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7.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
“뭘 마셔야 할까.”
“전 콜라요.”
반짝이는 버튼을 꾹 누르자.
덜컹. 새빨간 캔이 뚝 떨어졌다.
비스트로는 눈뜨고 코 베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억울함이 듬뿍 묻어있었다.
“사주는 거 아니었어요?”
“···어떤 점이 널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부르셨으니까?”
“아···.”
어쩐지 이해해버린 비스트로가 다시 지폐를 한 장 넣었다. 그리고 고심한다.
“흐음. 나도 콜라 마실까···.”
그때 사무실에서 나오던 정 대리가 우릴 발견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오늘은 커피 안 마시네요?”
“카페인 끊기로 했거든요.”
비스트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 대리가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날 보길래 으쓱이며 답했다.
“비 피디님만요.”
난 이미 중독이라 글렀고.
비스트로가 자판기를 노려보며 옆으로 다가온 정 대리에게 물었다.
“대리님도 뭐 드실래요?”
냉큼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전 봉봉이요.”
알로에. 봉봉.
취향 참 확실한 양반···.
비스크로가 낄낄 웃으며 봉봉과 사이다를 뽑는다.
어쩌다 보니 모두 음료수 캔 하나씩을 들고 테이블에 둘러앉게 되었다.
“크흐으.”
사이다를 무슨 물인 양 원샷 때린 비스트로가 속트름을 하다가 내 쪽을 돌아봤다.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맞다, 오디션 결과가 나왔다더라고.”
“확인했어요.”
“벌써?”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캐스팅팀에 가봤죠.”
비스트로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끄덕였다.
“나도 처음 심사할 땐 그랬지. 내가 높은 점수를 준 애가 뽑혔나, 안 뽑혔나. 그런 게 그렇게 궁금하더라고.”
듣고 있던 정 대리가 불쑥 물었다.
“그럼 기로씨는 누가 궁금했는데?”
대답은 내가 아닌 비스트로 쪽에서 나왔다.
“그···아, 이름이 기억 안 나네. 네가 다른 곡 불러보라고 시켰던. 그 친구 합격 여부가 궁금했던 거 맞지?”
“네.”
솔직하게 답했다. 결과까지.
“근데 떨어졌더라고요.”
“···그래?”
턱을 매만지며 갸웃거리는 비스트로.
“그거 이상하네.”
“···?”
“솔직히 그 친군 붙을 줄 알았거든. 나도 꽤 높은 점수를 줬고, 수연씨나 정훈이도 괜찮게 본 것 같고.”
수연씨는 안무가고, 정훈이는 근육질 보컬 트레이너였다.
그러니까. 그런데 왜 떨어졌을까.
“뭐 길 피디, 그 양반이야 기로 때문에 거기서 좀 민망해졌으니 잘 모르겠지만···.”
“왜요? 거기서 또 무슨 일 있었어요?”
비스트로가 오디션장에서의 일을 쭉 풀어 놨다.
길성혁이 끝내려는 걸 내가 막았고, 다른 곡을 시켰고, 근데 또 그게 반응까지 좋았고.
“길 피디님 화 많이 나셨겠네. 안 그래도 화가 많은 사람인데.”
전부 들은 정 대리가 웃으며 끄덕였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겨 정 대리에게 물었다.
“캐스팅 팀장님이요.”
“어. 캐스팅 팀장님은 왜?”
“어떤 스타일이에요?”
정 대리는 볼을 긁적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뭐. 적당히 권위적이시고, 적당히 일도 잘 하시고. 다 적당 적당한 사람?”
“그분, 길성혁 피디님이랑 원래 친하세요?”
“응? 뭐 두 분 다 여기에 오래 있으셨으니까. 근데 왜?”
되묻는 정 대리에게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캐스팅팀 갔다가 궁금해져서요.”
#
퇴근길은 개운하고 즐거워야 정상이지 않나?
하물며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라면 더더욱.
술 약속을 잡을까. 게임을 할까.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몸을 풀릴까. 그런 생각 하면서 콧노래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흐아. 머리야.”
복잡하다.
최정아가 부당하게 떨어졌을지도 모른단 심증은 확신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고.
당연히 길성혁 짓이라는 생각에 또 열 받고.
거기에 낀 캐스팅팀 팀장은 또 뭔지.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어둑한 거리에 아직 환하게 켜져 있는 카페. 마감 중인지 의자 몇 개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틈으로 의자를 번쩍 들어 올리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최정아였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카페로 들어갔다.
딸랑. 문에 걸린 종이 울리며 의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최정아가 몸을 돌린다.
“저희 지금 마감이라······어?”
놀란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디션 때 봤던 그 표정이네요.”
최정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놓았다.
“퇴근하고 오시는 길이에요?”
“네, 오다가 불 켜져 있길래 봤는데, 마침 딱 보이더라고요. 관두셨다더니 다시 일 하는 거예요?”
“대타로 일주일 정도만······.”
말 끝을 흐리던 최정아가 퍼뜩 고갤 들더니 말했다.
“아참, 노래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듣고 있어요. 너무 좋다~,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프로듀서님이 작곡하신 곡이더라구요. 깜짝 놀랐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멋쩍게 웃었다.
뒤이어 최정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그땐···정말 감사했어요. 한 곡 더 부르게 해주셔서.”
“······.”
순간 가슴이 덜컹하는 것 같았다. 받아선 안 될 감사 인사를 받은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 한 곡을 더 요청하면서.
내가 캐스팅팀까지 가서 관심을 가져서.
그래서 길성혁의 타겟이 되었고, 떨어지게 된 걸지도 모르는데.
속 빈 웃음을 흘리며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덩달아 굳어진 최정아의 표정을 보며 입을 뗐다.
“오디션 결과가 내부에선 이미 나왔어요.”
아주 잠깐, 최정아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 예···.”
결과를 직감한 듯. 최정아의 목소리가 옅어져 있었다.
“정아씬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커트라인엔 조금 못 미쳤던 것 같아요.”
“헤에,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나름 괜찮았단 거니까···괜찮아요.”
안 괜찮구만 뭘.
“다른 곳도 지원한 적 있어요?”
“기획사요? 많았죠. 한···여덟 곳 정도? 근데 다들 아이돌 쪽으로 얘길 하시더라구요. 그 중엔 좀···이상한 곳도 있었고.”
“아.”
“그래서 TKM에 갔었어요. 규모가 있으니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긴 하죠.”
“아, 그리고 제인님이 인터뷰한 거 봤는데, 거긴 가수가 하고 싶은 걸 우선 적으로 본다고 해서······헤. 웃긴 얘기죠? 떨어져 놓고.”
민망한 미소를 짓는 최정아를 보는 순간.
아까부터 최고점을 찍고 리미트를 터트릴 것 같던 온갖 고민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새 한 곡 잘 됐다고 겁이 많아졌나.’
조소하는 길성혁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작 날 골탕 먹이기 위해서. 한 사람의 꿈을 가볍게 밀어낸 이의 웃음이었다.
‘그냥 못 넘어가지.’
코트 주머니에 넣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끓어오르는 감정과는 달리 차분하게.
최정아를 보며 말했다.
“저도 웃긴 얘기하나 할게요.”
“···?”
“저랑 프로젝트 하나 해볼 생각 있어요?”
최정아가 갸웃거린다.
의문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네에? 그게 무슨···.”
“전 최정아씨 가능성을 봤어요. 그래서 자꾸 욕심이 나서요.”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마주하며 그녀가 듣고 싶어 할 만한 이야길 골랐다.
“하고 싶은 음악 해봐요. 우리.”
“···!”
효과는 훌륭했다.
#
다음날.
시내 근처 오래된 상가건물 앞에서 최정아를 기다렸다.
여전히 1층은 옷가게였다. 기억 속 그대로.
‘대체 몇 년 만이냐.’
10년은 훌쩍 넘었을 거다.
옷가게 옆으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따로 있었다. 검게 페인트칠 된 문에는 빼곡한 낙서와 함께 여러 가지 힙한 스티커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저 중엔 내가 붙인 것도 있으리라.
감상에 젖어 주변을 서성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SNS에 들어갔다.
친구들의 사진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관심 없다. 곧장 돋보기 아이콘을 눌러 페이지 하나를 검색했다.
일반인의 노래 실력을 제보받아 올리는 컨셉의 페이지.
페이지 좋아요가 80만이었다. 앞으론 더 늘겠지. 10년 뒤엔 500만을 훌쩍 넘겼었으니까.
이어폰을 꽂고 조회 수가 높은 게시물 영상을 몇 개 확인했다. 대강 이런 느낌으로 찍어 올리는구나, 정도만 참고하기 위해.
그러던 중에 인기척이 느껴져 고갤 돌렸다.
최정아였다.
“안녕하세요!”
긴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볼륨감 있는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목폴라와 청바지. 그 위에 새하얀 롱패딩. 화장도 살짝 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꾸민 듯 안 꾸민듯한 그런 느낌.
잘 참았다. 하마터면 감탄사가 나올 뻔했어. 저런 비주얼을 무심코 보고도 입에서 와우! 소리 안 나오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닐 텐데.
“피디님?”
“아, 네. 그···.”
오디션 때 이렇게 하고 오지 그랬어요.
-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두 번 칭찬해.
“들어가죠.”
“네.”
옆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두터운 문을 열자, 면도를 삼사일쯤 안 한 것 같은 산적 같은 비주얼의 사장님이 반색한다.
“어, 너! 이게 얼마 만이냐.”
그리도 다른 녀석들도.
야옹~.
어째 고양이들이 더 는 거 같네.
한쪽 구석에서 접시에 코를 박은 녀석.
소파 위에 앉아 그루밍 중인 녀석.
사장님 책상 위와 컴퓨터 본체에 딱 붙어있는 녀석들까지.
확실히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수가 많았다.
야옹~.
“널 알아보나 본데?”
“에이, 10···아니, 3년 만인데 설마요.”
“그렇게나 됐나?”
“2학년 때 왔었으니까 그 정도 됐을걸요?”
“흐메 시간 참 빠르다. 야 근데······저 친구는 못 들어오시는데?”
“예?”
돌아보니 최정아가 바짝 얼어붙은 채 입구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사장님에게 물었다.
“합주하려고요.”
“합주실을 당연히 합주하러 왔겠지. 니가 어디 안부 전하러 오는 놈이냐.”
“푸흐, 안부는 제가 이따 전할게요. 일단 저 손님은 안으로 모셔야 될 거 같은데.”
“B룸으로 들어가. 두 시간 뒤에 예약 있으니까 알아두고.”
얼른 B룸의 이중문을 열어 최정아에게 손짓했다. 고양이들 앞을 막고서.
최정아가 후다닥 안쪽으로 들어가고 나도 함께 따라 들어왔다.
“고양이 무서워해요?”
“아뇨, 좋아해요.”
“네?”
“영상으로 보는 건 좋아해요. 근데 막상 눈앞에 있으면 무섭더라구요. 이상하게.”
“아아,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 있었어요.”
사촌 동생이 그랬지. 거긴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였지만.
끄덕이며 믹서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흣짜. 여긴 진짜 그대로네······아, 의자에 앉아있어요. 이거 좀 만져야 해서.”
“넵.”
최정아를 뒤로하고, 마이크와 건반에 연결된 채널들을 찾았다.
“여기 자주 오셨어요?”
“아, 학교 다닐 때요. 여기가 저렴하거든요. 가깝기도 하고.”
“아아~.”
각 채널에 있는 노브를 조절하고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최정아는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 근데···이제 뭘 해야 해요?”
“어, 일단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볼륨을 작게 줄이고.
“들어봐요. 잘 부르는 편은 아닌데···큼,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코드를 짚으며 천천히 흥얼거렸다.
원래 긴장 잘 안 하는데, 최정아의 시선이 바짝 붙어있어 그런가. 어쩐지 손가락이 뻑뻑하다. 목 상태도 오늘따라 별로인 것 같고.
보이싱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던 멜로디가 멎고.
마지막 코드의 페달이 끊어지며 주변이 조용해졌다.
은근히 떨리네 이거.
슬쩍 고갤 들어 최정아를 봤다.
최정아는 그 큰 두 눈으로 날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각했는지 ‘아.’라는 소릴 내며 시선을 내렸다.
“어떤 것 같아요?”
“좋아요. 엄청···. 근데 무슨 노래예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답했다.
“정아씨가 부를 곡이에요.”
“.....?”
순간. 적막이 돌았다.
최정아가 다시 날 보고 있다.
좀 더 큰 눈을 하고선.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물었다.
“부를 수 있겠어요?”
이 노래는 최정아에게서 태어난, 그녀만이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자신도 어렴풋이 그걸 느끼고 있을 거고. 그러니 그녀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최정아의 선홍빛 입술은 한참을 달싹이며 애간장을 태우다 마침내 열렸다.
“해볼게요···하고 싶어요.”
눈이 반짝이고 있다.
어쩐지 나까지 의욕이 차오르는 눈빛이다.
그래, 해보자.
길성혁의 유치한 짓거리가 우스워지도록. TKM만이 아니라, 모든 대형 기획사들이 줄을 서도록. 그리고 그녀가 하고 싶은 노랠 할 수 있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 017.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 끝
ⓒ 나일함
=======================================