은 적 있습니다. 솔라톤 법무팀이 일 처릴 그렇게 잘 한다고.”

-새끼, 유명하긴 하지. 이제 말이 좀 통하겠······.

“그렇게 유능하다니 판단도 빠르겠죠. 지킬지, 버릴지. 솔라톤 구경 열심히 하시고요. 조만간 뉴스에서 봅시다.”

-뭐? 뭐! 야, 야···!

전화를 끊었다. 다시 울리길래 거절하고, 차단까지 박았다.

평온해진 핸드폰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앞을 본다. 한유하가 큰 눈을 깜빡거리며 날 보고 있었다. 궁금증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얼굴로.

“누가 뉴스 나와요?”

“응, 아마도 그럴 거 같네.”

한유하가 설핏 웃는다.

“저 누군지 알 것 같아요.”

“떠올리지 마. 지지야.”

빵 터져서 배를 잡고 웃는 한유하.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소미가 정말 그렇게 얘기했다고?”

“네. 용기 내보겠다고···원래 엄마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아빠한테도 얘기했대요.”

그 심정이 상상도 안 간다.

“용기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힘든 결정을 했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저희가 잘 돼야 피디님도 좋은 거잖아요? 얼른 연습하러 가겠습니다!”

훨씬 밝아진 한유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홀로 미팅룸에 남아 한숨을 몰아쉰다.

곪을 대로 곪은 문제.

언젠간 터질 문제였고.

용기를 낸 어린아이도 있는데.

‘돕지 않을 이유가 없지.’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일을 벌이기 직전이라 그런가, 갑자기 묵직한걸.

연결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너머의 공기가 달라진다.

-네, 피디님!

채연주 기자가 해맑게 받았다.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바쁘세요?”

-아뇨? 전혀요? 아니, 거기 아니고요. 네, 거기에 놔주세요.

바쁜데?

-앗 죄송해요, 피디님. 안 그래도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저한테요?”

-네, 이번에 이현씨가 음악프로그램 나가서 피디님 얘기를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진짜, 진짜 인터뷰 한 번 해주십사, 부탁하려고 했죠.

“아···.”

말꼬리를 흩트리다가 대답했다.

“근데, 그 인터뷰도 다음에 해야 할 거 같네요.”

#

시작은 기사 하나였다.

한 대형 기획사의 프로듀서 K씨가 이전 기획사에서 연습생을 추행했다는 내용.

그게 수십 개가 되는 건 한 시간도 안 걸렸고, 곧 수백 개로 재생산되며 실시간 검색 순위도 집어삼켰다.

결국, 뜨겁게 달아오른 인터넷을 지켜보던 방송가도 흐름에 편승했다.

“어제 그거···봤어요?”

들려오던 목소리의 볼륨이 확 작아진다.

“PD노트?”

“예. 그거.”

사람들의 입방아에선 조심스럽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적어도 TKM 회사 직원들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K씨가 누구인지 아는 이들이 많아졌기에.

솔직히 나도 PD노트가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방송 후에 여론도 장난 아니던데요? 이 정도면 우리 회사 이미지도 타격 입겠죠?”

“아닐 수도 있겠더라. 발 빠르게 보도자료 냈더라고. 오히려 욕은 솔라톤 쪽이 더 먹는 거 같던데.”

남직원의 말에 여직원이 의아해했다.

“네? 왜요? 걔들도 이럴 줄은 몰랐을 텐데···.”

“처음 기사 하나 떴을 때, 그 언론사한테 전화해서 법무팀 움직인다, 뭐다 으름장을 놓았나 보더라고. 그래서 언론사는 꼬랑지 말고 기사 내렸는데···.”

“···?”

“갑자기 흐름이 자기들 편으로 넘어온 거지. 이때다 싶어 아싸리 전화 와서 협박한 것까지 풀어버린 거고.”

“와···무슨 영화 같네요. 그럼, 그분은 이제 완전 업계에서 배제되는 거 아녜요?”

“그치. 소송이 어떻게 잘 해결된다 해도 이쪽 업계로는 못 돌아오지.”

두 직원의 얘길 들으며 티스푼을 휘휘 저었다. 음, 커피 냄새.

물이 담긴 컵에 스푼을 꽂고, 뜨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걸음을 옮겼다.

톡. 톡.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하자, 끝도 없이 올라오는 기사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PD노트 : 연습생의 눈물’ 편에 몰리는 뜨거운 관심!]

[K씨는 최근 기획사를 옮긴 중견 프로듀서]

[피해자 B양이 쏘아 올린 공, 연예계 깊숙이 퍼진 문제들 수면 위로 드러나나]

[드디어 터질 게 터졌다는 관계자 입장]

[대형 S 기획사, “K씨는 이미 해고처리 되었다”]

[속속들이 드러나는 기획사 내 갑을관계, “자식을 데뷔시키려면, 1억을 가져다줘야······”]

아무래도 방송가 쪽에서도 벼르고 있었나 보다. 이소미의 소송이 진행되자마자 다른 사건들까지 연이어 터지는 걸 보면. 누구 말마따나 애초에 터질 고름이었던 거지.

실시간 반응도 마찬가지로 시끌시끌하다.

-연예계 이번 기회에 물갈이 싹 됐으면.

-될 리가 있냐. 그냥 저 K씨랑 PD노트에 추가로 나온 몇몇 놈들이랑만 본보기로 모가지 날아가고 끝나겠지.

-그래도 그게 어디임. 이렇게 논란 안 됐으면 저 새끼들 평생 딸 뻘 애들한테 몹쓸 짓 하면서 살았을 듯ㄷㄷㄷ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켜야 하는데.

-적어도 저 업계에선 완전 매장되지 않을까? 신상까지 도는 거 같던데.

-신상 링크 좀.

반응을 읽어내려가며 녹음실로 향한다.

이젠 정말 보는 일 없을 것 같네. 길 씨.

괜히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흐릿한 미래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능력.

불완전한 두 개의 추를 맞춰가며 여기까지 왔다.

과거로 돌아와 세상을 구했다거나, 능력으로 악당을 물리친 건 아니어도. 자신감이 생긴다. 뭔가 될 것 같고.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좋네.’

고양되는 기분을 만끽하며 녹음실 앞에 섰다. 핸드폰은 집어넣었다. 이제 일 하자, 일.

광택 없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어, 장 피디 왔어?”

“피디님 안녕하세요.”

이현 때 봤던 얼굴들이 손을 흔든다. 녹음 작업에 빠질 수 없는 엔지니어들.

“다들 잘 지내셨죠?”

“그럼! 장 피디도 얼굴 좋아 보이네.”

“장 피디랑 일하려고 홍삼 부지런히 빨았지. 이번에도 TOP10 들어야지?”

TOP10이란 소리에 너털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앉아있다 일어난 최정아를 보았다.

“목 상태는 어때?”

“좋아요.”

“바로 가능하겠어?”

“넵!”

끄덕이자 밝게 웃으며 녹음 부스로 들어간다. 엔지니어들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툭.

종이뭉치를 믹서 옆에 내려놨다.

밤을 꼴딱 새우며 빽빽하게 채운 악보.

그리고 의자에 앉아 대략적인 그림을 그린다.

“흣짜.”

의자를 쭉 끌어당기며 유리 너머의 최정아를 봤다. 상기된 표정이 녹는 걸 보며 새빨간 버튼을 눌렀다.

“자, 녹음 들어가자.”

< 026. 앞으로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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