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3. 플로라 (1) >
조명에 비친 단발이 회색빛으로 반짝인다.
조막만 한 얼굴에 용케도 들어간 두 눈이 날 향해있었다.
“······.”
“······?”
아, 아.
서둘러 멍청한 표정을 풀었다. 옆에서 지영환이 계속 뭐라고 떠들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하나도 못 들었다. 안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뭐지?’
왜 들리던 멜로디가 안 들리는 걸까?
나한테 뭔가 변화가 생긴 건가 싶다. 피곤해서 능력이 일시적으로 안 된다거나, 뭐 그런 건가?
눈알을 바쁘게 굴리며 생각해 봤지만 그럴듯한 답이 없다. 무슨 영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듯 계속 생각들이 떠오른다. 끝도 없네.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지영환을 보았다.
“아무튼, 그래서 피디님이랑 같이 내려왔어.”
대충 내가 플로라와 함께 곡을 작업 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아. 네···.”
한유하의 뜨뜻미지근한 반응. 뭔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했었는지 지영환이 입맛을 다시며 머릴 긁적인다. 그리고 여전히 멜로디는 안 들리고.
‘뭔가 달라진 건 확실해.’
그게 뭔지 모른다는 게 문제.
지금까진 상대의 목소릴 들으면 함께 들렸는데. 아까도 분명 그랬었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
“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영환과 한유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왜요? 피디님.”
“아, 아뇨.”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설마, 내가 아니었나?
나한테 생긴 변화가 아니라······.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나머지 멤버들이 들어온다.
“유하야! 이거 봐라! 우리만 살찔 수 없어서 너껏두 사왔···어? 오빠랑 피디님도 계셨네?”
신소영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며 올라온다.
얼른 한유하를 돌아봤다. 입만 보인다. 천천히 달싹이는 입술.
“괜찮은데···.”
그 순간. 허전하던 귀로 은은한 소리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이거였구나!’
#
“안녕히 가세요!”
플로라 멤버들이 고갤 꾸벅 숙인다. 나는 웃으며 끄덕였고, 돌아보니 지영환이 문을 활짝 연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복도로 나와 함께 걸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하던 지영환이 입을 연다.
“유하가 원래 저렇게 말이 없고, 울적한 애가 아니었어요.”
답답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고, 잘했습니다. 안무는 좀 부족했지만 밤새워가며 노력으로 커버했었고···. 그만큼 열정적이던 애였는데 지금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데뷔가 결정 되었을 때 만해도 드디어 자기 곡을 갖게 된다며 폴짝폴짝 뛰어다녔었는데···.”
고갤 끄덕이며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섰다.
버튼을 누르고 지영환의 이야길 들었다.
“그래서 장 피디님 모셔가면 혹시나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늘 반응 보니···아무래도 마음이 이미 떴나 봅니다.”
착잡해 하는 지영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한유하에게서 멜로디가 들린다. 하지만 걔 혼자선 안 된다. 멤버 전원이 모두 모였을 때. 그때 한유하의 목소리에서 멜로디가 들린다.
왜? 모른다.
다만 능력이 내게 뭘 알려주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얘네는 함께 있어만 한다고.
그래야 이 멜로디가 의미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묘하다. 이제는 멜로디를 듣는 게 단순한 능력이 아닌, 무슨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반드시 가야만 하는.
그래서 오디션에 떨어진 최정아에게 손을 내밀었듯, 데뷔가 무산될 위기에 놓인 플로라에게 손을 뻗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잠깐의 고민. 결국, 머릿속에 남은 건 음악밖에 없었다.
자신에게서 나온 멜로디를 들으면 사라졌던 의지가 다시 피어오르지 않을까?
사실 이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자신 있는 거기도 했고.
엘리베이터가 곧 도착할 것 같길래 얼른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
“예?”
“제가 오늘 중으로 곡을 하나 보낼게요. 한 번 애들이랑 같이 들어보세요.”
지영환이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는 듯 끔뻑인다.
“유하가 자기 노랠 갖는다고 좋아했다면서요. 곡을 들려주면 또 모르지 않겠어요?”
“아!”
지영환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올라탔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이 닫힌다. 은근한 부유감을 느끼며 구석에 기댔다. 입사해서 한 거라곤 사실 이현 싱글 작업뿐인데, 뭔가 벌써 몇 개는 더한 것 같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여, 장기로.”
비스트로가 반색하며 올라탄다. 그는 옆으로 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내 어깨를 자신의 몸으로 툭 쳤다. 당연히 나는 쭉 밀렸고.
“직업 바꿨다며?”
“네?”
“캐스팅디렉터로 전향했다던데?”
아···.
공격당한 부분을 문지르며 물었다.
“벌써 소문이 났어요?”
“SNS에서 가장 핫한 일반인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러 왔었다는데, 당연히 소문나지.”
그렇긴 하겠다고 생각하며 끄덕이자, 비스트로가 신기하단 눈빛으로 묻는다.
“그 사람 캐스팅팀에서도 엄청 찾았다던데, 대체 어떻게 데려온 거냐. 원래 알던 사람?”
“알던 사람이죠.”
근데 생각해보니 나만 알던 사람은 아니잖아.
“피디님도 아는 사람이고.”
“엉? 나도 알아? 누군데?”
비스트로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궁금해 죽는 표정을 보니, 이래서 나중에 가면 쓰고 노래하는 프로그램이 히트를 치는구나 싶다. 사람 심리를 묘하게 건드나봐.
“오디션에서 봤잖아요.”
“야, 오디션에서 본 애가 한 둘······.”
그때 비스트로의 얼굴에 누군가 떠오른 듯했다.
“설마, 그 심혜경 선생님 노래 불렀던?”
내가 빙긋이 웃자, 비스트로가 별안간 손뼉을 친다. 깜짝아. 손이 크니까, 소리도 크네.
“어쩐지! 와, 씨. 내가 어디서 들어봤다 했어!”
그러면서 여러 감탄사를 연거푸 내뱉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실실 웃으며 말했다.
“···진짜 다행이네.”
“뭐가요?”
비스트로가 날 보며 낄낄댄다.
“내가 거기서 점수 낮게 줬었으면 완전 안목 없는 놈 되는 거 아냐.”
#
작업실로 들어와 미뤄뒀던 고민들을 끄집어내자 플로라가 퉁, 하고 튀어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한유하에 대한 고민이었다.
‘정말 갑자기 겁이 난 걸까?’
정 대리의 말이 기억나 전제를 깔아봤다.
하지만 지영환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니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곡이 생긴다며 좋아했던 애가 갑자기 관두겠다고 말했다는 건, 뭔가 이 일이 하기 싫어질 만큼의 사건이 끼어들지 않고서야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한참 고민을 이어 가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상념들을 툭툭 털어냈다. 지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흠···.”
잠시 뻑뻑한 눈을 비비다가, 모니터를 보았다. 오자마자 얼른 입력해 놓은 노트가 띄워져 있다. 한유하의 멜로디였다.
‘확실히 지금까지 들었던 멜로디들과는 다르네.’
유난히 단순하고 반복되는 음들이 많다. 멜로디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빠른 템포의 아이돌 곡이라 이거지.
‘중독성도 있고.’
어느새 머릿속으로 듬성듬성한 멜로디를 채워가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한껏 복잡했던 머릿속이었는데. 음악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니 플로라와 한유하에 대한 고민이 희미해지고, 거짓말처럼 집중이 된다. 이럴 때면 확실히 난 음악을 해야 하는구나, 라고 느낀다.
‘이번엔 사비의 나오는 음들을 변형해서 곡 전체를 관통하는 리프(liff)를 만들자.’
멜로디만큼이나 머릿속에 각인 될만한 라인으로. 적어도 음악에 한해선 중독성은 강할수록 좋으니까.
아이디어를 짜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곡이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다음날.
작업실에 출근해서 겉옷을 벗는데,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니 지영환이었다. 얼른 집어들어 전화를 받았다.
“네, 매니저님.”
-피디님!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 드린 거 아니죠?
살짝 상기된 지영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닙니다. 저도 막 출근한 참이었어요.”
-아이고. 제가 어제 곡 전해 받고 바로 전화드리고 싶은 거 참느라 혼났습니다. 하하. 사실 애들이랑 바로 들었거든요.
핸드폰을 반대 손에 바꿔 들고, 허리를 굽혀 컴퓨터를 켰다.
“어떠셨어요?”
-어후, 노래 진짜 좋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솔직히 저 아이돌 노래 별로 안 듣···큼큼.
아이돌 매니저란 본분을 잊은 듯한 솔직함에 피식 웃으며 의자에 기댔다.
-오늘 출근길에도 계속 흥얼거리면서 왔습니다. 중독성이 무슨······아, 그리고 애들 반응도 엄청 좋았어요. 특히나 유하는···.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노래가 한유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가.
-엄청 큰 리액션을 보인 건 아니지만 분명히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요?”
-살짝만 건드려도 울 것 같은 표정이길래 그 자리에서 뭔가를 물어보진 못했어요. 기회 봐서 제가 따로 한 번 물어보려고요. 정말 좋은 기회니까 놓치지 말자고.
“다행이네요.”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피디님. 지금 회사에서도 거의 반 포기인 눈치였는데···.
지영환의 울컥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이후로도 감사드린다는 말을 서너 번쯤 더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한유하와는 얘기를 충분히 나눠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
잘 되려나? 잘 되겠지?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멜로디의 주인이 자신의 멜로디에 설득당하기를.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마우스로 손을 가져갔다. 오후엔 비스트로의 편곡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오전에 뭐라도 좀 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스트로가 빼꼼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 비 피디님?”
내가 잘 못 기억하고 있나? 오전에 하기로 했었나?
“누가 너 찾아왔는데?”
“예?”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다.
근데 날 찾아올만한 사람이 누가 있더라?
생각나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
“피디님.”
절대 비스트로의 것일 리 없는 얇은 목소리가 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비스트로가 슬쩍 비켜서자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를 높게 묶어 올린, 플로라의 성현지가 서 있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 023. 플로라 (1) > 끝
ⓒ 나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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