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곡천재의 멜로디-24화 (24/221)

< 024. 플로라 (2) >

스툴에 앉은 성현지가 쌍꺼풀 없이 큰 눈으로 작업실을 둘러본다.

나는 문을 닫으며 라운지에서 타온 차를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양손으로 컵을 받쳐 든 성현지가 꾸벅 인사한다.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나도 의자에 앉아 방향을 성현지 쪽으로 돌렸다.

왜 왔을까?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차게 식은 커피를 연신 홀짝이며 기다렸다.

“노래 들었어요.”

“그래?”

“너무 좋았어요. 제가 오바하는 건지 모르지만 진짜 우리 노랠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다행이네.”

담담해서 더 위태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끄덕였다. 뭔가 다음 얘기가 나올 타이밍이 지난 것 같은데. 성현지는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성현지가 입을 뗐다.

“저희랑 작업 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랬지.”

“얼만큼이요?”

“어?”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

황당했다. 얼마만큼이라니.

“많이···?”

“부족해요.”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귀여웠다. 18살짜리 여자애가 곡 달라고 새끼손가락이라도 걸 것 같았다.

“엄청. 아니, 꼭 주고 싶어. 그 곡.”

물론 누구 한 명의 빈 자리도 있어선 안 되겠지만.

뒷말은 삼켰다. 성현지가 한유하를 미워하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나저나, 여기까지 찾아온 건 그냥 여고생의 조바심과 간절함이었나?

“유하요.”

책상 위, 커피잔을 향해 뻗던 손이 멈칫했다.

한유하?

“왜 갑자기 그만두려는지 몰라요.”

놀랐네. 너만 모르나. 우리 모두 모르는···.

“확실히는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실하지 않은 건···뭔데?”

“유하한테 엄청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이름이 소미였나. 아무튼, 그 친구도 여기 연습생이었어요.”

“······.”

계속 얘기하라는 듯 끄덕였다.

“근데 어느 날 유하가 그러더라구요. 소미가 연습생을 관뒀다고. 그 후론 연락도 안 된다고. 그렇게 한참을 혼자 우울해했는데 저 저번 달인가, 연락이 됐나 봐요. 그래서 신이 나서 나갔었는데.”

그랬는데?

“그 뒤로 유하가 완전히 변했어요.”

“······.”

찜찜하다. 데자뷰도 아닌 게 익숙하고, 드라마도 아닌 게 극적이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연예계에 나도는 소문 중 하나처럼 들린다.

“그 소미란 친구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냥 유하 친구였어요. 그것 말고는······아, 공채 오디션 출신이고, 월말 평가받고선 데뷔 조로 올랐었어요.”

점점 그림은 맞춰지는데, 화질이 구리다. 선명하지가 않아.

“매니저님도 이 사실 아셔?”

“아뇨, 몰라요.”

몇 번 본적 없는 나한텐 말하고, 지영환 매니저한텐 비밀로 한다? 이건 좀 이상한데?

“왜 말하지 않았는데?”

성현지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매니저 오빠는 꼼짝도 못 해요.”

“누구한테?”

“이 실장님한테요.”

그게 지영환 매니저한테 말하지 못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그리고 이 실장님도 꼼짝 못 해요.”

어?

“길 피디님한테.”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왔을까?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고 성현지가 말을 이었다.

“하루는 월말평가에 그분이 오셨었는데, 다 끝나고 유하를 조용히 부르셨어요. 뭐라고 했는진 몰라요. 근데 돌아온 유하가 사색이 되어 있었어요.”

“······그때가 소민가? 그 친구가 연습생을 그만뒀을 때야?”

“네? 아···네, 바로 직후였던 것 같아요.”

“······.”

“그래도. 피디님은 피디님이시니까······.”

회사에선 아직도 신입 소리 듣는 프로듀서인데, 이 아이에겐 그래도 프로듀서였나보다. 같은 프로듀서인데 느낌이 참 다르네.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길어지는 침묵에 성현지가 불안한 눈빛을 보낸다. 괜히 얘기했나, 하는 눈치.

내가 안심하라는 듯이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나 피디야. 피디.

“잘 얘기했어.”

#

“아. 머지. 갑자기 배가 고픈 걸.”

안무를 연습하던 성현지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기계적으로. 옆에 있던 유예지가 갸웃거렸다.

“어? 밥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우린 한창 클 나이잖아. 돌아서면 배고픈 법이지. 하하.”

“언니 항상 밥도 제일 적게 먹잖아?”

“그래서 배가 고픈 거지. 맞네. 맞아.”

“아하.”

단순한 유예지가 납득해버린다.

“아, 언니가 말하니까. 나도 갑자기 고픈 거 같잖아!”

신소영은 말만으로 배가 고플 수 있는 대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컵라면.”

“헙!”

“삼각김밥.”

“흒!”

“소세지.”

“흐어어.”

유혹은 간단했다.

“편의점 갈까?”

성현지의 말에 두 아이가 고개를 파닥파닥 거린다. 그중 하나. 신소영이 고갤 돌렸다.

“유하야. 너도 편의점 갈 거지이?”

“매니저 오빠가 저번에 떡볶이 먹은 것도 뭐라 하셨잖아.”

“야!”

성현지가 버럭 소릴 질렀다. 저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너, 너는 먹기 싫음, 먹지 마. 우린 먹을 테니까.”

“······.”

“언니 왜 화를 내···.”

유예지가 금세 울적한 얼굴이 되어선 걱정한다. 신소영도 당황해서 한유하 눈치를 본다.

“배고파서! 예민해서 그러지. 뭐 좀 먹으면 나아질 거 같아. 얼른 나가자.”

성현지가 신소영과 유예지를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홀로 남은 한유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멤버들이 나간 문을 보았다.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해해.’

자신이 갑자기 나가겠다고 해서. 그래서 데뷔가 보류되었다.

이 실장님은 말이 보류지 무산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따가운 눈총을 보내기도 했지.

적게는 2년, 많게는 4년 동안 연습생으로 고생했던 멤버들. 모두 티는 안 내지만 속상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성현지가 저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제는 곡도 받았지. 노래는 최고였다. 듣는 순간, 그냥 데뷔를 하겠다 말하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매니저 오빠와 멤버들···그리고 친구, 이소미를 생각하면 더더욱.

순간 눈앞이 뿌옇게 차오른다. 어제 들은 노래가 생각나서, 그 노래가 너무 부르고 싶어서.

덜컹.

그때 안무실 문이 열리며 경첩이 삐걱거렸다. 또 신소영이 ‘유하야, 이거 봐라!’하면서 들어오겠지.

한유하는 얼른 고갤 돌려 눈을 벅벅 닦았다. 그리고 세상 괜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니···.”

말이 뚝 멈췄다.

신소영은 없었다. 유예지도, 성현지도 아니었다.

“어······혹시 주스 좋아해?”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는 건 어제 본 장 피디님이었다.

#

한유하는 살짝 벌게진 눈으로 날 보고 있다. 인제 보니 경계심 어린 눈빛이었다. 손에는 내가 사온 주스를 꽉 쥐고 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말 해봤는데, 한유하는 여전히 비슷한 눈빛이다.

“···어떤걸요?”

여고생. 17살. 한창 감수성이 널뛰기를 할 나이. 조심스럽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전부 예민한 문제들이다. 죄다 지뢰야.

일단 살짝 떠보자. 뭐가 좋을까.

“혹시, 주변에 연습생 그만둔 친구 있어?”

“네···?”

저거 흔들리는 거 맞지? 분명히 밝은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움직였는데.

“그 친구 그만둔 이유가 회사 사람 때문이니?”

진짜 지뢰 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가려진 칸을 누르고, 눈빛으로 유추한다.

이러고 보니 여고생이라 다행이었다. 감정 변화가 극명해서 판단이 쉬우니까.

“······.”

어쨌든, 이번 것도 통과.

그럼 이제.

“그 사람···혼내주자.”

“지금 무슨 얘길 하시는지······.”

“알잖아.”

조금 단호했던 대답에 한유하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선방인가? 가녀린 영혼에 기스를 낸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응. 사실 아무것도 몰라.

아는 척, 위로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아는 게 됐다. 한유하가 말하는 것들을 짜깁기하면서 말이다.

“저한테···소미랑 했던 얘기들 다 잊고 조용히 나가라고···안 그러면 저희 멤버들은 평생 가야 데뷔할 일 없을 거라고···.”

나는 엉엉 우는 한유하를 달랬다. 하얀 얼굴을 무릎에 박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군다. 회색 레깅스가 검게 물들었다.

가만히. 눈물이 마르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보단 한결 괜찮아진 한유하에게 물었다. 핸드폰을 보면서.

“현지가 뭐 먹고 싶냐네?”

시끌벅적 떠드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안무실 문을 닫았다.

어둑한 복도를 걷는다. 괜히 분위기가 그렇다. 누아르의 한 장면 마냥.

그래서 그런가, 나도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네. 빵, 쏴 버리고 싶다.

‘개자식.’

문득 오디션 때의 기억이 스친다.

‘연습생 만들어서 뭐 어떻게 해보려는 거야 뭐야. 니미.’

‘피디님은 그러십니까?’

‘뭐야?’

‘아니, 꼭 그래 본 적 있으신 것처럼 들려서요.’

이때, 얼마나 찔끔했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욕지기가 울컥울컥 올라와.

엘리베이터를 오르면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화면엔 채연주 기자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전화를 걸까, 말까. 쏠까, 말까.

“후우······.”

김이 날 것 같은 한숨을 뿜어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녹색 통화 버튼에 엄지를 올렸다. 이제 살짝만 내리면 전화가 간다. 그러면 내일 아침, 인터넷에 기사가 쫙 퍼지겠지. TKM 프로듀서가 연습생을 추행했단······.

순간. 엄지를 구부리려다 멈췄다.

아차 싶어서, 핸드폰 화면을 바로 꺼버렸다.

“······.”

총구가 어딜 향해있는지도 모르고 쏠 뻔했다. 정작 피해자는 우울증에 병원까지 다니면서도, 꼭꼭 숨기고 있는데. 내가 방아쇠를 당길 뻔한 거다.

당겼다면, 맞는 건 길성혁만이 아니었겠지.

작업실로 들어가 겉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7시. 해가 길어져서 밖은 이제야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길로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

“그래서, 그냥 이렇게 넘어가겠다고요?”

-이 일 키웠다가, 너가 그동안 오디션에서 네 입맛대로 뽑은 거랑 내가 그거 용인한 게 다 드러나면? 너야 반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인 작곡가지만 난 TKM 직원이라고.

“서재원 한 마디에 바짝 쫄아선···!”

-···뭐, 임마?

전화를 끊어버린 길성혁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젠장!”

자신의 작업실 소파에 앉아있던 길성혁은 분노와 답답함이 뒤엉킨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박 팀장 겁쟁이 새끼.”

썩어들어가는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개쪽을 당하고 이렇게는 못 있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계속 중얼거린다.

“이미 계약도 된 마당에 곡 준 걸로 걸고넘어지는 건 힘들 거 같고···뭘로 조지지.”

장기로. 눈엣가시 같은 놈이다.

이현 때부터 지금까지.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들었다.

‘아예 눈앞에서 치워야 성이 풀리겠는데···.’

번들거리는 눈으로 고심을 이어가는데, 작업실 문이 두드려졌다.

쿵쿵.

“임마 열려있어!”

길성혁이 소리쳤다. 문밖의 주인공이 자신의 새끼 작곡가일 거라 생각했다.

“뭔 새삼 문을 두드려.”

투덜거리며 새로 꺼낸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

슬쩍 돌아간 시선에 새끼 작곡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걸렸다. 길성혁의 얼굴이 제대로 일그러지고.

문을 열고 들어온 장기로가 작업실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 024. 플로라 (2) > 끝

ⓒ 나일함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